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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이 료와 가장 최신의 일기.

by Da테

1. 3월 4일.


오늘 쿠루미의 집으로 놀러 갔는데 헤어지기 전 아사이 료의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소설이 어떻게 이어질지가 궁금하여 온천에 몸을 담그고 가만히 휴식했어야 할 시간에 안절부절못하느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고 했다. 나는 쿠루미의 눈 아래 반짝이는 은구슬 같은 눈물을 보았다. '쿠루미, 너 지금 울어?' 그러자 쿠루미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런, 몰랐어. 난 단지 그때 느꼈던 감정에 대해 말하고 있었던 것뿐인데.'


우리는 아사이 료의 생식기를 함께 읽기 위해 각각 책을 구매한 뒤, 쿠루미는 자신의 집으로, 나는 집으로 귀가하기 위한 전철로 향했다. 나는 전철에서 그의 책을 읽었고 곧바로 쿠루미의 눈물을 이해했다. 무서웠다. 정말로 무서웠다. '다쓰야 쇼세이는 다쓰야 나오쿠니와 다쓰야 료코 사이에서 발생한 새끼 개체이다. 이상. 특히 제 시점에서 봤을 때는 부모의 자식이라는 점이 쇼세이의 최신 정보랍니다.' 나는 충격을 받아 아래에 코멘트를 했다. '왜 이렇게 미친 새끼신가요...'


밤 12시에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서 있다는 것이 내게 축복일지 저주일지 알 수 없다. 나는 첨가물 없는 감자칩에 사실은 첨가물을 넣었을 식품 회사에게 그 책임을 돌리고 싶다. 혹은 감자칩 대신 아사이 료의 소설들을 관통하는 주제인 공동체의 진입 불가능성이라는 키워드에 내가 막연한 겁을 집어먹었다고 해야 할까? 줄곧 어디론가 도망가는 감각에 쫓겨 본 사람이라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자격 박탈을 두려워해 본 사람이라면, 그의 글을 읽으면서 이 공동체에 머물기 위해 치른 자신의 가장 참혹한 상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사이 료에 대한 말을 하려고 일기를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요 몇 주간 글쓰기에 몰두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해소되지 못한 정욕과 나도 몰랐던 낯선 애착과 주이상스와 진짜 술, 뭐 그따위 것들을 통째로 셰이커에 넣고 흔들어 글쓰기란 이름의 수제 칵테일을 만들어 마셨고 솔직히 좀 과음했다. 내가 타일러 더든처럼 스스로를 타격할 수 있다면 참으로 기쁠 것 같은데 나의 두 손에는 더 꽂을 비수가 없다.


내게 있어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생존의 문제였다. 어쩌면 공동체의 존속과는 무관한, 지식의 계승과도 무관할 수 있는, 퀴어라는 떠돌이 개체를 위한 양분: 정보, 커뮤니티, 자긍심 대신 불행을 받아들이는 자세. 나는 지식 속에 있어야 안전했다. 사실들을 내 몸에 띠처럼 두르고 진실을 향해 움직이지 않으면, 너 따위는 Not to be라고 외치는 사회의 칼날에 쓰러질 것이다. 내게 있어 대학원에 가는 것은 생존할 수 있는 유예 기간을 연장하는 것과 다름없었고, 삶을 더 삭막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닌 글쓰기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학문적 글쓰기에 있어서 문자는 언제나 어떠한 은밀한 종자처럼, 골똘히 생각을 거듭하여 그 속을 까보면 그 안에 또 하나의 생각이, 또 하나의 가능성이, 또 하나의 의미가 담겨 있어 나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문장은 논지를 치명적으로 망쳐놓을 수 있었다. 따라서 글은 한 단어에 한 가지 정의, 한 가지 의미만을 명시할 수 있도록 한계까지 제련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문학적 글쓰기에 있어서 문자는, 도무지 제련되지 않고, 즉 무언가로 한정될 수도 없고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이 나의 직감이었다. 내게 소설 쓰기란 사실 알기-쓰기와는 무관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좀처럼 당위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철저히 개인적인 불행이자 행복이었다. 나는 글이 내려오는 날이면 잠자코 글자를 담는 그릇 따위가 되고자 했다. 그릇의 운두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다만 그것이 깨지거나 금이 가지만 않기를, 그래서 그것들이 바깥으로 한 방울도 새어나가지 않기를 바라며 전전긍긍했다.


