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가 부끄러움이라니...

2010년 고려대학교 모의고사 문제

by 고양이의 영토

이 문제가 나온 지 벌써 12년이 되었는데, 나는 아직도 이 문제를 처음 본 날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세상에 부끄러움이라는 주제로 이 정도 넓고 깊은 통찰을 가능하게 하나디. 너무 신기했고, 어떤 의미에서 내 삶의 궤적에 영향을 미친 문제였다. 이 문제를 풀고 나서 나는 더 자주 내 삶을 돌아보게 되었고, 사회적 억압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럼 어떤 문제였는지 한 번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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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윈에 따르면 부끄러움의 원천은 제3의 인물들의 이목이 자신의 신체적 현상에 집중되고 자신이 과도하게 주목 받는 데에 있다. 내가 보기에 이 생각은 일리가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부끄러움의 감정이 생길 때에는 언제나 자아 감정의 강한 부각과 위축이 일어나고 이는 타인의 시선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부끄러워할 때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서 자신의 존재가 부각되는 것을 느끼고, 이어서 일정한 규범을 어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겸손한 사람은 자신에 대한 칭찬을 접하면서도 얼굴이 붉어지곤 하는데, 이는 자신의 자아가 부각되는 상황에서 언제나 자신과 자신의 이상 사이에 놓인 근본적인 간극을 의식하는 겸손함이 작동한 탓이다.


인격체로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남에게 드러내지 않고 남의 접근을 불허하는 영역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 영역의 경계는 문화적 . 개인적 상황에 따라 상당히 다르지만, 일단 이 영역이 침입을 받게 되면 누구나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이 침입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자신이 처하게 된 상황과 자신의 항구적인 인격적 규범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 영역에 속하는 것은 여럿이지만, 그중 가장 전형적인 것이 발가벗은 몸이다. 나의 발가벗은 몸에 남의 접근이 허용되는 것은 특수한 경우일 뿐이다. 그리고 이때 나의 자아의 총체성은 훼손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눈길이 집중되는 가운데 나의 사적 영역이 침해 받는다면 체면의 손상은 피할 수 없다. 이때에는 남들의 이목을 한 몸에 받으며 나의 자아가 부각되지만, 동시에 완벽하고 규범적인 자아의 이상에 못 미치는 결함이 함께 의식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보아 부끄러움은 사람을 과소평가하거나 곤혹스럽게 만드는 상황이 개인의 부분적인 관심사가 아니라 그 인격 전체를 건드릴 때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소년이 교복 소매에 난 구멍을 감추는 것은 엄격한 선생님의 처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고, 채용을 앞둔 노동자가 그리할 때에는 구직의 요청이 거부를 당하게 될까 두려워한 까닭이다. 이 두 경우 소매에 난 구멍은 거북한 것이기는 하지만, 본래 부끄러움의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많은 재산을 탕진해 몰락한 사람이 구멍 난 옷을 입고 전에 알던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이는 부끄러움의 강력한 이유가 된다. 그는 전에 알던 사람이 주목하는 가운데 과거 자신의 모습 전체를 다시 떠올리고 동시에 이러한 자신의 과거 모습에 비추어 현재 자신의 위축된 모습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이 나의 과거와 현재 전체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움을 준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시선이 부끄러움의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안에 자아 감정의 교체를 야기하는 사람은 통상 우리와 아주 먼 사람도, 아주 가까운 사람도 아니다. 거리가 아주 먼 사람에게 우리는 하나의 자아로 등장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에게 우리는 전혀 친밀하지 않아서, 그는 우리를 다른 사람과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시 간 전부터 알게 되었고 한 시간 후에는 더 이상 만나지 않게 될 동승자에게 종종 속을 터 놓고 이야기하는 여행 중의 특이한 개방성도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다. 동양의 여자들은 충격적인 상황에서 놀라운 일을 당하게 되면 무엇보다 얼굴을 가린다고 하는데, 이 역시 같은 논리로 설명될 수 있다. 즉 얼굴은 각자의 인격이 드러나고 각인되는 장소인데, 얼굴을 감추면 자아 역시 사라진다는 것이다. 고대 비너스의 몸을 가리는 동작은 부끄러움에 대해 본능적으로 대처한 것이지만 얼굴을 감추는 동작은 그보다 훨씬 더 효과적인 대처 방식이다.


