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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저 Apr 15. 2023

[동백꽃 필 무렵] 다정하게 강한 사람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리뷰


취향을 타지 않는,


조금 사적인 이야기지만 내가 ‘저건 꼭 봐야지!’ 결심하는 작품의 특징 중 하나가 있다. 바로 부모님 두 분이 다 재밌다고 평하는 작품이다. 두 분은 극명하게 갈리는 취향을 갖고 있기 때문인데, 그런 두 분이 모두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건 꼭 봐야 해!’라고 말한 작품이 바로 <동백꽃 필 무렵>이다.

‘잘 만든 이야기는 좀체 취향을 타지 않는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재밌네...’ 일수도 있고, ‘내 취향이 아닌데도 재밌다!!’ 일 수도 있다. 어떤 식으로든 잘 만든 이야기는 호불호를 허물어버린다.

그런데 <동백꽃 필 무렵>은 내 취향이기까지 했다.

이 이야기는 다정하게 강한 사람들의 이야기니까.       


   

주인공인 동백이는,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가상의 마을 ‘옹산’. 그중에서도 여기 ‘게장 골목’은 여자들이 주름잡고 있다. 게장 골목 곳곳의 사장은 아내들이고, 남편들은 모두 사원이다. 그것도 퇴근이 없는 사원. 이렇게 여자들이 휘어잡은 게장 골목 끝자락에 미혼모이자 술집 주인인 주인공 ‘동백’이 이사 온다. 얼마 버티지 못할 거라는 이웃들의 예상을 깨고, 성행하는 동백의 가게 ‘까멜리아’. 퇴근 없는 남편들이 아내의 눈을 피해 술을 마실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사정에는 관심 없는, 드세고 기 센 게장 골목의 ‘언니들’은 안 그래도 아니꼬운 동백이 손님들까지 빼앗는다며 왕따 시킨다. 그리고 고아라는 이유로 평생 왕따 당해 온 동백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늘 그래왔듯 쭈구리로 지낸다.


하지만 마냥 쭈굴한 인물이 주인공일 리가 없다. 동백이의 매력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빛을 발한다. 동백이는 이기려 들지 않을 뿐 절대 지지는 않는다.     


동백
저요, 안 부끄러워요. (...) 우리 필구한테 저 하나도 안 부끄러워요. 가난한 엄마고 아빠 없이 키워서 뭐, 미안한 엄마긴 하지만... 부끄러운 엄마는 아니에요. 저 그런 짓 한 거는 하나도 없어요.

<동백꽃 필 무렵> 1화 중     


‘최소한 자식한테 부끄럽지는 않아야 되는 거 아니냐’는 물음에 동백이는 이렇게 말한다. 시종일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리면서도 그렇게 말한다. 세상 자신 없는 태도로 지지 않고서.      


동백이의 이런 태도는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진상 손님이자 건물주인 노규태에게도 변함없이 적용된다.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한 규태는 여느 때처럼 열등감을 터트리며 ‘너 나 무시하지?’ 묻더니 술을 한잔 따라 동백이에게 건넨다. 그걸 원샷하면 내년까지 월세를 동결해 주겠다는 것이다. 위력에 의한 불편한 상황이지만, 동백이는 묻지도 따지지 않고 그걸 받아 마신다. 그녀는 취한 규태 따위보다 생이 더 힘겹다는 걸 아는 사람이니까. 월세 동결이라는 약속을 지키라며 소심한 목소리로 엄포를 둔 동백이는, 역시 소심한 목소리로 이렇게 덧붙인다.     


동백
근데요 사장님, 골뱅이 만오천 원, 그리고 여기 두루치기 만이천 원, 여기 뿔소라가 팔천 원. 이 안에 제 손목 값이랑 웃음 값은 없는 거예요. (...) 저는 술만 팔아요. 그러니까 여기서 살 수 있는 건, 딱 술. 술뿐이에요.

<동백꽃 필 무렵> 1-2화 중     


사실 동백이 주인공인 이유는 ‘지지 않아서’가 아니다. 동백이가 주인공인 이유는 그녀를 통해 ‘이런 사람’이 지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동백
사람들은 사는 게 징글징글할 때 술 마시러 오잖아요. 그니까 나는 웬만하면은... 사람들한테 다정하고 싶어요. 다정은 공짠데... 서로 좀 친절해도 되잖아요.