글자는 나의 삶을, 정신을, 영혼을 송두리째 차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말을 지나치게 과신한 탓이었고 또... 내가 너무 자주 도망쳐 온 탓이겠지.


며칠 전에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모든 사람들은 삶 속에서 어느 정도 손상을 입는데 그로 인한 균열이 없다면 그 어떤 글도, 예술도 그들에게 스며들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렇지만 이런 말이 오늘은 내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 나는 빌어먹을 정말로 단단히 상처받았고 내 글을 다시는 쳐다보고 싶지도 않다. 아무도 상처 입히지 않는 내 글을. 특히 절대로 나를 상처 입힐 수 없을 이 조악하고 영세한 문자들의 행렬. 난 결국 살기 위해서 글을 써야 했다는 사실을 지금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책을 책갈피로 쓰는 삶 속에서도 쉴 새 없이 밀려오던 삶의 권태 속에서 날 버티게 하는 신조는 단 하나였다.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게 더 고통스러울 수는 없다는 것. 무지가 날 천천히 질식시킬 수는 있어도, 진실이 나의 삶을 통째로 흔들고 쪼갤 수 있어도, 사실이 날 죽이지는 못할 것이라는 걸. 사랑이 사람을 죽일 수 없는 것처럼. 사랑은 사람을 기어코 살게 만드는 쪽에 가깝다. (사랑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에게 나는 마거렛 미드 식으로 답하고 싶다. 그 사람들이 사랑 때문에 뜨겁게 살았다는 것을 잊으셨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아는 게 고통스럽다.


사회는 내가 죽기를 바라..... 내가 그걸 모를 줄 알았어?

그런데 더욱 슬퍼지는 건 나는 이 공동체 안에서 의태에 성공한 편이란 것이지. 아직까지는. 나는 아직 죽임을 당하지 않았지. 내가 아직까지도 삶에 대해 쓸 수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돼.


, 이건.

숨 넘어가는 소리.


내가 지금의 우울감을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아 정말로.


동성애자로 살 거라면 몰입하는 것,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장에서 빠져나오는 것. 그런 걸 잘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괴테가 이것 비슷한 말을 하지 않았을까? 괴테는 모든 걸 말했으니까.


2. 2025년 어느 날.


나는 지난 5월부터 도쿄의 중심부에 있는 성 소수자 종합정보 센터에서 파트로 일하고 있다. 이 센터는 2018년 도쿄 올림픽을 맞아 -일본이 국제적으로 인권 후진국이라는 오명을 벗어야 했기에- 설립될 수 있었던 이곳은 단기형 프로젝트였지만 무수한 사람들의 도움으로 어엿한 시민 센터로 존립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학부생 때 이곳을 작업 공간으로 자주 이용했고, 졸업 후에는 스태프 모집 공고를 보고 응모해 몇 개의 사업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센터의 플로어 스태프다.


오픈 전. 나는 박상영의 소설을 아무 생각 없이 읽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등장한 충격적인 문장에 소리를 지른다. 사려 깊은 스태프 두 어명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다. 오픈 후. 스태프 M 씨가 나의 옆자리에서 '가자 부엌'이라는 이름의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사강의 소설에 '야이개새끼야씹새끼야'라고 메모를 남기고 있다. 오늘은 이용자가 많지 않아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호흡이 유지된 것이다.


