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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태 May 18. 2022

어른들은 비판하지 않는다

내가 비판하기를 그만두게 된 결정적인 이유.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헤아림으로 너희가 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태복음 7:1-2

 1863년. 미국에서 한창 남북전쟁을 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념과 여러 가지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시작된 이 전쟁은 2년째 해결될 기미가 안 보였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포토맥 지구의 전투 사령관을 역임하고 있었는데, 그는 어떤 장군을 임명하더라도 매번 패배를 거듭하는 어려운 상황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7월 1일에 게티즈버그 전투가 시작되었다. 남부군의 ‘로버트 에드워드 리’ 장군은 그 지역에서의 극심한 폭풍우를 보고는 남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패배를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앞두고, 패잔병들을 이끌고 포토맥강에 도착했다. 뒤에서는 ‘조지 미드’ 장군이 이끄는 북부군 포위망을 좁히며 오고 있었고, 폭풍우 때문에 앞에 있는 강물은 불어나서 건널 수가 없었다.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게 되었다.


링컨은 승리를 예감하고 있었다. 그는 미드 장군에게 어서 남부군의 괴멸을 지시하였다. 링컨은 이 명령을 전문으로 보냈고, 특사까지 파견하였다.

하지만 미드 장군은 링컨의 명령을 어기고 리 장군과 남부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전투를 할 수 없다는 전문으로 답을 하며 시간을 지체할 뿐이었다. 그 사이에 불었던 강물은 줄었고, 리 장군과 그의 부대는 강을 무사히 건너 도망갈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링컨이었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이 소식을 보고 받은 링컨은 아마 분노하였을 것이다. 그는 미드 장군에게 하나의 편지를 적었다.

그리고 그 편지에는 미드 장군에 대한 분노가 드러난다.


미드 장군에게,

당신의 게티즈버그에서의 공헌에 저는 매우-매우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그저 당신에 대한 아쉬움을 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유감스럽기만 합니다.
저는 지금 제가 느끼는  감정들을 억누르기 힘듭니다.

(중략)

미드 장군 당신에게는 2만여 군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군은 바로 앞에 있었습니다.  전쟁을 끝낼 수도 있었단 말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시간을 지체하는 동안, 불었던 강물은 줄어들고 남부군은 도망갔습니다. 승리가 다 주어진 상황에서도 당신은 결과를 내지 못했으니, 아마   건너편에서도 내지 못하리라 봅니다.

우리는  긴 전쟁을 끝낼 기회를 놓쳤고, 인해 제 느끼는 상심이 얼마나 격심  지에 대해 미드 장군은 모를 겁니다.

이 당시 말 한마디를 할 때마다 신중을 가했던 링컨조차도 끌어 오르는 분노를 주체하기 힘들었단 모양이다. 미드 장군에 대한 그의 실망감이 편지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하지만, 미드 장군은 끝내 이 편지를 읽지 못했다. 이 편지는 발송되지 않은 채, 사인조차도 되지 않은 채 그대로 링컨의 서류함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미드 장군은 엄연히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였고, 그의 판단 때문에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순간을 놓쳐 그로부터 전쟁이 2년은 더 진행되는 결과를 낳았다. 비난받기에 충분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링컨은 끝내 그를 비난하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링컨이 일리노이주 스프링드에서 변호사로 일을 하고 있었을 때, 그는 신문에 종종 누군가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기고문을 올리곤 했는데 이게 가끔은 도가 지나칠 정도였다. 그러던 1842년 어느 날, 링컨은 ‘제임스 쉴즈’라는 한 정치인을 비난하는 기고문을 올렸고 이에 분개한 쉴즈는 신문에 기고된 자기를 비난하는 글을 보고 링컨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그 둘이 미시시피 강변에서 서로에게 장검을 겨누고 결투를 시작하려는 순간, 쌍방 입회인이 나타나 온몸으로 이 둘을 말렸다. 이 사건이 링컨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는 그만이 알겠지만, 분명한 것은 비판하기를 일삼았던 링컨은 이 사건 이후로 누군가를 비판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링컨 대통령처럼 뛰어난 언변력도 없거니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이 있는 것 또한 아니다. 하지만 링컨의 과거 모습 중에서 딱 하나, 과거의 나와 꽤 닮은 구석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비판하기를 잘했다. 그리고 또 좋아했다. 이것이 잘못되고, 누군가가 잘못되고… 꽤 그럴듯한 논리적인 이유를 거론해가며 은근히 사람들에게 나처럼 ‘깨어있기’를 호소하곤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았는데, 단지 ‘할 말은 한다’라는 게 그들에게는 멋있는 걸로 비쳤기 때문이다. 나는 그 얄팍한 지지에 힘입어 비판하기를 멈추지 못했다.

지금 와서 돌아봤을 때, 그 지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느낀다. 나는 이 습관으로 인해 관계들이 여러 번 틀어지고, 사람들에게 호의를 사는 것이 어려워졌다. 물론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다.


그게 두렵다고 해야  말을 아끼는  오히려 비겁하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고, 이 생각 자체 역시 침묵을 지키려는 이들을 향한 비판이 전제되어있다. 나는 내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자 비판을 멈춘 것은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조금씩 나의 ‘소신’ 있는 모습과 나의 진짜 모습에서 모순을 느끼기 시작했다. 주변에서도 나를 비판하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람은 누구나 비판받을 모습들이 있다. 어떠한 사회나 시스템에는 병폐가 존재한다. 함부로 비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비판은, 그 대상을 깊게 분석하고 공부하며 나를 돌아볼 수 있는 눈을 가릴 뿐이다. 나 역시 비판에 눈이 멀어 가장 중요한 나를 놓쳤다.

나는 이 사실을 깨닫고 침묵을 지키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자라며 봐왔던 성숙한 어른들은 비판해야 할 상황에서 오히려 침묵했다. 그들은 묵묵히 지켜보기만 한다. 목소리를 내서 갈채를 받으려기보다는 분석하고 공부했다. 그리고 행동으로 자신의 생각을 대변했다. 어른들은 비판할 말들과 방법들을 고민할 시간에 자기 할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들에게는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 자체가 시간낭비였다.


요즘 들어 SNS를 통해 매일 자신과 누군가를 비교해가며 비판하는 게시글을 올리는 경우를 주변에서 종종 보게 된다. 그들의 주장이 크게 잘못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비판에서는 대개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를 그만둔 흔적들이 보이곤 한다.


소신을 명분으로 비판하던 모습은 어렸던 나에게 가장 멋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침묵하더라도 소신을 지킬 수 있음을 안다. 말로 비판하는 어른 치고 멋있는 어른은 없다. 나는 침묵으로 소신을 지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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