<동백꽃 필 무렵> 3-4화 중     


동백이는 이런 사람이다.

모두가 자기를 홀대하는 삶을 살아왔으면서도 아무도 홀대하려 하지 않으려는 사람.

자기를 징글징글하게 대하는 사람들에게도 웬만하면 다정하고 친절하려고 애쓰는 사람.

이런 식으로 온순하고 소심하게 강한 동백이의 옆에, 그녀의 편이 될 든든한 짝꿍이 등장한다.        

  


그런 주인공 주변에는,


황용식이는 백마 탄 왕자님이 아니다. 왕자님이라기에는 너무... 멋이 없다.


용식의 사전에는 맛보기도 떠보기도 간 보기도 없다. 하는 말마다 직구를 넘어 투포환 같다. 그런 용식이 여러모로 부담스러운 동백은 용식이 공식적으로 고백하기도 전에 미리 차버린다. 그런 동백의 반응에 충격받은 용식, 최후의 발언으로 이렇게 말하고 떠난다.   

  

황용식
동백 씨! 그 쩌기.. 그 개도요, 쩰로 귀여운 거는 똥개예요. 원래 봄볕에 얼굴 타고 가랑비에 감기 걸리는 거라고요, 나중에 나 좋다고 쫓아 댕기지나 마요.

<동백꽃 필 무렵> 5-6화 중     


스스로를 귀여운 똥개라 칭하는 이 멋없는 ‘촌놈’ 용식이는 멋있어서 동백이 옆의 주인공이 된 게 아니다. 평생 편 들어주는 사람 없이, 칭찬해 주는 사람 없이 살아온 동백이는 자신의 강함을 모른다. 그리고 동백이가 평생을 모르고 지내온 그녀의 강인함을 한눈에 알아본 용식은 필터도 없이 그걸 늘 동백에게 말해준다.   


황용식
고아에, 미혼모가 필구를 혼자서 저렇게 잘 키우고, 자영업 사장님까지 됐어요. 남 탓 안 하고요, 치사하게 안 살고, 그 와중에 남보다도 더 착하구, 더 착실하게 그렇게 살아내는 거. 고거 다들 우러러보고 박수쳐 줘야 되는 거 아니냐고요.

동백
(태어나서 처음으로, 칭찬을 받았다.)

황용식
남들 같았으면요, 진작에 나자빠졌어요. 근데 누가 너를 욕해요. 동백 씨, 이 동네에서요, 젤로 세고요, 젤로 강하고 젤로 훌륭하고 젤로 장해요.

<동백꽃 필 무렵> 7-8화 중   


이 이야기가 단순히 ‘동백이와 용식이가 서로에게 반해 사랑하게 되고, 그래서 함께 살아가게 되는 이야기’였다면 이렇게 재밌지 않았을 것이다. 이 둘의 관계를 멋지게 완성시키는 건, 용식이의 진심이 동백이를 성장시키기 때문이다. 용식은 누구보다 멋진 이 여자가 왜 자기 자신의 멋진 점을 몰라주는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그래서 매일같이 쫓아다니면서 알려준다.      

       

황용식
동백 씨, 그 시라소니가요, 김두환보다 쌈은 잘했는디, 이 똘마니가 없어서 못 떴다는 썰이 있어유. 이 동백 씨는 그 시라소니 과라서유, 그 혼자서도 완전 쎄셨지만유, 이제는 뒤에 한 놈이 더 있어요. 동백 씨가 어디서든 주춤거리시면은, 저 이 황용식이가 바로 튀어 오니께요 동백 씨는 주먹 피고요, 어깨 피고! 이제 같이 걸어요 우리.

<동백꽃 필 무렵> 15-16화 중     


그리고 이런 든든한 똘마니(?)를 얻은 동백 씨는 각성한다. 각성한 동백이 500cc 맥주잔으로 악당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장면을 본 용식은 이렇게 말한다.      


황용식
동백 씨는 내가 지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 동백이는 동백이가 지키는 거다.

<동백꽃 필 무렵> 39-40화 중     


용식이는 이런 사람이다.

본인도 모르는 장점을 알아보고는 빼지 않고 매일같이 그걸 말로 전하는 사람.

그렇게 진심으로 누군가의 편이 되어주는 사람.

그래서 용식이는 ‘사람이 사람에게 기적이 되어줄 수 있을까?’ 묻던 동백이의 기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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