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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미 Dec 08. 2022

철학과 전공해서 뭐 할 수 있어요?

귀 얇은 사람이 쉽게 휩쓸리지 않는 방법

나는 귀가 상당히 얇다. 어느 정도로 얇냐면 1분 전에 코트를 환불하겠다고 결심을 해놓고 남자 친구가 그래도 그 코트가 예뻤다고 하면 환불하지 말까? 하고 진심으로 고민할 정도이다. 이런 특징이 내가 사랑하고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면 그들의 말을 조언으로 들을 수 있겠지만, 나를 처음 보는 사람들의 말까지 귀담아듣는다는 게 문제가 되었다. 한 번은 아르바이트 면접을 본 후 택시를 탄 적이 있었다. 택시 기사님께서 내게 여기는 어떤 일로 온 건지 물어보셨고 아르바이트하는 곳이 마음에 들어 들뜬 나는 열심히 대답해 드렸다. 그러다 대학 전공에 대한 얘기가 나왔는데 철학과 전공을 한 내게 기사님께서는 그거 해서 뭘 할 수 있냐고 물어보셨다.


철학과 전공해서 뭘 할 수 있어요?


다짜고짜 나의 전공을 평가하려는 기사님의 마음이 느껴져서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철학 전공에 자부심이 있었던 나는 밝게 대답했다.


“뭐든 할 수 있어요. 제가 원하는 거 뭐든지요.”


이 대답은 정말 진심이었다. 비록 학사 전공이라 철학을 빠삭하게 다 아는 건 아니고 외울 수 있는 철학 구절 하나 없지만, 4년 동안 배운 건 세상과 나의 생각을 편견 없이 수용하고 관찰하는 마음 가짐이었던 터라, 나는 뭐든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기사님께서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는지 기사님은 계속 똑같은 질문만 하셨다. 철학을 배워서 무엇을 할 수 있냐고. 이 질문에 대한 요점이 무엇인지는 알았다. 기술력을 말하는 거겠지. 식품영양학과를 나오면 영양사라는 직업을 가질 확률이 높고 회계학과를 나오면 회계사나 세무사 쪽으로 직업을 가질 확률이 높을 것이다. 전공과 관련된 직업이 바로 있으니까. 하지만 철학과는 그런 직업이 딱히 없다. 그래서 우리 과 학생들은 우스께소리로 철학과가 가장 취업률이 높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입학할 때부터 이 과는 취업이 안 된다는 걸 알고 1학년 때부터 알아서 살 길을 찾아놓기 때문이다.


사실 나도 살 길을 나름 찾아놓긴 했었다. 대학 진학 시절에 포기했었던 디자인을 다시 할 계획을 세워놓았고 그때 구한 아르바이트도 그 계획의 일부였다. 그래서 기사님께 천진난만하게 ‘아, 저는 철학과를 나왔지만 디자인 쪽으로 가려고요. 부산에서 공부하려고 지금 돈 벌어놓으려고 하는 거예요^^’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철학과에 다니라고 추천할 정도로 전공과 너무 잘 맞았던 나는 철학 그 자체에 대한 답을 해드리고 싶었다. 왜냐하면 기사님께 이미 철학과는 취업과 거리가 먼 전공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진 것 같아서 그것을 깨부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기사님의 공격과 나의 방어는 4번 정도 릴레이가 이어졌다. 기사님은 그거 해서 뭘 할 수 있어요? 였고 나는 뭐든 할 수 있어요!^^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서로 똑같은 질문과 똑같은 대답을 지지 않고 했다는 게 두 사람 모두 더럽게 자존심이 세구나 싶기도 하고 지지 않고 맞서 싸운 내가 멋지기도 하다. 어쨌든 결국 기사님께서는 내가 자신의 요점을 파악 못했다고 생각하셨는지, 질문을 더 구체적으로 하셨다. 그거 나와서 무슨 기술을 가지고 취직을 할 수 있냐고, 내가 지금 구한 아르바이트에서 기술 배워서 가게를 차리라고 하셨다. 나는 그냥 알겠다고 대답하며 한쪽으로 흘려들었었다.


아니. 그때는 그 말을 흘려들은 줄 알았다. 면접을 봤던 아르바이트에서 또 비슷한 질문을 듣기 전까지는. 참고로 아르바이트했던 가게의 사장님께 들었던 질문은 ‘왜 철학과를 선택했어? 뭐하려고?’였다.


그때부터 철학과를 전공한 게 그렇게 별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부심 가득했던 내가 그걸 이상하다고 받아들일 정도면 나의 자부심도 사실은 가짜가 아니었을까 하고.


처음 철학과를 전공할 때 두 개의 마음이 있었다. 글을 쓸 생각으로 철학과를 선택했고 성적이 높지는 않아서 선택했다. 졸업한 후에는 철학과에 자부심을 가졌지만 진학을 막 시작했던 1학년~2학년 때까지는 전공을 말할 때 약간 얼버무리기도 했었다. 무슨 전공 하고 있어요? 하고 물어보면 “철ㅎ과요” 이런 느낌으로 대답했었다.