오늘은 이유 없이 피로한 날이다. 스태프 M 씨가 선정한 배경 음악이 나의 기운을 앗아가는데 분명히 일조하고 있다. '이건 무지루시 MUJI의 음악입니다' 하고 M 씨가 밝은 얼굴로 말했다. 브라질, 스페인, 에티오피아, 스코틀랜드 등등... 의 밝은 민속 음악이 관내를 어지러이 누비며 율동미 넘치는 춤을 추고 있다. 두 시간 정도가 지난 뒤, M 씨는 '이제 쇼핑은 끝났어요.'라고 말했다. 곧 지나치게 톡톡 튀는 전자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M 씨는 테크노 뮤직을 좋아한다. 재생되고 있었던 3 HOUR 카페 재즈 보사노바 뮤직 광고 없음 따위의 노래를 끄며 M 씨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독도 약도 되지 않는 음악은 싫어요.'


어느 날. 처음으로 청소년 한정으로 열리는 개관일에 순전히 우연으로 스태프로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주로 다언어 사용자를 대응해야 하기 때문에 청소년이 모이는 날에는 투입될 필요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청소년 한정의 센터의 모습은 평소의 센터와 사뭇 달랐다. 책상들은 한데 모여 모두가 함께 앉을 수 있는 구조로 바뀌었고, 빈 공간에는 텐트가 세워졌다. 장난감들과 간식들이 담긴 플레이트, 보드 게임들이 전면에 나와 있었다. 그들은 특히 음식에 신경을 많이 썼다. 여러 종류의 빵을 잘라 그 자리에서 구워 먹을 수 있었고, 다양한 종류의 레트로 식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또래들과 별 다를 바 없이 간식을 먹고, 게임을 하고, 수다를 떨고 웃는다.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 모두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이곳에 한데 모여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곳을 필요로 한다.

이곳을 필요로 하는 만큼이나 서로를 필요로 한다.


나는 삶이 흘러가는 형상을 조그만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이미지로 연상한다.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깊이를 시험하며 땅 속으로 꺼져가는 것이라고. 과거는 길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이는 것이 아니라, 4차원의, 역사와 시로 겹겹이 둘러싸인 레이어로서 쌓여가는 것이라고. 우리의 현재는 기억을 계승하면서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어떤 기억은 특이한 물성을 가져서 망각이라는 빗물에도 결코 녹슬거나 녹아버리지 않는다.


장소를 찾았다는 것. 이곳에 머물러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는 것. 이곳에서는 자신의 일부가 되어갈 역사를 읽고, 듣고, 만져볼 수 있다. 나는 이곳을 필요로 한다. 이곳의 존속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날 수 있다면 좋겠다.


3. 2025년 어느 날.


성 소수자와 난민으로서의 삶이 교차했던 한 당사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보았다. 생사여탈권이 국가, 경찰, 중개인, 그리고 배의 짐칸에 실린 컨테이너 속에 있는 사람들. 주인공은 난민으로 인정받기 위해 브로커가 위조해 낸 인생사와 탈출기를 자신의 말과 삶에 통합시킨다. 이야기가 적힌 공책의 손글씨를 더는 읽을 수 없을 정도의 시간이 지날 때까지.


정신이 위독해져 어딘가로 도망가고만 싶다.

나는 캄캄한 암흑 속에서 공책 위로 적었다.


‘그렇지만 결국 나는 쓰는 사람.

쓴다는 것은 기억해야 한다는 것.‘


나는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 설 수 없다. 글쓰기란 ‘목격’ 뒤에 따라붙는 책임의 문제다.


4. 2025년 11월.


새벽 한 시를 넘겨 잠드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난 내가 스트레스 받았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알 수 있다. 그걸 알아내는데도 몇 년은 걸렸지만.

우선 먹을 것에 집착한다. 지금처럼. 그래, 꼭 지금처럼 장을 보러 가서 식재료를 차곡차곡 저장하거나, 역설적으로 살림살이를 거덜낼 기새로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댄다. 먹는 것 외에는 생각하지 않는다.

막 입시를 시작했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학원에 다니면서 점심, 저녁을 외식으로 해결하게 되자 나는 먹을 것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메뉴 선정부터, 음식의 배합, 디저트로는 무얼 먹을지를 치밀하게 고민하는 것이 하루에 유일한 낙이었다. 사실 그런 고민들은 꽤 무의미했다. 모든 음식이 과다한 나트륨 함류에 고당류라는 건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를 회상하면서 나는 애인에게 물었었다. '무섭지 않나요? 자신의 최선이 거기에 있다는 게?'