부끄러움의 심리적 구도는 자아의식이 도덕적 과정 속에서 고양됨과 동시에 격하되는 특별한 상황이 발생할 때 비로소 활성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에 대한 외적 요인은 언제나 남의 이목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정신은 자기 자신과 대면해서 자신을 대상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수많은 관계에서 우리는 우리에 대한 다른 사람의 판단, 감정, 의지를 대신하도록 자신의 일부를 스스로로부터 분리시킨다. 마치 제3자가 하듯 우리는 자신을 관찰하며 부끄러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타인의 예리한 이목을 이제 우리 안에 이식한다. 마치 우리 안에 사회 집단의 의회 대표를 세우듯이 우리는 자신에 대해 원래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와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보통의 경우 다른 사람의 이목을 통해서 일어날 내적 상황을 순전히 자신 안에 불러일으킬 수 있고 또한 자신 앞에서 부끄러워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자아의 부각과 위축에 따른 부끄러움이지 부도덕에 괴로워하는 양심의 가책은 아니다. 그러므로 부끄러움의 감정은 무언가 부도덕한 일을 행했을 때의 의식과 내용적으로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도덕적인 고통을 느낄 수 있고, 또 부끄러움은 도덕적인 것과는 전적으로 무관한 사건과 결부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 기관들에 대한 자극이 자주 부끄러움의 감정을 불러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부끄러움이 일어나는 심리적 구도만 보면 그것은 도덕적 기관들 그 자체와는 구분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또 주목해야 할 것은 보통의 경우라면 부끄러움을 느낄 행위이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경우에는 부끄러운 감정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몇 년 전에 나는 어떤 잡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적이 있다. “많은 클럽과 집단들은 개인으로서는 차마 요구할 수 없는 혜택을 베풀어달라고 떼를 쓴다. 북미 어떤 도시의 행정부에서는 행정상의 권력 남용을 없애기 위해서 모든 관직을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구성원들로 된 위원회에 맡겼던 적이 있다. 그러자 곧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특정한 개인이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가 없게 되자마자 곧 훨씬 더 파렴치한 방식으로 권력의 남용이 기승을 부린 것이다. 고대의 역사는 그 어떠한 개인에게도 감히 제공할 엄두도 내지 못할 뇌물을 사회단체들이나 원로원들에게는 공식적으로 제공했던 여러 사례들을 보여준다.” 부끄러워하는 모든 태도는 원래 자아의 부각을 전제로 하는데, 이를 위해 자아는 자립적 현존, 즉 독립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부끄러움을 논하기 위해서는 우선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그 개인은 전체의 부분인가, 아니면 그 자체로 하나의 전체인가? 부끄러움의 감정은 스스로 책임질 줄 아는, 전적으로 자립적인 자아와 이 자아가 존중하는 객관적 규범의 형성을 전제로 생겨난다. 그런데 개인이 집단 안으로 숨고 집단의 이해관계가 객관적 규범을 대신하면, 이 두 조건 모두가 부정된다. 전자 없이는 자아의 부각이 불가능하고 후자 없이는 자아의 위축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개인이 초개인적인 전체에 비해서 수행하는 역할이 미미하고, 단지 수동적인 입장만을 취할수록 더욱 심해진다. 고귀한 가문의 하인들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뻔뻔함’은 이렇게 설명된다. 루이 14세 때에는 “하인처럼 뻔뻔하다”는 말까지 있었다.



(2)


생선 요리도 내가 먹고 싶은 것이고 곰발바닥 요리도 내가 먹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두 가지를 다 가질 수 없다면 생선 요리를 버리고 곰발바닥 요리를 취할 것이다. 삶도 내가 바라는 것이고 의로움도 내가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두 가지를 다 가질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할 것이다.


