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성 - ..안 되나요...(화양연화)
0. Prologue
첫사랑은 영영 잊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게 짝사랑뿐은 아닐 것이다. 모든 지나간 사랑은 사람의 마음에 방 한 칸씩을 두고 있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 있다. 나는 이 말이 더욱 마음에 와닿는다. 이제는 많은 시간이 지나 기억에서 흐려진 첫사랑. 당시의 나는 홀로 많이 아파했고 오랜 시간을 그리워했었다. 어린 마음이라 '사랑이 아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랬다면 아프지 않았을 것 같다.
시간이 흘러 계절이 여러 차례 바뀐 뒤에야 비로소 아픔이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알았던 그 시절 나의 아픈 사랑 이야기. 시간이 많이 지난 뒤 전하지 못했던 말을 전하고 싶었다. 그때의 내가 참으로 못나서 너를 아프게 했었음에 미안했다고 그리고 부디 행복하게 잘 살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유난히 짝사랑을 계속하게 될 줄은 몰랐던 나의 첫사랑. 짝사랑. 조심스럽게 스무 살의 그때로 돌아가본다.
조관우 - '겨울이야기' 중
나는 아직도 너를 잊지 못하고
지금도 이 길을 나 홀로 걷고 있는데
너는 지금 그 어딘가에서
내가 아닌 누군가를 사랑.. 사랑하고 있을까요
1. 갑자기 시작한 재수
고등학생 시절 공부와 담을 쌓고 지냈던 난 뜬금없는 재수의 길을 선택했다. 고3 때 친하게 지냈던 반장의 설득이 있었고 어머니도 대학교 1학년보다 재수 경험이 삶에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해주셨다. 그렇게 합격했던 대학교에 입학을 철회하고 재수학원을 알아보게 되었다. 마침 그해 우리 지역에 명문 재수학원이 생겼는데 수강생 미달로 입학시험 없이 학원을 들어가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재수학원 생활은 나와 참 맞지 않았다. 학원의 지루하고 빡빡한 통제는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쉬는 시간 복도에서 잡담 금지, 핸드폰을 포함한 전자기기 사용 금지 등의 학원 규칙이 있었다. 그 외에도 사감 선생님들은 자습시간에도 졸거나 떠드는 것을 감시했는데 이 때문에 재수생활을 선택한 것이 자주 후회됐다.
그나마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서로 알고 있는 친구들과 집으로 가는 시간만큼은 마음껏 웃고 떠들며 이야기할 수 있었기에 그 시간만이 나의 유일한 숨구멍처럼 느껴졌다. 다른 친구들은 명확한 목표가 있었고 자신의 꿈에 대한 어렴풋한 밑그림을 갖고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당시 내게는 어떠한 목표도 꿈도 없었기에 이도저도 아닌 시간을 보내며 이 생활의 끝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것 같다.
2. 연애금지, 지키는 사람이 없더라
학원의 입학 설명에서 여러 가지 학원 규칙을 이야기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던 것은 '연애금지'였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 날씨가 따뜻해져 가고 길에 봄꽃이 펴고 학원의 통제도 느슨해지자 학원에서 자주 어울려 다니는 남녀가 보였다. 남자들끼리 모이면 어디 반에 누가 예쁘다는 둥의 가십이 자연스럽게 들려오는 시기였다.
나도 이 계절이었던 것 같다. 학원 셔틀버스가 이 시기에 운행을 시작했는데 거기서 그 친구를 만났다. 나와 초등학교 중학교를 함께 나왔고 같은 반이었던 적도 있던 친구. 특별히 친하게 지냈던 사이라거나 함께 추억을 공유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얼굴만 알고 있는 사이에 가까웠다. 다만 어릴 때 참 마른 편이구나라고 생각했던 아이가 살이 쪄서 동글동글한 인상이 되었다는 점이 조금 달랐다.
그 친구와 난 셔틀버스에서 급속도로 친해졌다. 학원에서 하루 종일 답답했던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친구들이 있었던 시간. 그 순간만큼은 잠시 괴로움을 잊고 행복을 찾은 것 같았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서로가 어떻게 고등학교를 다녔는지 왜 재수를 선택하게 되었는지부터 본인이 어쩌다 이렇게 살이 찌게 되었는지 많은 이야기를 셔틀에서 나누며 조금씩 내 마음은 이끌리고 있었다.
3. 마왕의 세계사
그 친구와 수업을 듣는 시간이 일주일에 딱 한번 있었는데 바로 세계사였다. 다른 인기 과목들은 3~40명이 넘는 수강생들이 수업을 듣는 반면 세계사는 10명 남짓. 소수정예라는 말이 어울렸다. 내가 수능을 치던 당시 사회문화 과목이 3~40만 명 정도 응시했다면 세계사는 3만 명 정도 인원이 응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 보니 수업도 소수정예반이 만들어졌던 것이었다.
