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31.
일기는 되도록 손으로 쓴다.
일기는 소설과 달리 따라 잡힐 걱정이 없기 때문이다. 소설을 쓸 때 나는 나의 욕망을 추적하고 또 추월한다. 일기를 쓸 때는 제자리에 주저 앉아, 희미해진 기억에 멀뚱거리며 나를 기록한다. 되도록 상세하게, 군더더기 없이. 손글씨로 쓰는 것은 이점이 많다. 이미 주어진 포맷에서의 줄 바꿈이 거슬려서 엉뚱하게 문단을 처내야 하는 일도 없고. 쓰다가 화가 나면 태워버릴 수도 있고, 심지어는 먹어버릴 수도 있고.
기억을 톺아보기 위해 2022년부터 쓴 일기장을 한국에서 가져왔다. 7월 초 일본에서 지진이 날 수도 있다기에 일기장 두 권과 칼림바만 달랑 한국에 보관한 적이 있었다. 그것을 다시 손에 넣어 읽었다. 2022년도 이전 나는 글을 잘 적다가도 꼭 두어 번은 바닥에 꼬꾸라져서 흐느끼고는 했다. 이 세상이 상상 이상으로 참담한 일이 벌어지는 공간이라는 사실에 놀란 글자들이 맥이 풀려 흐느적거리거나 가슴을 치며 답답해하거나 난폭하게 고함을 지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2021년도 8월의 일기.
'장례는 남은 자들이 마음껏 슬퍼할 수 있도록 치러지는 것인데 모든 장례를 치러 주기에는 세상에 죽은 이들과 비극이 너무나 많았다. 삶의 대부분은 도처에 널린 죽음을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을 허락해 주지 않는다. 나는 누군가의 죽음에 깊은 충격을 받는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그 자리에서 서서 슬픔에 잠겨 있기보다 어김없이 앞으로 나아가기를 택했고, 그런 식으로 소각해 온 일렬의 이름들과 사실들이 나의 기억 저편에 묻혀 무덤이 되었다.... '네 앞에 고통과 슬픔의 강이 흐르고 있으면 몸을 담가 직접 그곳을 건너가야 한다.' 나는 늘 내가 그 강에 빠져 죽을 것을 염려하였다. 하지만 술에 취하기만 하면 영락없이 그 배가 거꾸로 뒤집혔으므로 나는 장대비를 모아둔 둑이 한꺼번에 터져 범람하는 강에 집어삼켜졌다. 배에서 굴러 떨어져 강의 표면에 부딪히면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아주 작고 희미한 소리가 났다. 나는 추락하기에 알맞은 둥지를 찾은 것처럼 부드럽게 떨어졌기에 나조차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또 학부생 시절, 특히 입국 제한이 풀리고 한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가는 기점 전후에 나는 슬픔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2022년도는, 노트북을 덮으면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는 했던 리모트 수업을 들으면서 틈틈이 관심이 있었던 현장을 어슬렁 거리기 시작했던 시기다. 논문을 집필하는 것이 어떤 행위인지, 풀뿌리 운동이란 무엇인지, 저항이란 무엇인지 질문하는 법을 모르고, 본질에 앞서는 존재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드나드는 현장의 가짓수를 늘려가고 오직 자신이 필요로 하는 선택적인 독서와 이기적인 지적 추구를 밀고 나가며 살았을 뿐이다. 즉, 다소 세련되지 못한 방식으로 공부를 하고 글을 썼다. (그 경솔함으로 지도 교수님께 혼도 났었고.) 다만 저항과 소음에 끊임없이 부딪히면서 자기 자신에게 감응하는 법을 배워나갔다.
이건 22년 6월의 일기이다.
'입국한 뒤 생활을 정착해 나가는 처음 3개월은 감당하기 벅찬 일들이 많았다.... 유학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고 난 뒤에 생겨난 여유의 대부분을 나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구체화하는데 쓰기 시작했다. 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지원 단체와 몇 개의 협업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구상하기 시작했고, 대학의 일부 커리큘럼의 수정을 요구하는 교섭을 신중하게 준비해야 했으며, 세미나의 논문을 쓰기 시작해야 하는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는 한편 새로운 아르바이트, 매일 같이 쏟아져 나오는 과제들을 일사불란하게 처리해야 했다. 장담컨대 그들은 그렇게 처리될 것이다.
