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섭리

내 가까이 있는 것들

by 쵸코 아빠

숲이 오래된 고목의 빈자리를 품으며 더 깊어지듯, 사람 사는 세상도 다르지 않다.


숲길을 걷다 보면 세월을 버티지 못하고 부러진 나무를 만날 때가 있다. 처음엔 안타깝다. 수십 년을 버텨온 생명이 허무하게 무너진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시간을 두고 바라보면, 그 자리에 빛이 스며들고, 빛을 받은 작은 새싹들이 하나둘 고개를 든다. 고목 하나가 쓰러지며 숲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다. 숲은 그렇게 유지된다.


사람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는 이 단순한 진리를 자주 잊는다. 변화는 늘 고통스럽고, 익숙한 자리를 내려놓는 일은 두렵다. 그래서 자신이 이미 ‘고목’이 되어가고 있음을 인정하지 못한 채, 조금 더 버티려고, 조금 더 붙잡으려고 애쓴다. 그 사이 세대의 갈등은 서로를 이해하려는 대화가 아니라, “내가 더 억울하다”를 증명하려는 싸움이 되어 버린다. 함께 살아야 할 공간은 점점 좁아지고, 마음은 점점 단단해진다.


기성세대는 말한다.

“우리가 이만큼 만들어 놓았다.”

청년세대는 대답한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남성과 여성의 대화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각자의 상처와 억울함을 쥔 채 상대를 설득하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설득이 아니라 ‘증명’을 하려 든다. 내 고통이 더 무겁다는 것, 내 경험이 더 진실이라는 것, 내 이야기가 더 정당하다는 것을. 그러다 보면 상대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대립의 대상이 된다. 목소리가 커질수록 언어는 날카로워지고, 결국 마음이 다친다.


그러나 자연은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그 변화 속에서만 생명은 숨을 쉰다”라고 말했다. 숲이 보여주는 장면도 같다. 고목이 쓰러진다고 숲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빈자리 덕분에 숲은 다시 살아난다. 오래된 둥치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빛이 스며들고, 그 빛은 새로운 생명을 부른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를 억지로 꺾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의 낡은 확신을 조용히 내려놓는 용기일지 모른다.


서로 같아지려 들지 않고,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함께 살아가는 숲. 숲이 아름다운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키 큰 나무와 낮은 관목이, 굵은 줄기와 가느다란 줄기가 제각각의 위치를 지키며 어울리기 때문이다. 모두가 정답일 수는 없고, 모두가 중심이 될 수도 없다. 그저 각자가 가진 빛을 조금씩 나누어 가지며, 숲은 온전한 생태를 갖춘다.


언젠가 우리 모두 고목이 될 것이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순환의 일부다. 그러나 순환을 받아들이는 일은 말처럼 쉽지 만은 않다. 나의 역할이 줄어드는 것이 두렵고, 익숙했던 영향력이 사라지는 것이 허전하다. 그래서 조금 더 버티고 싶고, 조금 더 움켜쥐고 싶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그 자리를 기꺼이 비워 줄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남겨 놓을 자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새로 돋아날 누군가를 위해서.


이 진리를 지키며 살기에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너무 치열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경쟁은 일상이 되고, 불안은 늘 곁에 있고, 약간만 느슨해져도 뒤처질 것 같은 공포가 우리를 붙잡는다. 그래서 더 이해받고 싶고, 더 인정받고 싶고, 더 증명하고 싶어진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고목처럼 굳어 간다.


그럼에도 잊지 말고 마음 한 곳에 남겨둬야 하는 말이 있다. 숲은 고목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새로운 싹이 함께 있어야 숲은 살 수 있다.


사람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다. 지금 당장은 각자 힘들고 버거워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울지라도, 언젠가는 이 진리를 떠올리기를 기대해 본다.


내가 조금 내려놓을 때 누군가 숨을 쉬기 시작하고, 내가 비켜 선 자리에 또 다른 생명이 자라난다는 것을.


이를 지키며 살기엔 너무 고단한 세상이지만, 그래도 그 진리가 이 사회의 숨이 다시 고르게 뛰도록 만든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