나의 최선은 먹는 것에 몰입해서 가장 원초적인 욕구(굶주림에 대한 공포)를 채운 뒤에, 그 외에 불안들을 일시적으로나마 전부 잊어버리는 데 있었던 것이다.


타당하지 않은가? 결국 우리에겐 먹는 것이 전부인데. 하루 벌어 하루 먹을 것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사람들이 저속노화 실천에 빠져든 것은 그것이 건강하게 늙는다는 것 이상으로, 더 나은 삶, 더 나은, 선진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약속함에 있다. 음식에 집착하고 싶지 않다는 욕망은 지극히 현대적이다. 정말로 지중해에 사는 사람들이 치즈나 올리브 조각 따위를 끼적이면서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것인지 내가 알 도리가 있나.


그런데 젠장, 눈가가 경련한다고? 정말 미쳐버리겠네!


그 이유가 스트레스가 되었던 카페인 과다섭취가 되었던 -공교롭게도 나는 식사를 마치고 디카페인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멈추지 않는 떨림이라는 것은 -로맨틱한 의미가 아니다-그냥, 두렵다.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는다. 스트레스에 대해 적기 시작한다.


그러자, 곧 떨림이 멈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읽어야 할 것들을 집어든다.


새벽 한 시를 넘겨 잠드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시력을 잃는 것보다 내가 두려워하는 일은 없으니까. 나는 하루를 되도록 오래 견디느니 오전 통째를 삭제하는 걸 선호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눈이 건조하거나 찌르는 것처럼 아프거나, 지금처럼 눈가가 경련하는 주범은 늦은 수면이라는 것을 부정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몸이 윽박을 질러댈 때 순응해야 한다. 그걸 몇 번이고 거스른 대가는 이미 충분히 치렀다. 나는 다리를 절룩거리면서도 걷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그 결과로 말 그대로 허리가 작살이 났으니까.


그래, 허리. 허리 때문에 11월부터 5년 이상을 다닌 복싱을 그만둔다. 일 년이 지나도 허리 상태가 말끔히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수영장과 헬스장을 동시에 이용할 수 있는 체육관에 등록했다. 또 되도록 오후 12시 전에 잠들기 위해 노력했다. 루틴은 이렇다. 오후 9시 전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나의 몬테크리스토 백작(키우고 있는 몬스테라)을 햇빛 앞에 놓아준다. 잠자리를 정리하고 차를 마시기 위해 물을 끓인다. 부산스러운 재생산 노동을 해서 집을 원상 복귀 시킨다. 쉴 때는 비스듬한 자세로 누워 햇빛을 쐰다. 눈이 건조해지는 걸 막기 위해서 물을 수시로 마시려고 애쓴다.


불을 끄고 누우면, 몬스테라의 커다란 잎맥이 달빛 아래에 투명하게 빛나고 있다. 잎맥의 섬세한 결이 그리는 아름다움에 순수하게 감탄하며 그것을 관찰하면서 문득 생각한다. 나 완전 식물처럼 살고 있잖아.


오후 6시. 나는 낯선 트레드밀 위에서 달리고 있다. 러닝은 이상하다. 몸이 어떻게 지쳐가는지를 잘 모르겠으니까. 복싱은 발화부터 연소하는 과정이 뚜렷하다. 나는 나의 몸이 연소하는 것을 느끼는 것이 즐겁다. 상대방이 미소를 지으면 덩달아 흥분되고, 반대로 표정이 굳으면 심장이 덜컹 거린다. 그런 원초적인 욕망을 링 안에서는 합법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인간과 인간이 격돌해 만들어낸 충격파는 느껴도 느껴도 결코 질리는 법이 없다. 유감이다. 이곳에서는 그런 충돌을 기대할 수 없을 거란 사실이.