우리를 가르쳐주시던 강사님은 유명하고 독특하신 분이었다. 남자분이셨는데 어울리지 않는 긴 머리를 묶고 다니시는 것부터 수업 중 시험과 관련 없는 많은 썰을 들려주기도 하셨다. 세계사를 수업하던 중 갑자기 꽂히면 국사, 세계지리, 윤리와 사상 등 과목을 넘나들며 강의를 하는 스타일이셨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충격의 인물이었다. 강의를 잘해서 수업시간이 재밌기도 했지만 그 친구와 함께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아주 맘에 들었다.
세계사 강의 마지막 날 강사님은 우리의 소수정예반이 너무 좋았다고 우리의 연락처를 모두 받아가셨다. 수능이 끝난 뒤 세계사 반은 한번 모이자고 이야기하셨지만 결국 우리는 모이지 못했다. 우리와 강사님의 연락처를 알고 있던 한 학생이 날짜를 잡아보겠다고 했지만 이후 더 이상의 연락은 오지 않았다. 잠시였지만 난 그 아이와 손을 잡고 가는 상상도 했었던 것 같다.
이 글을 쓰며 강사님 이름을 검색해 보니 인터넷 강의에서 머리를 단정하게 자르고 학생들에게 존댓말로 친절하게 강의를 하고 계신 모습을 보며 우리 수업때와 다른 온도차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4. 너에게 조용히 물들어있더라
집에 가는 셔틀에서 이야기를 마치지 못한 우리는 종종 함께 내려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하루는 내가 고등학생 때 보던 일본 애니메이션이 그 친구와 겹치는 관심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 친구 집 앞에서 한참을 이야기하던 중 그 친구의 부모님께서 늦었으니 빨리 들어오라고 전화를 하신 적이 있었다. 알고 보니 집 앞이라 목소리가 들려서 전화로 들어오라고 하셨다고 했다. 이후 그 친구와 나는 동네 공원에서 떠들다가 들어가는 일이 많아졌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 여름이 되었을 때 우리는 넷이 되어 있었다. 공부를 정말 잘했던 나의 친구들 셋, 내 친구들은 학원에서 가장 높은 성적의 반에 있었고, 목표도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들이었다. 나와 이 친구들의 거리감을 체감했던 것은 9월 모의고사가 끝날 즈음이었다. 내 현실은 생각보다 더 나빴다. 내년이 되면 이 친구들은 가까이서 볼 수 없을 것이다. 사실 그 친구와 가까운 곳으로 갈 수 없다는 조바심이 더 컸다.
나도 모르게 내 하소연을 그 친구에게 자꾸 털어놓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둘이 있는 모습이 나의 다른 친구들에게도 자주 보였는지 친구들은 내게 "너 그 친구 좋아하는 거 아니지?"라고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때는 "아니야 친해서 그래"라고 답하고 말았다. 나 역시 그 친구에게 하소연을 했던 것은 내가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라 위로의 말도 조곤조곤 답해주는 너의 말이 조금이라도 더 듣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5. 아팠던 너, 아파진 나
내게 스며든 너와의 대화와 잠들기 전 너와의 문자메시지는 내게 희망을 갖게 만들었다. 어느새 나의 목표는 그 친구와 같은 지역 대학에 진학해 계속 친구로 지낼 수 있길 바라는 것이 목표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스스로 공부를 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하지만 내 맘속에 위기감과 불안한 마음도 그만큼 커지고 있었다. 어렴풋이 내가 더 이상 쫓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그 친구는 갑자기 어울리지 않는 화장을 하고 나타났다. 우리는 놀라서 그 친구에게 화장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우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날 저녁 그 친구는 내게 잘하지 않던 하소연을 했다. 너무 급격하게 살이 찐 자신의 모습이 너무 못나 보인다며 이러다 영영 살이 빠지지 않는 게 아닌지 걱정된다고 했다. 난 지금도 괜찮은 모습이고 살이 빠지면 더 예뻐질 거니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했다. 내 여드름 많고 왜소한 외모를 보라며 말해주니 그 친구도 내게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서로를 위로했다.
며칠이 더 지난 뒤 수능이 약 한 달 정도 남아있던 시기 갑자기 그 친구가 학원을 나오지 않았다. 연락해 보니 심한 감기에 걸려 일주일 정도 학원을 못 나갈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길게 느껴졌던 일주일의 시간이 지나간 뒤 친구는 눈이 퉁퉁 부어있는 상태로 학원에 나왔다. 난 알아보지 못했고 주변 친구들이 '그 친구 많이 울었나 봐, 눈이 퉁퉁 부었어. 무슨 일 있데?' 라며 내게 물었다.
그날 셔틀에서 내렸을 때 그 친구는 "나 울어서 눈 부운 거 티 많이나?"라고 먼저 이야기를 꺼냈고
"아니 난 네가 말해서 알았어"라고 답했다. 그날 친구는 웃으며 내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말했다.
휘성 - '전할 수 없는 이야기' 중
나 너를 사랑하나 봐
아주 오래전부터 이 말 전해주고 싶었어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오늘도 네 주위를
하루 종일 맴돌고 있어
재연재 시작합니다. 금요일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