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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된 사람 Dec 01. 2023

살아있는 것들은 유연하다

삶을 대하는 겸손한 태도, 나를 기억하는 행위를 지속하는 것

초등학교 4학년이 끝나가던 겨울의 끝에서 처음으로 죽음을 마주했다. 영안실에 안치된 아빠의 굳은 몸을 비추는 침침한 백열등은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다. 소독약과 향, 육개장, 수육 냄새가 뒤섞인 장례식장 냄새는 시각적 기억보다 더 강렬하게 남은 것 같다. 

1년인가, 2년 쯤 뒤에 삼촌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했다. 삼촌이 사고로 우리집 근처 병원 응급실에 있다는 연락을 받은 엄마를 따라 병원에 갔다. 이런저런 일들로 분주한 어른들을 대신해 나는 삼촌 곁에 있었고, 굳어가는 것 같은 움직임이 없는 삼촌을 보면서 돌아가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디서 주워들은 가장 마지막에 닫히는 감각기관이 청력이라는 것을 떠올려 삼촌의 귀에 대고 아빠를 힘들게 해서 미워했지만 그래도 꼬박꼬박 아빠의 제삿날에 와주셔서 감사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몇 해 전, 나흘 간 호스피스 병원에 머무르며 가족의 임종을 지켰다. 호스피스 병원은 기묘한 공간이었다. 진통제가 없이는 한순간도 버틸 수 없는 환자들과 그 고통을 지켜보는 보호자, 환자를 돌보는 의료종사자들의 생활이 이어진다. 자원봉사로 운영되는 구내식당은 각자의 사연을 품은 보호자들과 종사자들이 뒤섞여있지만 무겁게 가라앉아있지 않았다. 스텐 식판이 부딪히는 소리, 싱크대에 쏟아지는 물소리, 사람들의 대화소리가 한데 섞여 경쾌하기까지 했다. 병실로 돌아오는 길에서 힐끔 쳐다본 다른 병실 안도 여느 병원의 입원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는 건강에 좋은 제철음식을 소개하고 있고, 보호자와 환자는 티비를 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대화도 별로 새로운 것은 없었다. 안부를 물을 수 조차 없는 고통을 빼면, 어느 날의 한 대목같은 평범한 날이었다. 일상과 너무 다를 것이 없어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는 볼 수 없는 사이가 된다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런 생활의 날들 중에 이윽고 임종을 맞이하는 순간은 왔다.  


내가 목격한 죽음이란, 멈춤이었다. 강한 진통제가 없이는 한시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멈추고, 들이마신 숨은 뱉어지지 않고, 감은 눈은 다시 떠지지 않고, 구부린 팔은 그대로 굳어지는 멈춤. 몸속의 장기들이 자기 역할을 정지함으로써 삶에서 죽음으로 경계를 넘어갔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 6월 땡볕 아래에서 마늘밭의 풀을 뽑았다. 자리를 비운 사이 내가 뽑아놓고 간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풀이 자라있었다. 무릎을 구부리고 삼천평 남짓 되는 땅의 풀을 뽑다보면, 내가 풀을 뽑고 있다는 행위조차 잊게 된다. 의식없이 반복된 동작으로 풀을 뽑다가, 불현듯 풀에게 존경심이 들었다. 풀은 이렇게 못 살게 훼방놓는 존재가 있어도 좁쌀만한 씨앗이 뿌리내릴 공간만 확보되면 땅이 좁다, 너르다, 박하다, 넉넉하다는 등의 핑계없이 기어이 싹을 틔워 자손을 번식하는 자기 몫의 역할을 한다. 살아있다. 씨앗으로 멈춘 그 순간조차도 자신의 본분을 결코 잊지 않았다. 내가 비록 나의 생활을 지키기 위해 잡초의 인연으로 만난 풀을 뽑아야했지만, 자신이 해야할 바를 마침내 이루고 마는 풀에게 드는 경외심은 어쩔 수 없었다.

 

가만히 살펴보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움직인다. 생명체는 성장과 노화를 지속하며 다음 세대를 남기기 위한 활동으로 에너지를 모은다. 계절은 바뀌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해가 뜨고 진다. 완성(完成)이라는 행위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생명체로서는 탄생-성장-노화-번식, 자연계는 균형이라는 끊임없는 순환의 과정에 내가 단지 어느 한 순간에 놓여있을 뿐이다. 농사를 짓기 시작했을 때, 가장 힘들었던 점이 바로 '연속성'이었다. 직장생활도 직장이라는 전체에 놓여있지만, 인위적으로 구분지어놓은 출/퇴근 시간과 휴일이 잠시 컨베이어벨트에서 내려와 일과 생활에 마디가 지어져있다. 하지만 (스마트를 제외한)농사는 인간의 인위적인 구분이 불가능하다. 순환의 고리에 그대로 따르다보면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농사의 적기를 놓치기도 하고, 내 사정따위는 상관없는 자연의 무정한 흐름을 쫓다 번아웃이 오기도 했다. 나같은 초보 농사꾼이 선배 농업인들을 얼추 흉내라도 낼 수 있으려면, 일반 직장의 짬밥보다 훨씬 긴 경력을 요구될 수밖에 없다.