삶도 내가 바라는 것이지만 삶보다 더 바라는 것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더라도 그것만은 하지 않을 만큼 부끄러운 일이 있는 것이다. 죽음도 내가 싫어하는 것이지만 죽음보다 더 싫어하는 것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있더라도 그것만은 하지 않을 만큼 부끄러운 일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삶보다 더 바라는 것이 있고 죽음보다 더 싫어하는 것이 있는 이 마음은 성인(聖人)만 특별히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본래 다 가지고 있는 본심이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 마음을 잃고 살아 간다는 데에 있다.

밥 한 그릇 국 한 대접만 얻으면 살고 얻지 못하면 죽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주는 이가 발로 차고 욕하면서 주면 행인이나 거지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본래 지니고 있는 부끄러워 할 줄 아는 마음이 발동한 것이다. 그런데 엄청난 부귀를 누릴 수 있는 지위를 준다면 예의 없이 굴욕적으로 준다 해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덥석 받는다. 높은 지위에 오르면 좋은 집에 살고 아름다운 처첩을 거느릴 수 있으며 남에게 은혜를 베풀어 떠받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무릅쓰고도 받지 않다가 좋은 집, 아름다운 처첩, 존귀한 대우를 위해서는 받으니 이는 본심을 잃은 것이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익을 좇는 데 혈안이 되어 이 마음을 잃어버리고는 심지어 본래 자신에게 그런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되었다. 마치 원래 나무가 무성했던 우산(牛山)이 무절제한 벌목으로 민둥산이 되어버려 본래 나무가 무성했다는 사실조차 잊혀져버린 것과 같다. 본심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교화하여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을 길러주면 사회의 악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3)

사회마다 정상인에 관한 그 나름의 기준이 존재한다. 고프만이 날카롭게 지적한 바와 같이 정상에서 일탈한 모든 경우들은 수치심과 결부된다. 개인의 세계관은 그가 속한 사회가 지닌 정상성의 규범에 의거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이 그러한 규범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에게 수치심이 일어날 것이다. 대개의 경우 사회적 수치심은 신체와 직접 관련을 맺는다. 지체 장애를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장애들이나 비만과 추한 외모, 운동 능력의 부족, 성적 매력의 부족 등에서 사회적 수치심이 빚어진다. 성적 소수자와 전과자, 실업자 등과 같이 개인의 생활양식을 나타내는 모종의 특성들도 사회적 수치심을 야기하는 낙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러한 모종의 특성과 관련된 낙인이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정상으로부터의 일탈을 용이하게 가시화할 수 있는 표시들이 사회적인 차원에서 추구되었다. 그리스어로 ‘오명(stigma)’은 사실상 이러한 표시를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스티그마(stigma)’나 ‘스티조(stizo)’처럼 오명을 의미하는 단어군은 낙인찍기보다 문신 새기기를 언급하는데 그 시대에 문신은 처벌의 목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칙령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범법자에게 공개적으로 수치심을 주기 위해 그의 얼굴에 문신을 새겼다고 한다. 다른 많은 사회에서도 그와 유사한 조치들이 수행되었다. 낙인과 문신이 함께 사용된 사례도 있었다. 낙인찍기가 범법자뿐 아니라 다양한 소외 계층을 선별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증거도 여러 사례들을 통해 거듭 나타난다. 노예와 빈자, 성적 소수자와 종교적 소수자들이 그렇게 낙인 찍혔다.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찍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이와 관련한 논의는 추론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수치심이 도처에 나타나는 현상인 만큼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문제의 핵심은 ‘정상’이라는 개념이다. 그 개념은 두 개의 전혀 다른 생각과 결부된다. 한편에서는 정상을 통계학적 빈도라고 생각한다. 정상이란 통상적인 것, 다시 말해 사람들이 대체로 취하거나 행동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정상’ 은 ‘특이함’과 반대된다. 다른 한편에서는 ‘정상’을 선이나 규범의 개념으로 생각한다. 정상이 ‘적절함’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정상’의 반대는 ‘부적절함’ ‘악’ ‘창피함’이다. 오명과 수치에 관한 사회적 관념들은 주로 ‘악’이나 ‘창피함’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대로 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쁘다거나 창피하다고 지탄을 받는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고 비정상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유발하는 것이 어떤 논자들에게는 사회적 규범의 해로운 측면으로 파악된다. 그들은 그러한 사회적 규범이 법적인 수행을 통해 신성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법은 두 가지 방법으로 모든 시민의 동등한 존엄성을 보호해야 한다. 우선 법은 정상과 다르다고 낙인이 찍힌 사람들이 현재보다 더 품위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법은 그 사람들에게 사회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일에 대해 조력하지 말아야 한다.


