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진실을 말해주는 친구

내 곁의 작은 것들

by 쵸코 아빠

옳고 그름이 흐릿해지는 세상에서 진실을 말해주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돌아보게 된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식이지만, 결코 멀지 않다. 화면 속에선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붉은 불빛이 밤하늘을 가른다. 테헤란 공항이 불타고, 도시의 어둠은 폭발의 섬광으로 잠시 낮처럼 밝아진다.


누군가는 그것을 ‘작전’이라 부르고, 또 누군가는 ‘정당한 대응’이라 말하며, 다른 이는 ‘전쟁 범죄’라고 외친다. 이름이 무엇이든, 그 아래에서 무너지는 것은 언제나 같다. 집, 학교, 그리고 사람.


전쟁은 언제나 명분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언제나 침묵으로 유지된다. 말하지 않는 동의, 묻지 않는 지지, 그리고 외면으로 이어지는 연대.


세상은 움직이고 있다. 강한 나라들은 서로에게 계산된 말을 던지고, 약한 나라는 그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다. ‘동맹’, ‘우방’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따뜻하게 들리지만, 그 안에서 오가는 말들은 점점 단단해지고 있다. 이 전쟁이 옳은가, 이 선택이 반드시 필요한가, 그 질문은 점점 작아지고, 함께하는 말만 커져간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또 다른 얼굴을 떠올려 본다. 이사를 고민하던 아내의 친구였다. 더 넓은 집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집은 어딘가 불안했다. 실버센터로 시작했다가 방향을 잃은 건물, 부도 이후 겨우 버티고 있는 구조, 그리고 아무것도 보장받지 못하는 전세보증금. 위험은 조용히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희망은 더 크게 말을 하고 있었다.


아내는 그 친구를 붙잡았다. 괜찮은 선택이 아니라고, 조금만 더 알아보자고, 지금은 멈추는 게 맞다고. 그러나 그런 말은 늘 늦게 도착한다. 이미 마음이 기울어진 사람에게 진실은 종종 불편한 소음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이상하게도 이번 전쟁 상황과 비교한다. 왜 사람은 이미 결정한 길 앞에서는 아무 말도 듣지 않으려 할까. 왜 가까울수록 더 조심스럽게 말하게 될까. 그리고 왜 우리는 결정적인 순간에 침묵을 선택할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래전에 말했다.

“진정한 우정은 서로의 덕을 북돋우며, 서로의 잘못을 고쳐주는 것이다.”라고.


그 말은 단순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누군가를 위해 말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잃을 수도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좋은 사람이 되기를 선택한다. 불편한 말을 하지 않는 사람, 관계를 해치지 않는 사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


그러나 그런 선택들이 쌓이면 세상은 조금씩 잘못된 방향으로 기울어진다. 전쟁도 어쩌면 그런 식으로 시작되는 게 아닐까. 말했어야 할 순간에 말하지 않았던 한 사람, 멈췄어야 할 선택을 그냥 둔 또 한 사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수많은 사람들.


성경은 말한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부딪힘이 없다면 날카로움도 없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서로를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 말을 아끼지만, 어쩌면 그 침묵이 더 큰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아내는 끝내 친구를 설득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 선택은 결국 그 친구의 몫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 말은 남는다. 누군가 나를 붙잡았다는 기억, 누군가 진실을 말해주었다는 사실, 그 말이 언젠가 늦게라도 다시 떠오를 가능성.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식은 여전히 어둡고,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거대한 힘이 아니라, 어쩌면 한 사람의 말일지도 모른다고. 불편하지만 필요한 말, 지금은 거절당할지라도 결국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말.

그것이 친구의 말이고, 우리가 포기하지 말아야 할 말이다.

전쟁의 밤이 길어질수록, 나는 더욱 믿게 된다. 세상을 지탱하는 것은 침묵이 아니라, 말해야 할 때 말하는 사람들임을. 그 사람이 진정한 친구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