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소리꾼의 사랑 표현 법
나는 21살까지 아빠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빠를 떠올리면 내게 화내고 잔소리하시던 모습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물론 아빠가 잔소리하시는 것에 내 지분도 크다고 생각한다. 나는 놀다가도 부모님이 방으로 들어오시면 공부하는 척을 잘 못했다. 공부는 안 하고 놀기만 한다고 혼이 나더라도 오기로 끝까지 노는 모습을 보여드렸다. 공부하는 척하며 부모님을 속이는 게 더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혼나겠지, 그냥 공부하는 척할 걸 하며 덜덜 떨면서도 놀았다. 그냥 공부하면 되지 않나요? 하고 물어볼 수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공부를 좋아하는 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아빠한테 더 많이 혼났던 것 같다.
이렇듯 고집이 센 나와 불 같은 아빠의 성격은 너무 잘 맞았다. 물론 서로 화를 내기에 아주 잘 맞았다는 말이다. 아빠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는 아빠를 이해하지 못했다. 다들 그렇듯 왜 내가 공부할 땐 방에 안 들어오고 놀고 있을 때 들어오는지가 이해 안 됐고 이와 비슷하게 아빠는 왜 칭찬을 많이 안 해주는 걸까 하는 의문점이 남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는 아빠와 달라, 나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많이 해줘야지 하고 결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뒤바꾼 일이 있었다. 지금은 전 남자 친구가 된 사람과의 교제하고 헤어진 후였다. 그 남자 친구는 초반엔 나에게 성실하게 집중했지만 날이 갈수록 나와의 연락이 뜸해지고 데이트하는 날이 적어졌다. 함께 점심을 먹고 나면 집에 가서 잘 거라며 가버렸고 하루에 연락을 10분도 하지 못했다. 한참 연락이 뜸해져서 뭐하냐고 카톡을 보내면 “잤다” 한 마디의 답이 날아왔다. 우리의 관계에 집중하지 못하는 그 사람에게 나는 거의 매일을 잔소리를 했다. 긴 장문의 카톡으로.
결국 서로에게 지친 우리는 얼마 못 가 헤어졌고 어느 이별들처럼 나는 몇 달을 힘들어했다. 많이 울기도 했고 친구들의 도움도 정말 많이 받았다. 흡연자들을 볼 때면 나도 담배를 피워볼까, 그럼 나도 괜찮아질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몇 달을 세상 모든 슬픔을 다 껴안고서 센치하게 다녔었지만 그 시간들 덕분에 나를 많이 알 수 있었다. 나의 중심은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는 걸 깨달았고 무엇보다 가장 큰 자산은 아빠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나눴던 카톡을 자주 봤다. 시간이 갈수록 그 친구의 말은 짧아졌고 나의 말은 길어졌다. 며칠을 대화를 곱씹어보며 나도 말을 너무하게 하긴 했네 하며 반성을 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그렇게 전 남자 친구와 이별을 하고 연애했던 나의 방식을 살펴보다 내가 아빠와 똑같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빠가 내게 칭찬에 인색했던 모습이 내게도 있었다. 분명 나는 아빠에게 아껴져야 하고 사랑을 받아야 하는 존재인데 잔소리와 화를 받은 기억이 많다. 그런데 전 남자 친구와 연애할 때의 나를 보니 나도 그렇게 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도 그 친구에게 내가 너를 많이 아끼고 좋아한다는 것을 말할 타이밍에 잔소리만 퍼부은 것은 아닐까.
이렇게 되니 나도 아빠와 똑같구나, 왜 날 아껴주지 않냐고 아빠를 원망할게 아니었구나, 나는 그 친구에게 잔소리로 남은 그 자국에 사랑을 남겼는데 아빠도 그런 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한 번 연애하는 친구와 잔소리에 대해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이런 잔소리도 나오는 거라며 나 자신을 두둔했었다. 사랑은 전체 바탕에 칠해져 있는 것이고 잔소리는 그저 그 바탕 위에 올려지는 작은 타이포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했던 나도 사실은 아빠의 잔소리를 원망했던 이유가 그 속에서 사랑을 못 느껴서인 것 같다. 그 친구와 연애했던 나도 ‘사랑’이라는 단어를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잔소리를 사랑 대신해서 썼으니까. 사실 ‘사랑’이라는 건 직접 표현해야 아는 건데도 말이다. 이렇게 내가 아빠와 같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아빠에게 전화가 왔었다. 그 친구와 헤어지고 모르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나의 절절한 이별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을 때 혼자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겨울밤이었고 눈은 오지 않지만 너무나 추운 날씨였다. 손에 장갑을 끼고 패딩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노래를 들으며 가고 있었는데, 아빠한테 전화가 왔었다. 받을까 말까 고민했다. 또 잔소리를 하면 어쩌지 싶어서. 조금 고민하다 받은 전화의 끝에서 아빠는 나에게 밥은 먹고 다니냐고 물어보셨다. 조금만 입만 열어도 입김이 새어 나오는 그 추위 속에서 아빠의 말에 나온 눈물은 눈에 뜨겁게 머금어졌다. 아빠도 나를 사랑하는 게 느껴져서. 그때 아빠만의 사랑을 제대로 느꼈던 것 같다. 아, 아빠는 이런 식으로 나에게 사랑을 전달하고 있었구나. 아빠도 ‘사랑’이라는 말 대신 잔소리를, 걱정을 사용했던 거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별 덕분에 아빠의 언어를 조금 터득하게 되었다. 지금은 그 연애가 어쩌면 그렇게 무서워했던 아빠를 이해하라고 만들어진 기회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이 이별 덕분에 지금은 ‘사랑’이 쓰여야 하는 자리에 알맞게 사랑을 집어넣어 전달하고 있다. 제법 자존심이 상할 때도 있고 나를 놓아야 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제야 정말 아빠처럼 잔소리만 하지 말아야지 하는 결심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잔소리 안에 사랑도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야지 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여전히 아빠의 잔소리를 들을 때 억울하고 화도 나지만 그 뒤에 있는 사랑을 발견하곤 한다. 이제는 아빠도 아빠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아빠는 계속 썼던 표현법이고 내가 발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빠의 “취업은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라는 말 앞, 뒤에 붙인 “너무 꼭 바로 취업을 할 필요는 없지만”, “너한테 도움이 될까 하는 말이야.”라는 문장이 이제는 나의 마음을 녹이는 소중한 것들이 되었다. 그 말들이 그냥 붙인 게 아니라 아빠의 애정과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문장들이니까. 아빠의 말에서 내게 중요한 것들을 쏙쏙 뽑아먹는 재미가 나름 있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