(4)

누나와 함께 강에 나간 적이 있었지. 잔잔한 강물 위로 산이 거꾸로 비쳐 있었다. 우리는 바위 위로 올라갔다. 누나는 말했다. 나 목욕하는 동안 넌 여기 있어. 그리고 누나는 나를 바위 위에 뉘었다. 너 일어나면 안 된다. 왜. 나 지금 옷 벗는단 말야. 누나의 목소리가 바위 밑에서 들렸다. 나는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누나가 옷으로 앞을 가린 채 내 옆에 몸을 굽혔다. 너 여기 가만히 누워 있어, 옷이 날아갈까 봐 내 옷을 네 옷깃에 핀침으 로 꽂아 놓고 갈 테니. 나는 돌아서서 내려가는 누나의 앙상한 어깨와 팔죽지를 보았다. 앞산에서 솔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쏴아 하고 들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돌이 구르면 여자가 죽고 여우가 울면 남자가 죽겠지. 양짓말에서… 음짓말에서… 나는 슬며시 일어났다. 강물에 비친 산속에 누나의 나신(裸身)이 박혀 있었다. 나는 말했다. 누나 나 간다. 그때 누나는 고개를 돌리는가 하자 엄마, 하고 소리치며 강물에 몸을 잠갔다. 그리곤 얘얘얘 옷 가져 와,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나는 믿었었다, 열 네 살의 누나가 벗은 몸으로 옷을 가져가기 위해서 뛰어 올 것이라고. 그러나 누나는 달려오지 않았다. 반짝거리는 모랫길을 따갑게 밟으며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누나의 옷이 허리에서 펄럭일 때 나는 더욱 무서웠다.

누나가 돌아온 것은 저녁 무렵 형이 옷을 내다 준 후였다. 열에 들떠 앓아누운 누나에게 나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에는 나는 너무 어렸다. 전후(戰後)의 식량난 속에서 누나는 그렇게 누웠다가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눈물을 흘리며 맞은 몇 대의 침이 그녀가 받은 치료의 전부였다. 그날 혼자 돌아와야 했던 소년은 신비와 오해의 줄을 풀어 누나의 얼굴 같은연을 날리며 성장해 버렸다. 날아가 버린 연을 생각하듯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문제. (2)와 (3)의 주장을 비교하고, (1) (2) (3)을 모두 참고하여 (4)를 해설하시오. 그리고 부끄러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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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는 처음에 바로 나오듯 '부끄러움'이다. 사실 우리가 사랑이나 미움 분노에 대해서는 자주 생각하지만,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깊이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위에 수록된 글들을 따라가다 보면, 세상에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나는 왜 한 번도 고민해보지 않았지 하는 생각이 든다.


각 제시문의 내용을 한 번 살펴보자


(1)은 게오르그 짐멜의 「부끄러움의 심리학에 대하여」의 일부다.


이후 나는 이 논문을 찾아서 읽어 보았다. 그리고 다른 책들을 읽으면서 이 논문을 비롯해서 게오르그 짐멜의 논문들이 많이 인용되는 것을 보았다. 매우 흥미로운 논물이므로 관심과 시간이 있으면 읽어보길 바란다. 아주 흥미로운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제시문만 봐도 논문의 핵심이 잘 나와 있다.


