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 문제가 인문학 공부에 좋다는 뜬금없는 이야기

by 고양이의 영토

옛날 동방의 어떤 왕이 있었다. 그 왕은 인간의 역사를 알고 싶었다. 왕은 한 현자를 시켜 오백 권의 책을 가져오게 했다. 현자는 오백권의 책을 가져왔지만, 나랏일에 바쁜 왕은 다 읽을 수가 없어서 요약해 오라고 했다. 현자는 이 십 년 뒤에 오십 권의 책을 가져 왔다. 늙어버린 왕은 그것도 읽을 수가 없어 다시 줄여오라고 했다. 또 이십 년이 흘렀다. 현자가 한 권의 책으로 줄여 왔다. 그러나 늙어 병든 왕은 한 권의 책 마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때 현자는 한 줄로 말해 주었다.

"사람은 태어나서 고생하다 죽는다."

서머싯 몸의 소설 <인간의 굴레에서>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어렸을 때 들은 적이 있다. 옛날 어떤 왕이 세상의 진리를 담아 요약해오라고 했는데, 학자들은 한 권의 책을 만들고, 그것을 한 페이지로 만들고, 다시 한 문장으로 만들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효율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욕구는 모든 사람에게 같나 보다. 그래서 인문, 사회, 자연과학의 지식들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한 책은 언제나 잘 팔린다. 나도 간단하게 특정 분야의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방법들을 자주 찾아 헤맨다.

그 이유는 모든 사림이 학자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학자가 아니라고 해서 여러 분야의 지식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우리에겐 다양한 이유로 지식이 필요하다. 가장 중요하고 원초적으로는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다. 사회생활이나 사업 상의 목적을 위해 필요할 수도 있다. 지식에 대한 대화는 인간관계를 더욱 윤택하고 풍부하게 만든다. 특정한 영감이나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 필요할 수도 있다. 이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이유로 우리에게 지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모든 지식을 학자들처럼 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들여서 팔 수는 없다. 동서양의 모든 고전을 모두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고전의 내용을 쉽고 간편하게 알 수 있는 책을 찾는다. 요즘은 그것도 읽을 시간이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짤막한 지식 유튜브로 지식을 습득한다. 많은 지식 유투브 채널이 구독자가 수십만이 넘는다. 유튜브가 간편하게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좋지만,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면 둘의 장점을 합쳐 놓은 것은 없을까? 몇 페이지 분량으로 금방 읽을 수 있으면서 생각의 깊이까지 넓힐 수 있다면? 그것은 꽤 괜찮은 공부 텍스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매우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다. 바로 대학에서 입시 문제로 출제했던 논술 문제를 보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할 것이다. 우선 대입시험 이라는 얘기만 들어도 답답하고, 고등학생들이나 보는 걸 유치하게 왜 내가 봐야 하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편견을 걷어내고 생각해자. 우리는 그 문제를 가지고 반드시 글을 써야 하는 것도 아니고, 글자수의 압박을 느낄 이유는 더더욱 없다. 그 문제의 출제 의도나 채점기준에 맞출 이유도 없다. 우리는 그저 편안하게 보고 자유롭게 생각하면 된다.

그렇게 보면 논술 문제 만큼 양질의 지식을 빨리 쌓을 수 있는 텍스트는 흔치 않다. 거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첫째 텍스트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그것이 질적으로 좋을 수밖에 없다. 논술 문제는 다들 알다시피 대학의 교수님들이 출제한다. 우리나라에서 그 분야 지식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심혈을 기울여 제시문을 고른다. 적게는 수천 명, 많게는 수만 명의 학생들의 미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시험이기에 대충 낼 수가 없다. 거기에는 부분적으로 학교의 명예도 달려있다. 좋은 문제를 출제한다고 해서 학교의 명예가 올라가는 것은 아니지만, 오류가 있는 문제를 출제했다가는 학교의 신뢰를 떨어질 것이다. 실제로 몇 년 전에 모 대학 자연계열에서 출제한 문제에 답이 없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일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문서 기록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논술 문제에 나온 제시문은 훌륭한 책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일 수밖에 없다. 그 부분을 읽었다고 그 책을 모두 읽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핵심 뼈대 정도는 알게 됐다고 할 수 있다.

