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 발표 날 쓰는 일기.
25살을 기점으로 삶을 반추하는 것은 투박하지만 나름의 질서가 있지 않나. 반 백. 반 오십. 그리고 이십오.
오늘은 도쿄대 석사 과정 발표날이다. 평소대로 종합 커뮤니티 센터에 출근을 했다. 발표 시각은 오후 2시. 그전까지는 도무지 업무에 집중을 할 수가 없어서, 하우스 뮤직을 들으면서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을 읽고 낄낄 거리거나 다 큰 성인 남자 둘이 서로를 사랑하네 마네 다투는 소설을 써도 과연 임금이 발생할지를 시험하는 무뢰한처럼 행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종 합격 발표가 났다. 합격이었다.
기묘한 일이었지만 크게 기쁘진 않았다. 고조되고 있던 아찔한 공포가 기쁨으로, 그것이 무색무취의 감정으로 돌아가는 데까지 정확히 1.5초 정도가 걸렸다. 안도감과 흥분은 반비례하는 감정일지도 몰랐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결과와 상관없이 나를 포용해 줄 것이라 기대할 수 있는 동료에게로 걸어갔다. 그에게 석사 과정에 합격했으며 일본에 있을 수 있는 2년을 더 벌었다고 이야기하자 그가 볼을 한가득 채우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축하합니다. 이제야 연구에 집중하실 수 있겠네요.”
나는 어슬렁 거리며 자리로 돌아와 내가 지금부터 뭘 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했다. 스크랩하기 위해 펼쳐놓은 2000년대 초반에 쓰인 책 두 권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으나 도무지 읽을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결국 남은 건 습관뿐이군. 나는 이 작업을 아주 오랫동안 반복하게 될 것을 예감했고 그것을 하루를 쉬기 위한 변명으로 사용했다.
대학원.
약 반년을 연구생으로, 나머지 반년은 열대우림에 사는 악어처럼 수업에 은밀히 잠수해 들어오는 무소속 학생으로 지내면서 대학원에 대해 가진 나의 심상은, 그곳이 에토스를 위한 곳이 아니라 에토스마저 없으면 버틸 수 없는 공간이란 거였다. 이를테면 앨리슨 케이퍼의 불구 시간성에 관한 논의를 실컷 한 다음에 휴강된 분량을 채우기 위해 4시간의 세미나를 견뎌내는 식이었다. 그곳에 다니는 학생들 절반 이상이 정신과 의사와 상담을 하고 있다는 내기에 나는 내 몇 안 되는 전재산을 걸 수 있다. 이러한 딜레마는 어느 날 지하철 벽에 붙어있던 아동 가정 학대 예방 캠페인의 문구와 절묘하게 겹치는 구석이 있었다.
“이건 체벌일까요? 학대일까요?”
그러나 그곳은 내가 마음 편히 드나들 수 있는 몇 안되는 공간 중 하나다.
7시에 업무를 마치고 곧바로 헬스장에 간다. 결과를 기다리던 3일 동안 반복해 왔던 루틴이다. 옷을 갈아입고, 밤 시간대에만 볼 수 있는 어두운 네온사인 불빛이 번쩍이는 세련되고 이질적인 공간에서 운동을 한다. 복싱 때문에 생긴 허리 부상에서 아직 완전히 회복이 되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운동의 가짓수는 한정되어 있다. 나는 뻣뻣한 매트리스에 두 손바닥을 대고 생각한다. 아, 젠장, 부족해. 뜨거운 피가 얽히고설킨 혈관들을 돌고 돌아 몸을 달궈진 돌처럼 뜨겁게 만드는 감각이 절실했다. 난 정말이지 곧 복싱을 다시 시작해야 해. 아니면 섹스를 하던가.
운동을 마치면 정해진 곳에서 샤워를 하고 돌아온다. 라커룸을 열어 방금까지 입고 있었던, 내가 떠올릴 수 있는 한에서 가장 반 사회적이고 가무잡잡한 옷을 꺼낸다. 석사 과정에 떨어졌을 때 잘 차려진 옷을 입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그 순간 자기 자신이 우스꽝스러워 보일 것 같았다. 대충 개어져 있는 카모플라쥬 패턴의 옷가지들을 쳐다보고 있으니 문득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외삼촌과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직업은 경찰이었지만 예부터 상정이 난폭하고 못돼 먹은 구석이 있었던 그 사람.
나의 기억은 쏜살같이 십여 년 전의 해수욕장으로 돌아간다….
나는 초등학생이다. 외삼촌이라는 존재가 어떤 개념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낯선 남자가 등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뿐이다. 나의 본능적인 감각이 그의 명령에 순응하고 뒤를 돌아보기를 거부한다. 그러자 그 낯선 남자가 백사장 전체를 킁킁 울릴 듯한 기새로 다가와 나의 덜미를 잡는다. 그가 성을 내며 소리친다.
“야! 이 새끼야! 너 귀먹었어? “
귀먹은 게 뭐지?
“버릇없이, 외삼촌이 부르는데 대답하지도 않고!”
그러니까, 외삼촌이 뭔데. 나는 두려움과 어처구니없음이 혼탁하게 섞인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본다. 내 앞에 서 있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야? 이제 이 남자는, 초등학생의 어린 여자 아이가 자신의 말에 대답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성인-남자의 권위를 손상시킨 것에 진심으로 분노하기 시작한다. 곧 그의 어깨와 눈썹이 동시에 꿈틀거린다. 그는 투박한 주먹을, 범죄자나 범죄 비슷한 것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여러 번 휘둘렀을 그 단단한 주먹을 정확히 나의 얼굴에 겨낭한 휘두른다. 있는 힘껏, 세게.
나는 본능적으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다.
나는 멍하니 라커룸에 서서, 내가 그때 느꼈던 감각을 얼마나 사랑해 왔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주먹이 나의 코 끝을 스치는 감각.
나는 생각한다. 그 순간, 어린 내가 최초로 선 보였을, 그 작은 몸이 벌이는 아슬아슬한 묘기를. 스파링 도중 고개를 비틀고, 팔을 내지르고, 살기 위해서 말라붙은 숨을 퍼올리는 모든 순간을. 복싱은 몸이 발화하기 시작해서 서서히 연소하는 과정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는 운동이다. 나는 나의 몸이 연소하는 것을 느끼는 것을 사랑했다. 나를 위태로운 상황에 밀어놓는 그 좌절스러운 순간을 사랑했다. 오직 상대방의 얼굴에 주먹을 꽂고자 하는 야만적인 욕망에 안달이 나서, 서로의 안전거리를 침범하고, 최소한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는 위기 외로 발을 헛디디는 순간이 참을 수 없이 즐겁다.
그러니까, 내가 오랜 유학길을 떠난 사이에 부쩍 철이 든 그 사람을 다시 만난다면, 내가 더는 공포에 질리지 않을 거란 사실은 자명했다. 나는 더 이상 아동이 아니고, 어른들의 학대를 고발할 수 있을 정도의 나이가 차서, 스물다섯의 뚫린 입을 나불거릴 수 있게 되었단 뜻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라커룸에 비치된 작은 거울을 말없이 바라본다. 그곳에는 젖은 머리칼에서 떨어지는 물기로 번들거리는, 희여 멀쑥하고 조금은 예민해 보이는 얼굴이 있다.
나는 스스로도 낯설게 느껴지는 두 희갈색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맙소사, 넌 정말 어른이 된 거야.
이젠 정말 무엇을 겪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가 된 거야.
윈터,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고 나면
내게 우주란 어떤 곳인지 알려 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