나는 상념에서 벗어난다. 아, 왔다. 불꽃이다. 나는 눈만 굴려 트레드밀 위에 뜬 숫자를 확인한다. 나는 이 불꽃을 가슴속에 되도록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다....


식물처럼 호흡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지. 요즈음 나는 그것처럼 쉬고, 마시고, 잔다. 그리하여 손상된 시신경을 회복시킨다. 식물처럼.


식물처럼 살자. 내가 마음속에 되뇌고 있을 때, 체육관을 함께 등록한 아즈사 선배가 쾌활한 표정으로 나의 옆에 앉아있다. "주로 몇 시에 체육관을 이용하실 건가요?" 직원이 안경을 추켜 올리면서 아즈사 선배에게 묻는다. 선배는 또렷한 목소리로 대꾸한다.


"아침 7시부터요!"


아침 7시?

식물이 아침 7시부터 수영을 하나?


다음날 아침 7시 반. 나는 수영장의 레일에 하반신을 담근 채 멍하니 서 있다.


"선배, 저 수영할 줄 모르는데요."


"수영을 못한다는 게 정말로 못한다는 거였어?"


"물을 무서워하거든요."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나는 나의 겹쳐진 손바닥을 바라본다. 물기에 번들거리는 두 손이 어정쩡하게 포개져 있다.

오직 이런 걸 믿고 잠수해야 한다니.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팔을 움직이는 거야, 알았지?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멈추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는 의지를 가져야 해!"


"반드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 페미니즘 같은 거야! 아무리 더뎌도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처럼. 100년 후에도 이것이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수영이 그렇게까지 심각한 거였어요?"


나는 무거운 맥주병처럼 계속해서 물에 가라앉는다. 호흡을 하는 법을 모르니 물속에서 쉽게 겁에 질리는 탓이다. 가슴이 뜨겁게 조여 오고 곧 눈 뜬 장님 신세가 된다. 둥둥 떠다니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선배, 노래 불러주시면 안 될까요?"


"갑자기?"


"선배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생각하면 상황이 안전하게 느껴질 것 같아서요."


선배는 이웃집 토토로의 인트로를 불러준다.


5. 2025년. 윈터의 생일.


윈터. 어떻게 지내고 있어? 너를 위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일본어 판으로 샀어. 일본어로 읽으면 언어를 잊지 않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내가 좋아하는 책갈피도 함께 보내. 한국에서 샀는데 고흐의 작품으로 장식되어 있어. 아몬드 나무. 스티커도. 넌 노트 꾸미는 걸 좋아하니까 이것저것 넣었어.


때때로 사람들의 잔인한 말에 네가 상처를 입거나 화를 내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파. 네가 그 모든 말들을 무시하고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고 자주 생각해. 우리가 그걸 허락받을 위치에 있지는 않지만, 나는 네 시야를 차단하기 위한 암막 커튼을 설치할 수는 없는지 궁금해.... 별도 좀 보고?


그렇지만 너는 말에 무척 섬세한 사람이잖아. 카펫 아래에 숨어 들어간 단어들이 결국 네 발바닥을 아프게 하겠지. 아무 소용없을 거야. 너는 사람들의 마음을 살필 줄 알고, 그 모든 단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그것들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전부 알 수 있으니까. 네가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것 때문에 몹시도 상처받아야 하는 건 슬픈 일이야. 그렇지만 지금은 단어를 이해하고 해독할 수 있는 재능이 결국 너를 살게 할 거라고 굳게 믿기로 했어. 단지 슬퍼하는 것 말고.


나는 내 생일날 이사를 했어. 네가 이곳에 있었다면 분명 내 방을 마음에 들어 했을 거야. 좋아하는 포스터들도 잔뜩 붙이고, 식물도 들여놓고, 멋진 책장도 샀어. 나도 (좀 웃기는 것까지 포함해서) 많은 감정들을 새롭게 배웠어. 심지어 오늘은 난생처음으로 수영이라는 것도 해 봤어. 같이 있었던 선배가 어떻게 수영하는지 알려줬어.


윈터,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고 나면

내게 우주란 어떤 곳인지 알려 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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