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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플라 Mar 31. 2024

내가 듣고 싶은 말?

몽테뉴의 수상록 좋은 글귀

 '내가 듣고 싶은 말은?'이라는 주제로 나는 어떤 말에 목이 마른가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고백하자면 나는 무조건 칭찬, 닥치고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편이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되도록 달콤하고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친절한 말들이다. 


'좋아한다', '잘했다', '사랑한다', '멋지다', '그만하면 됐다' 등등 이런 말은 언제 들어도 좋고, 듣고도 또 듣고 계속 듣고 싶다. 이런 달달한 말들이 내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어 준다. 이런 말을 들으면 용기가 생겨서 세상 밖으로 나가 날개를 있는 힘껏 펼치고 하늘 높이 날아오를 것처럼 들뜬 기분이다.  



"우리는 일찍부터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죽음 이외에 그보다 더 자주 생각해 보는 일이 없도록 하자. 

어느 시각에나 이 죽음을 모든 모습으로 머릿속에 그려보자. 


발을 헛디딜 때, 기왓장이 떨어질 때, 바늘에 조금이라도 질렸을 때, 

바로 '그래, 이것이 죽음이라며?"하고 

되새겨보고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긴장하자.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연회 때 그들의 진수성찬 앞에 

사자의 메마른 뼈대를 가져오게 하여 

연회에 참석한 자들에게 경고로 삼게 하는 것이다. "



그런데 이승연 작가의 '살고 싶어 몽테뉴를 또 읽었습니다.'를 읽다가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죽음을 대비하라."라는 문장이 내 뒤통수를 쳤다. 누군가가 나에게 "죽음을 준비하라"라고 말한다면 처음에는 무척 놀라고 당황할 것이고, 내게 악담을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죽음'은 공포를 동반하는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이가 먹어갈수록 가까워지지만 거꾸로 멀어지고 싶은 주제인 죽음을 대비하라니.


몽테뉴는 낙마사고로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 매우 심각한 부상을 입은 경험이 있다고 한다. 다행히 목숨이 위태로운 시간을 무사히 넘겼고, 그 후에 죽음을 바라보는 생각이 점차 변했다고 한다. 낙마사고 발생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만큼의 큰 변화였다. 죽을 고비를 덕분에 나머지 삶이 새로운 탄생으로 재인식하게 된 것이다. 불운의 사고를 계기로 그는 두 번째 인생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로지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신비로움과 감사로 충만해졌다고 한다. 몽테뉴는 이 사고를 계기로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해방되었고, 삶을 과거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무려 20년 동안 자기 삶의 크고 작은 순간을 철저히 기록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에세', '수상록'이다. 그가 기록이 지금의 에세이라는 문학의 한 장르가 되었다고 한다. 


작년 여름에 계단에서 구른 적이 있다. 아파트 현관을 바로 코 앞에 두고 복도 계단 꼭대기에서 잠시 정신이 아찔했는데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계단아래로 허우적대며 떨어지고 있고 바닥에 누워있었다. 다행히 몸을 일으킬 수 있어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마에서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렸다. 그 외에 크게 부딪쳐서 아픈 곳이 없어서 집으로 들어갔다. 가족과 큰 병원 응급실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이상이 없었다. 


계단에서 떨어질 때 몽테뉴의 말처럼  '이것이 죽음이다.'라고 떠올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사고로 무척 놀랐고 치료를 받으러 갈 때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내 나이 또래에게 낙마사고가 많이 발생한다고 한다. 운이 좋지 않았다면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사고였다. 하지만 계단을 구르고도 그 정도의 부상이라서 너무 다행이었고 운이 정말 좋았다. 남편도 안도하며 말년에 내 운이 좋다고 말했다. 


 "우리는 죽음의 근심으로 삶을 방해하고, 삶에 대한 걱정으로 죽음을 방해한다. 하나는 우리에게 고난을 주고, 또 하나는 공포를 준다. "

'살고 싶어서 몽테뉴를 또 읽었습니다', 중에서 29쪽


이제 120세 시대라고 한다. 수명이 길어져서 마냥 좋은 것만도 아니다. 삶이 생각보다 긴 시간 이어진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삶과 죽음에 다리 하나씩 올려놓고 사는 기분이 들 수 있다. 건강하게 살지만 정신이 반은 혼수상태이거나 반대로 질병으로 마음대로 활동하지 못하는 상태로 지내며 긴 수명을 이어갈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삶과 죽음을 함께 탐구하는 태도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말인지도 모른다. 살아있는 시간을 더 신기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하고 사는 동안 더 가치 있는 일 선택하기를 좋아하며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죽을 수 없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삶은 끝나기 때문에 우리의 삶과 죽음은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살며 "죽음을 생각하며 죽음을 대비함으로써 더 건강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 죽음 앞에 기죽지 말고 삶을 정면으로 대하게 되는 거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자주 들어야 할 말은 달달한 칭찬보다 '죽음을 준비하라'라는 말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죽음'은 이 말이 주는 공포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피하는 단어다. 더 이상 세상에 내가 없고 좋은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없는 것은 생각만 해도 무섭다. 


"내일 주피터가 검은 구름으로 하늘을 가리건 밝은 햇빛을 남겨주건 상관있나 나는 살아 보았다." 하고 날마다 말할 수 있는 자신이 주인이며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자이다. 현재에 만족하는 정신은 미래의 일로 번민하기를 꺼리리라."(호라티우스)


죽음에 압도되지 않고 삶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의 일상이 어떻게 달라질까? 몽테뉴의 말을 거듭해서 생각해 보았다. 단 한 시간을 살더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삶의 주인으로서 나 자신을 위해 살라는 것이 아닐까? 죽음이 언제 올지 알 수 없으므로 현재 삶을 선물처럼 감사하게 현재에 만족하라는 의미인 것 같다.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하다거나 날이 흐려 우울하다며 불편하며 시간을 보내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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