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의 당돌한 거짓말과 지엄한 명령
19년 전까지 제 새해 목표는 언제나 '금연'이었습니다.
매년 1월 1일이면 비장하게 담배와 라이터를 쓰레기통에 던졌지만, 며칠 뒤면 슬그머니 슈퍼마켓 매대를 서성이는 '작심삼일'의 전형이었죠. 그러던 제 인생에 거대한 전환점이 찾아온 건,
다름 아닌 딸아이의 당돌한 거짓말 때문이었습니다.
어린이집 금연교육 시간, 담당 교사가
"부모님이 담배 안 피우시는 사람 손들어보세요"라고 묻자,
딸아이는 덜컥 손을 들었답니다. 담배 피우는 아빠를 둔 아이라는 시선이 싫었던 그 나이대 아이의 순수하고도 무거운 마음이었겠지요.
그날 퇴근 후, 딸아이는 제 옷자락을 잡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아빠, 내가 오늘 어린이집에서 거짓말했단 말이야. 나 거짓말쟁이 만들기 싫으면 이제 담배 피우지 마!"
딸아이는 제 어머니조차 차마 하지 못하는 '명령조'를 구사하는, 내 인생 단 두 명의 여인 중 한 명입니다. 지엄한 명령을 어길 재간이 있나요. 그렇게 제 인생의 진짜 금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단절'이 아닌 '지연'의 미학: 나만의 금연법
이전의 금연이 '도구의 차단'이었다면, 이번에는 전략을 바꿨습니다. 이름하여 '욕구 미루기'. 저는 뜯지 않은 담배와 라이터를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가장 흡연 욕구가 심한 식후, 저는 담배를 꺼내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습니다.
"음, 조금 있다가 피워야지."
그리고 다시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 폭발하는 욕구 앞에서도 저는 자신을 속였습니다.
"내일 아침에 눈 뜨자마자 피우자."
'안 피우겠다'라는 강박 대신 '이따가 피울 것'이라는 자기 암시로 욕구를 미뤘더니, 신기하게도 흡연의 욕구가 줄어들었습니다. 그렇게 수개월이 지나자 주머니 속 담배는 그저 거추장스러운 물건이 되었습니다.
담배와 라이터를 주머니에서 영영 비워냈을 때, 저는 그 빈 주머니에 다른 것을 채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나의 행복 주머니는 아주 작습니다
담배가 사라진 주머니에는 담뱃재와 냄새, 가래와 침이라는 '흡연 4종 세트' 대신 자부심이 채워졌습니다. 금연의 성공은 제가 무언가 새로운 것에 도전할 때 갖는 불안과 두려움에 맞서는 든든한 맷집이 되어주었죠.
이제 저는 그 주머니에 '행복'을 채우려 노력합니다. 누군가는 번지르르한 헛된 말이라 할지 모르지만, 저는 지금 진심으로 행복합니다. 제 행복 주머니는 남들과 비교하면 어림도 없이 작습니다.
얼마나 작냐고요?
금요일 저녁, "또 통닭이야?"라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여인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물컵 가득 소주를 채우고 식탁에 앉을 때. 그 무서운 여인보다 배는 더 무서운 딸아이가 웃는 얼굴로 "앗싸, 통닭!" 하며 닭다리를 집어 들 때. 이제는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말년 병장 아들의 스피커폰 너머 목소리를 들으며 취기로 얼굴이 발그레해지는 순간.
제 행복 주머니는 고작 그 정도로 가득 찹니다.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일상이지만, 이 소소한 것들에 감사할 줄 아는 저 자신이 참 좋습니다.
담배 냄새가 빠진 제 주머니에는 이제 고소한 통닭 냄새와 가족의 웃음소리가 가득합니다. 19년 전, 딸아이의 거짓말이 선물해 준 이 작은 행복 주머니를 저는 앞으로도 소중히 채워나갈 생각입니다.
삶은 아직 완성이 아니라, 이 작은 행복들을 담아가는 '현재 진행형(ing)'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