... 그 시기에는 내가 헌신하고자 하는 일들이 매일 같이 숨도 쉬기 어려울 정도의 중량으로 나를 압도했다. 이 전까지는 텍스트로만 접해 왔던 것들이 손으로 쥘 수 있는 어떠한 실재가 되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낸 뒤에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의 소용돌이로 나를 이끌었다. 나는 단순히 밖으로 나가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가 껴안고 있는 크나큰 불행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또 희망의 얼굴을 한 많은 이들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그것이 강제적이라 할지라도 거의 매일 같이 나의 두 눈으로 다양한 삶의 현장을 보고, 듣고, 느꼈으며, 그것들이 나에게 직접 말을 걸어올 때에 그들을 거부하는 일이 없었다. 울면서 홀로 글을 쓰는 밤들이 있었고 희망으로 움트는 희미한 아침들이 있었다. 새로운 슬픔들이 나의 마음속에서 기지개를 켜고 어떠한 희망은 영원한 잠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
지금의 나는 자주 슬퍼하는 대신에 점점 더 뜨겁게 몸을 달구는 햇빛, 그 너무나도 분명하고 명징한 멸망의 징조 아래에서 머지않아 찾아올 죽음-바꿔 말하면 삶-에 대해서 생각한다. 어느 쪽이 좋았는지를 얘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난생처음 대규모 집회에 참여했던 것은 (수요 집회를 대규모라고 하기에는 어려웠으니까)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위한 촛불 집회였다. 사람들이 온통 거리에 꽉 차 있어 발 디딜 틈도 없었기에 LED촛불을 손에 쥐고 걸었던 기억이 난다. 몸을 부대끼며 인간이 만든 물결을, 아주 고통스러울 만큼 천천히 타고 전진했던 기억. 나는 그날을 몸들의 벽에 갇혔다는 감각으로 기억한다.
그다음 인상 깊었던 집회는 고등학교 2학년인가 3학년 때 참여했던 인천의 첫 퀴어 축제였다. 가히 인상적으로 현장은 처참했다. 카오스가 된 현장으로 인해 첫 개막은 아주 비참하게 끝이 났다. 그날의 어린 나는 성을 내고 고함을 지르는 몸들의 벽에 갇혀 있었다. 혐오자들이 끝없이 거리에 포진되어 달려드는 모습을 처음 마주한 나는 아연질색했다. 압사당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던 순간 누군가가 손을 뻗어 힘차게 나를 끌어내 주었다. 장내의 혼란이 도무지 수습되지 않아 부스는 전부 철회했고, 우리는 폴리스 라인 너머 벽에 붙어 서서 소란이 종결되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그렇게 방치된지 자그마치 3시간 정도가 흐르자 서럽게 우는 사람들이 생겨 났다. 빙 둘러앉아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다시 만난 세계를 들었다.
마지막은 계엄령 이후 윤석열 탄핵을 위한 광장 집회였다. 또다시 무수한 몸들에게 둘러 쌓여 도내를 행진했다. 어마어마한 인파는 추위를 달아나게 했다. 행진 도중 멈춰 서서 장군기의 기접 놀이를 구경했다. 그 커다란 깃발이 새의 날개처럼 유려하게 나의 머리 위를 쓸고 지나갔다. 손을 뻗어 생명체처럼 펄떡이는 그것의 꺼슬한 표면을 만져 보았다. 눈물이 났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라.' 박노해는 말한다. '그리고 그 빛에 둘러싸이라.'
어제는 심장이 뒤흔드는 경험을 하고 장시간 이동에 몸을 혹사시켰다. 오늘은 오후 늦게까지 잠을 자고, 주문한 도시락을 점심 저녁 반씩 나눠 먹은 뒤에 가까스로 일을 하고 공부를 했다(일부는 내가 생존에 관심 없어한다고 걱정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다. 오히려 나는 나의 안락함에 신물이 난다). 글을 쓰는 나는 이제, 무력함에 슬퍼하지 않는다. 이제는, 살기 위해서는 단지 더 알아야 함을 알 수 있고 그렇게 할 수도 있다. 내가 무엇을 기록하고자 하는지, 희미하게나마 빛나는 방향성을 붙잡았고 신뢰할 수 있는 동료들과 파트너도 찾았다.
글을 써서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은 내게 없다. 내 관심사는 오로지 글쓰기를 통해 어떻게든 이 삶을 유지, 보수시키는 데 있다. 나는 더 이상 나를 걱정하지 않는다(50대 이후의 삶을 상상하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이제는 어떤 것에 둘러 쌓여야 하는지 알고 있으니까.
이곳에 글을 쓰기 전에는 가장 최근에 쓴 시로 자주 일기를 마무리 짓고는 했었다. 귀여운 전통이니 기꺼이 전승하고자 한다.
슬픔이 있었다.
땅 속으로 걸어 들어간 주인이 왜 영영 돌아오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는 개처럼.
영문을 모르겠는 슬픔이 내게는 있었다.
슬픔에 몸을 웅크리면
둥그러진 내가 끝없이 아래로, 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럴 때면 나는
내게도 걸려 넘어질 돌부리가 있었으면 했지.
그것이 말해줬으면 했지.
삶은 쌓아 올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둥그런 우리는 그저
사람을 포개 삶을 살아낸다는 것을.
2025. 07.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