이 글에서는 부끄러움이 일어나는 심리적 기작(메커니즘)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이 글에서는 두 단어만 기억하면 된다. 바로 부각과 위축이다. 부각은 말 그래도 드러나는 것이고, 위축은 자기가 생각하기에 이상적이지 않은 것, 즉 자신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의 학창 시절 시험을 치고 나면 전교 학생들의 석차가 교무실 앞에 게시되었다. 여기서 가장 부끄러운 사람은 누구일까? 부각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두 명이다. 전교 1등과 전교 꼴찌. 그러나 전교 1등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 학생은 부각되지만 그녀 혹은 그의 빛나는 성적은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반면 전교 꼴찌는 어떤가? 그 학생은 전교 1등만큼이나 눈에 띄지만, 그 모습은 남들에게 감추고 싶은 모습이다. 그러므로 전교 꼴지는 부끄럽다. 물론 성적이나 공부에 관심이 없다면 감주고 싶은 모습이 아닐 것이기 때문에 부끄럽지는 않을 것이다.


자아의 부각과 위축. 이것으로 모든 부끄러움이 설명된다. 우리가 여행에서 처음 만난 타인에게 부끄러움 느끼지 않는 이유는 그 사람이 나를 모르기 때문에 나의 자아가 부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집단 속에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이유도 집단 속에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자신을 타인인 것처럼 바라볼 수 있다. 이를 철학적으로 대자적 인간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시선으로도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다. 혼자서 야동을 볼 때 타인의 시선이 없어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느 순간 '내가 뭐하고 있지?' 하고 화들짝 놀라며 창을 닫거나 컴퓨터를 꺼버릴 수도 있다.


이 부분이 두 번째 글로 이어진다.


두 번째 글은 맹자의 글이다. 이 글을 읽고 가장 신기했던 것은 맹자가 살았던 춘추전국 시대에도 곰발바닥 요리를 먹었구나 하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 글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관점에서 부끄러움을 다루고 있다. 맹자는 인간이 본성이 선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공부와 수양을 통해서 선한 본성을 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맹자는 그 관점에서 부끄러움을 고찰했다. 선한 본성을 가진 인간이 그 본성에 반하는 생각이나 행위를 했을 때 부끄러움을 느껴서 반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맹자에게 부끄러움은 평소에는 발현되지 않다가 인간이 악한 길로 갈 때 그것을 막기 위해서 생겨나는 감정이다. 즉 선한 본성에 오류가 생겼을 때 그 오류를 수정하게 하는 것이 부끄러움인 것이다.


이 대목에서 잠시 옆길로 새보자. 문제와는 상관없이 하나의 생각을 엮어 볼 수 있다. 나인홀트 니부어라는 이름은 많은 분들이 들어봤을 것이다. 그는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으로 유명하다. 책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지만, 그 개인이 집단이 되면 비도적적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글과 두 번째 글을 엮어서 생각하면 나인홀트 니부어의 이야기가 납득이 된다. 인간에게는 옳지 않는 행동을 했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본성이 있다. 그런데 그 인간이 개인이 아닌 집단 속에 들어 갔을 때, 자아가 부각되지 않기에 부끄러움은 사라진다. 그래서 인간은 집단일 때 더 비도적인 될 위험이 높아지는 것이다.


세 번째 글은 사회적 낙인에 대한 글이다. 사회적 낙인이 인간을 부끄럽게 만든다는 내용이다. 사회가 사람들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고, 비정상인 사람들을 낙인찍어서 그 사람들로 하여금 부끄러움 느끼게 만든다는 것이다.


장애가 없는 사람을 정상인이라고 일컫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반대로 얘기하면 장애인을 비정상으로 보는 것이다. 사실 장애가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어느 정도의 장애를 가지고 살아간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장애인 이외에도 역사에는 수많은 비정상이 있었다. 마녀, 흑인, 인디언, 동성애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비정상으로 낙인찍혀서 살아가고 있고, 세 번째 글을 그런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네 번째 글은 문제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얘기해보기고 하고 문제를 보자.