나처럼 보통의 지능을 가진 사람이 한 권의 책을 읽고 머릿속에 남기는 지식의 양은 얼마나 될까? 책을 읽고 몇 개월이 지나서 그 책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써 보면 그 분량이 한 페이지를 넘기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논술 제시문을 보고서 남는 지식의 양의 효율을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여러 가지 이유로 기억에도 더 잘 남는데 그 이유는 차차 말하겠다.

둘째, 다양한 주제의 지식을 접할 수 있다. 도서관에는 100~900까지 숫자로 모든 책을 분류해 놓았다. 인간의 지식이 모두 그 숫자 안에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신기한 일이다. 지금까지 출제된 논술 문제들을 도서관에 꼽는다면 꼽히지 않을 서가가 없을 만큼 세상의 거의 모든 주제가 다루어졌다. 그리고 그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 동서양을 고전을 비롯해서 최신 서적까지 망라한 텍스트가 실려 있다.

셋째, 한 주제에 대해서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 논술은 기본적으로 학생의 사고력을 측정하기 위해 설계된 시험이다. 따라서 서로 반대되거나 미묘한 차이가 있는 관점들을 다양하게 제시해준다.

이러한 장점은 우리로 하여금 완전히 새로운 정신적 경험을 하게 해준다.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잇게 한다. 한 번은 "부끄러움"이 주제로 출제된 적이 있었다. 부끄러움에 대해서 깊이 고찰해보는 사람은 흔치 않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런데 그 문제를 보고 있으면 왜 내가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문제에서는 부끄러움에 대한 심리적, 사회적, 윤리적 고찰을 하고 있는데, 그것들을 따라다보면 매우 흥미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 그 문제는 곧 다루도록 하겠다.

마지막 이유가 가장 중요한데, 시험 문제이기 때문에 질문이 있다. 앞에서 논술 문제에서 봤던 문제들은 기억에 더 잘 남을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별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책을 읽으면 그 내용이 오래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정말 궁금해서 너무 알고 싶어서 읽은 책의 내용은 훨씬 오래 남는다. 능동적인 독서가 되기 때문이다. 책에 있는 활자를 기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 질문을 책 속에 끊임없이 투영하면서 책과 소통하다보면 그 내용이 더욱 잘 남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질문하기는 무엇인가를 알아감에 있어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소크라테스는 "질문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유명한 교수님들의 강연을 들으면 질문하는 것이 답을 찾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나는 꼭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답을 찾는 것도 질문을 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아인슈타인이 여섯 살 때 나침반을 보면서 이것을 움직이는 힘은 뭘까 하는 질문에서 멈췄다면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인간의 지적활동은 연속적이다. 질문과 답은 이 연속성을 이루는 근본적인 요소다. 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는 나의 인식은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서 시작했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답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현대의 철학자들은 또 이렇게 묻는다. "내가 과연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게 철학은 발전해 왔다. 그것은 자연과학도 사회과학도 마찬가지다.

논술 문제에는 제시문만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질문이 있다. 질문 중에는 단순히 텍스트의 내용을 묻는 것도 있지만,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발견을 하게 하는 질문도 있다.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찾으면서 지성을 키울 수 있다. 그리고 그 답은 필연적으로 또 다른 질문으로 연결될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지금까지 논술 문제는 우리의 지적 성장에 더 없이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재료가 될 수 있다. 사실 논술 시험은 이제 대입에서 존재감을 거의 상실했고,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물론 한국의 교육이 카오스 이론의 상징인 날씨만큼이나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지만, 큰 변수가 없는 한 사라지는 수순으로 향할 것이다.

논술이 대입에서 사라지는 것에는 전혀 아쉽지 않지만, 이런 좋은 문제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매우 아쉽다. 개인적으로는 국가 기관이건 민간 단체 건 이런 문제들을 좀 내줬으면 하는 마음까지 있다.

입시가 아니라 사회적 논의의 관점에서 그런 문제들이 출제된다면 우리 사회의 공론장이 한층 나아질 것이다. 모두가 느끼는 것처럼 요즘 우리 사회의 공론장은 지나치게 과열되어 있다. 누가 무슨 얘기를 하면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죽자고 달려든다. 그 문제들이 자신의 이해관계와 너무 밀접하게 관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의 문제와 조금 떨어져서 토론하고 논의할 수 있는 재료들이 우리 사회에는 필요하다. 좋은 책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책을 읽기에는 많은 사람들에겐 시간이 부족하다.

나의 작은 아이디어가 우리를 지적으로 더 성장시키고, 우리 사회의 논의가 좀 더 생산적일 수 있게 하는데 미약한 도움이라도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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