결국 나는 일보전진을 위해 이보후퇴의 마음으로 전업농을 잠시 내려놓은 상태지만, 농사는 나에게 삶을 사랑할 수 있는 열쇠를 주었다.  무엇을 완성되었다고 착각하고 고정하려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라는 것이다. 

5월, 싱그럽게 핀 사과꽃대에 맺힌 튼실한 사과알맹이를 보고 올해 농사는 잘 되겠구나 기뻐하면 보란듯이 뜨거운 해와 태풍으로 망상은 깨졌다. 그 모진 계절을 다 견디고 살아남은 예쁜 사과 한알에 그래도 얼마정도의 값은 나오겠구나 싶은 달콤한 꿈을 꾸다보면, 나보다 빠른 산새가 먼저 먹는다. 어느 한순간도 완성일 수 없다. 연속되는 한 과정에 그때마다의 성실함으로 자연이 그러하듯이 나도 내 역할을 하는 것만 있을 뿐이었다. 


마흔이 넘고, 경험이 쌓이면서, 싫든 좋든 내 것이라고 이름붙은 것들이 늘어나면서 나는 '나'라는 존재를 고정시켰다. 이리저리 바쁘게 살았지만 내세울만한 경력은 없고, 사랑을 떠들었지만 내 곁에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도 볼품없는 모습의 내가 참 싫었다. 이제와서 무엇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자연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나 또한 연속된 흐름에 놓인 순간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을 때, 나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 같았다.  


순환과 연속은 주어진 환경이다. 이 순환 속에서 어떤 씨앗은 조건과 환경이 갖추어지면 싹을 틔우지만, 어떤 씨앗은 아무리 물을 주고 볕을 쬐어주어도 싹을 틔우지 않는다. 어떤 달걀은 품으면 병아리가 되지만, 어떤 달걀은 아무리 사랑과 정성으로 돌보아도 절대 병아리가 태어나지 않는다. 이 둘을 가르는 차이는 유전자 정보를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일 것이다. 처리를 통해 자신의 정보를 잃은 씨앗은 종자가 아니라 단지 음식물쓰레기이다. 수정되지 않은 달걀은 인간의 식재료일 뿐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는 씨앗, 병아리를 품은 달걀이 싹을 틔우고 생명으로 태어날 수 있는 것처럼. 내가 누구인지, 그래서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간직한 자만이 상황과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에 비로소 나를 펼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자기계발을 가장 자본주의적인 태도라고만 여겼다. 시장이 요구하는 조건들을 갖추어 좋은 가격에 자신의 노동이 거래될 수 있도록 하는 수동적인 노력의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상품이 교화되는 시장은 인간의 욕망과 욕구를 솔직하게 반영한다. 그래서 욕망과 욕구가 반드시 선과 진리를 나타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욕망은 어떤 상품에 의해 그 방향이 정해지기도 한다. 이럴 경우의 상품은 욕망을 반영한 수동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는 적극적인 행위이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다른 대상과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주고받아야 한다. 범위를 좁히면 일회성의 단절적인 것들일 수 있지만, 조금만 시야를 넓히면 연결되지 않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장 이 글을 쓰는 나의 행위조차도 브런치라는 웹사이트의 존재와 연결되었고, 이 글을 읽을 당신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피드백들은 다시 나의 다음 행위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나 아닌 다른 대상과 무언가를 주고받는 과정이 교환이라면, 내가 좋은 것을 건네면 상대방이 좋은 것을 건넬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상대의 배반과 통제할 수 없는 상황들을 감안하더라도 시간과 공간의 범위를 확대하면 내가 좋은 것을 건네어야 상대방에게 좋은 것을 받을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 분명해진다.




살아있는 한, 고정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자연의 한 개체일 뿐인 내가 멈추어있어야할 이유가 없었다. 나이에 갇혀 나를 폄훼하는 것이 생을 대하는 인간의 오만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살아온 나무와 들판이 나이를 핑계로 계절의 변화를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순간의 내가 지닌 모습과 상태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저들처럼 멈추지 않기로 하였다. 나를 잃어 쓰레기통으로 던지지 않고 봄을 기다려 이윽고 싹을 틔운 씨앗처럼 내가 누구인지, 어떠한 삶을 살고 싶은지 물음을 놓치지 않고 매일의 몫을 살아보기로 하였다. 그것을 소명이라고 하든 장래희망이라고 하든 욕망이라고 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느 날은 시시하고, 별로 달라지지지 않는 나를 보고 좌절하기도 할 것이다. 분명. 그래도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나를 기억하는 행위를 지속해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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