문제 세 가지를 묻고 있다.

첫 번째 물음은 (2)와 (3)을 비교하는 것이다.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2)에서는 부끄러움이 개인의 본성에 내재해 있다는 입장이고, (3)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선척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부끄러움과 후천적으로 환경에 의해 생겨나는 부끄러움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문제가 우리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이유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두 글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하나 더 있다. 두번째 맹자의 글이 부끄러움이 인간을 더 선하게 만드는 좋은 기능을 하는 반면 세 번째 글에서 부끄러움 소수자를 차별하는 나쁜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한없이 쉽고 단순해 보이는 이 비교가 나중에 부끄러움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두번째 물음으로 넘어가보자. 네 번째 글로 등장한 소설을 앞선 글을 바탕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두 명의 부끄러움이 있다. 하나는 누나는 부끄러움이고, 다른 하나는 소년의 부끄러움이다.


멱을 감고 나서 옷을 어야 하는데 동생이 옷을 숨기는 바람에 누나는 옷을 입을 수 없었다. 나신으로라도 집으로 뛰쳐 갔으면 됐지만 누나는 부끄러워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누나는 결국 물에서 나오지 못했고. 소나기의 소녀처럼 이후 앓다가 죽음을 맞았다.


누나는 나신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에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벗은 몸은 그녀로 하여금 자아의 부각과 위축을 가져왔다. 벗은 몸은 사람들의 눈에 띌 것이고, 그 밤 아무도 없다고 해도 스스로 자기가 그렇게 돌아다니는 모습이 마음 속에 남을 것이었다. 그런 모습은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자신을 한없이 위축시키는 모습니다.


그러나 모든 문화권에서 벗은 몸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옷을 거의 입지 않고 생활하는 부족들도 많다. 그들은 벗은 몸이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또한 애기나 아주 어린 아이들도 벗은 몸을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 누나의 부끄러움은 세번째 글에 나오는 것처럼 은 몸은 비정상으로 보는 사회 문화적 요인과도 연관이 있는 것이다.


누나의 부끄러움은 그렇게 보고 나의 부끄러움은 어떤가? 여기서 나의 부끄러움은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되돌아 보면서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닫다. 이는 두 번째 맹자의 글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넘어가보자. 우리는 부끄러움에 대해서 무엇을 얘기해야 하는가?


앞선 내용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부끄러움 자아의 부각과 위축으로 발생한다. 자아의 부각은 상황과 관련이 있다면 위축은 가치관과 관련이 있다. 한 개인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무엇이 그에게 위축을 가져다 주는지가 결정된다. 그 이상적인 모습이 윤리적이라면 부끄러움을 통해서 인간은 인격적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다. 세 번째 글에서 화자가 반성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런 가치관이 언제나 윤리적이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때로는 정의롭지 못한 가치관은 부당한 부끄러움을 만들어내고 소수자들에게 대한 억압과 천대를 정당화할 수 있다. 세 번째 글에서 누나는 당연히 나체 상태로라도 집으로 뛰어 들어갔어야 했다. 생명만큼 가치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에는 한 개인과 그 개인이 속한 사회의 가치관을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정의로운 사회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부끄러움은 그 사회를 더욱 정의롭게 만들 것이다. 억압적인 사회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부끄러움은 그 사회의 차별을 강화할 것이다.


이 문제를 따라가다 보면 이런 결론이 가능해진다.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심리적으로 윤리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얼마나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다.


우리는 여기서 더 질문을 이어 갈 수 있다. 세 번째 글에서 사회적 부끄러움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 사회란 무엇일까? 정상과 비정상과 나누는 주체는 누구일까? 여기서 우리는 권력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결국에 우리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권력자들이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가치일 수 있다.


나는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우리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가? 이 질문에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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