그랬던 마음들이 기저에 깔려 계속 존재했던 건지, 상대방이 아무 생각 없이 던진 질문들도 돌멩이가 되어 나의 마음을 쳐댔다. 사실은 물을 향해 던진 돌멩이를 내가 낚아채서 내 마음에 박아 넣은 거였다. 스스로 계속 그 질문을 반복하여 내가 물에 가라앉을 때까지.


처음에는 철학과가 그렇게 별로인가? 였지만 그것은 점차 내가 잘못됐나 봐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런 경향이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여러 요소 중 하나를 남들에게 부정당하면 나의 전부를 스스로 욕했다. 나의 존재 자체가 잘못된 것 같아서 내가 빨리 바뀌어야 할 것 같았다. 남들이 더 이상 날 욕할 수 없게 그들의 입맛에 맞게 바뀌어야 했다. 하지만 잘 바뀌지 않으니, 바뀌지 않는 나를 욕하고 또 나를 욕하는 나를 욕하고 나의 과거를 욕하고 나의 미래의 문을 닫았다. 남의 말 한마디에 나는 이렇게 흔들렸다.


몇 주동안 이런 생각에 사로 잡혀있다 보니 가만히 있어도 나의 소중한 에너지들이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옆에 나보다 높은 레벨의 몬스터를 하나 데리고 다니면서 공격을 당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그 몬스터에게 맞서기 위해 공격하면 Miss 가 뜨면서 기분 나쁜 소리가 들릴 뿐 아무런 공격도 입히지 못하는 그런 몬스터. 나의 생각을 정리하려고 해도 여러 가지들로 뻗어져 버린 것들을 하나하나 반박하며 정리하기엔 벅찼다. 왜냐하면 그 모든 가지들이 나의 생각에 반박하며 나타난 여러 가설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철학과가 나쁜가 봐 -> 왜 나는 철학과가 나쁘다는 말에 마음이 흔들리는 거지? -> 내 과거에 문제가 있나? -> 어떤 과거들 때문에 이런 태도가 나온 걸까. 이렇게 나온 가지들은 도저히 내가 부러뜨릴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부러진 틈으로  또 빠삭 마른 앙상한 가지가 나오니까.


그러다가 그럼 핵심을 바로 공격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상어와 마주쳐도 주먹으로 바로 코를 때리라고 하지 않는가. 그거처럼 다른 가지들은 어차피 자르면 또 생길 텐데 또 생길 바엔 핵을 건드리자,



정말 철학과가 나에게 별로인가?’에 집중하자는 것으로 시선을 돌렸다.
남들이 뭐라 하건 결국 내가 철학과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거였기 때문이었다.



습관처럼 다른 생각들이 밀려 나올 때는 ‘어쩌라고’ 이렇게 생각해주면서 저 질문에만 집중했다. 정말, 정말로 철학과는 나에게 별로인가? 이 질문에 집중을 하면 어느 순간 주변 환경도, 내 마음도 고요해졌다. 이때는 휴대폰, TV, 책 전부 보면 안 되고 음악 소리도 들으면 안 된다. 정말 이 질문만 계속 생각해야 한다. 내 모든 에너지를 여기에 집중시킨다는 마음으로, 어느 거짓 하나 없이 진실로.


그러다 보면 철학과에 대해 예전부터 생각해왔던 것들이 빠르게 지나가면서 하나의 목소리로 모였다. 그것은 나는 철학과가 너무 좋아, 또다시 재수를 했던 21살이 되어도 나는 철학과를 갈 거라는 확신의 목소리였다.


이 목소리는 어지럽게 엉켜있던 가지들이 어떤 말을 담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못하게 했다. 가지치기는 엄두도 못 내던 것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나에겐 새로운 핵심만 남았다. 나는 철학과가 좋다, 철학 전공을 한 게 너무 마음에 든다 하고.


이때 처음으로 나의 진심에 집중한다는 게 어떤 건지 알았다. 이것은 정말 고요하고 존중받아야 하는 시간이었다. 핵심이 무엇인지 잡아내기 위해 어쩌면 그런 가지들이 나오는 시간을 버텨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또한 나에게 집중하는 게 어떻게 보면 기본서처럼 굉장히 고전적일 수 있고 당연한 말로 들려 마음의 문이 닫힐 수 있다. 저게 뭐야,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잖아 하고. 하지만 기본서가 기본서인 이유가 있다. 느린 것처럼 보이지만 제일 확실하고 가장 굳건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이러한 이유들 혹은 다른 이유들로 어려울 수 있지만, 나에게 집중했던 그 기억 하나만 있어도 나의 귀에는 하나의 거름망이 설치될 수 있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남들의 말과 나의 존재를 구분 지을 틈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 틈이 적당히 벌어져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나는 계속해서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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