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샤바 기행] 바르샤바가 아끼는 값진 바로크 보배

<빌라누프 궁전>, 유럽을 구한 왕이 지은 사랑의 궁전

by 흑투리


심기일전하고 다시 새로운 관광지 기행글로 찾아온 작가 흑투리. 이번에 투리가 소개할 곳은 어떤 곳이냐? 인터넷에 '폴란드의 베르사유'라고 검색하면 열에 아홉은 나오는 왕궁. '빌라노프 궁전(Pałac w Wilanowie)'이다!



다만 저 궁전이 정말로 베르사유 궁전급이냐고 물어보면 다소 해명이 필요한데, 진짜 대궐만한 궁전을 기대하고 가면 실망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빌라노프 궁전은 그렇게 크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은 특정 장소를 다른 곳에 비유하면 절대적인 별명이 되는 법인데, 이 '폴란드의 베르사유'라는 별칭은 폴란드의 다른 지역에 있는 몇몇 궁전들에서도 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궁전이 방문할 가치가 적은 것은 아니다. 비록 그 규모는 소박할 수 있을지언정, 바르샤바에게 있어 빌라누프 궁전은 몇 안 되는 귀중한 가치를 지닌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어떤 가치가 있냐고? 궁금하신 분들은 투리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시라. 오늘의 주인공이 바르샤바의 인기 관광지에 속하는 건물인 만큼, 이 글을 다 읽어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한창 날씨가 좋을 봄, 4월 24일.



20250423_181409.jpg 투리의 폴란드 학교에서 찍은 캠퍼스 사진 ^^



당일 목요일 수업이 모두 끝나고, 밖에 나가보니 이보다 좋을 수 없었던 날씨 상황. 이런 날은 관광지를 들르기에 딱 좋은 날이다! 미리 점찍어놨던 곳들 중에서 아직 방문하지 못한 곳들을 살펴보니, 마침 빌라누프 궁전의 입장료가 목요일마다 무료!



도시 중앙에 몰려있는 다른 관광지들과 다르게, 빌라누프 궁전은 바르샤바의 남부 빌라누프 구(Wilanów)에 떨어져 있다. 평소 들르지 않는 구역이다 보니 눈길이 그다지 가는 곳은 아니었지만, 이날이 궁전을 방문할 최적의 타이밍이다 싶어 투리는 버스를 타고 빌라노프 궁전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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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 미국식 버거집에서 점심 허기를 달랜 뒤, 투리는 여유롭게 궁전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향했다. 아, 이렇게 맘 편히 원하는 곳으로 여기저기 들를 수 있는 행복한 순간이 얼마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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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안쪽으로 들어가니 규모가 있는 건축물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사람들이 한쪽 입구를 통해 궁궐 안에 들어가고 있었다. 느낌상 해당 입구를 통해서만 출입 가능해 보이는지라 투리 역시 그 입구를 통과했다.



20250424_131913.jpg 진짜로 투리가 직접 찍은 빌라누프 궁궐의 사진.



들어가니 짜잔! 넓은 잔디밭과 함께 화려한 노란색 왕궁이 입구로 들어온 손님들을 반기고 있었다. 지금 사진으로 보시는 왕궁이 바로 빌라누프 왕궁이다. 이 왕궁을 지은 왕은 얀 3세 소비에스키(Jan III Sobieski) 국왕으로, 한때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을 이끌었던 뛰어난 왕들 중 한 명이다.



투리가 폴란드 기행글에서 전체적으로 폴란드의 역사를 기구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폴란드가 유럽의 역사에서 항상 약자였던 것은 아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공국 시기에는 그 러시아 제국의 왕도 흔들 만큼 유럽 열도를 호령했던 시절도 있었다. 얀 3세 왕은 이 공국이 몰락하는 시점에서 큰 업적을 세운 왕인데,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무려 유럽 대륙 전체를 구했다.



20250424_132022.jpg 빌라누프 궁궐 근처의 공원.



과장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사실이다. 오스만 제국은 유럽 대륙을 정복하기 위해 2달간 비엔나를 포위한 이후 침공을 단행했다. 그렇게 1683년 9월 11일과 9월 12일에 발발한 이 전투를 '빈 전투'라고 부르는데, 빈 전투는 신성 로마 제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처음으로 오스만 제국에 맞서 협력한 전투였다. 동시에 오스만 제국이 기독교 세계로 진격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전환점으로 여겨지는 전투이다.



이때 얀 3세는 주 병력인 폴란드군을 이끌며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그의 활약 덕분에 오스만 제국은 비엔나에 대한 점령을 포기해야 했으며, 로마 교황청을 비롯한 기독교 세력들은 오스만 제국의 침공으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었다.



20250424_132028.jpg 계속해서 공원 사진.



어쨌든 그 왕이 17세기 후반에 지은 궁궐이 '빌라누프 궁전'이다. 그가 이 궁궐을 지은 이유는 프랑스 왕국 출신의 왕비 마리 카지미르 다르키앙(Maria Kazimiera de la Grange d’Arquien, 1641–1716)를 위해서였다. 궁궐의 탄생이 아내를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어서 이 궁전은 '여름의 사랑 궁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 궁전에 대한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 빌라누프 궁전은 나치 독일의 바르샤바 침공 당시 폭격당하지 않은 거의 몇 안 되는 건축물들 중 하나이다. 다시 말해, 이 궁전은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원형 그대로 유지가 되어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바르샤바로서는 이 살아 있는 역사를 아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250424_140721.jpg 궁전 뒤쪽의 장면.



또한 해당 궁전은 전체적으로 바로크 양식을 표방하고 있으며, 얀 국왕이 죽은 후 확장되면서도 당대의 유행과 양식을 반영하려는 흔적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때 그가 참고했던 궁전이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이었다. '폴란드의 베르사유'라는 말이 이 부분에서 비롯된 것이다. 궁전의 전체적인 바로크 양식이 베르사유 궁전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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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은 프랑스식을 차용했지만, 재미있게도 정원은 또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스타일을 골고루 섞은 형태이다. 처음에는 궁전 동쪽을 반원형으로 둘러싸는 바로크 양식의 이탈리아식 정원으로 시작했지만, 이후 프랑스식 파르테르 양식, 영국식 풍경 정원도 활용하면서 최종적으로 지금과 같은 정원이 되었다. 이 과정은 얀 3세가 죽은 후에도 지속되었기 때문에 개인의 취향이 아닌 유럽 미술의 흐름에 따라 형성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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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은 충분히 구경했다 싶어 왕궁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경비원이 미리 예약한 사람이 아니면 안에 들어갈 수 없다고 본인을 제지했다. 아차 싶어 예약표를 확인해 보니 이미 예약정원이 꽉 찬 상황. 이런, 투리가 빌라누프 궁전을 너무 얕보았다. 예약표를 확인해 보니 최소 일주일 전에는 미리 예약을 해두었어야 했다. 생각보다 꽤 인기가 많은 궁전이군, 이거. 결국 이 날은 공원 주변만 조금 산책하고 기숙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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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렇게 해서 5월 15일, 다시 방문하게 된 빌라누프 궁전. 이번에는 미리 예약한 덕분에 경비원에게 확인을 받은 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맡길 물건은 맡겨두고, 오디오 가이드는 영어로 설정한 뒤, 내부 탐사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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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리가 올라가자마자 가장 처음 발견한 방은 중국방. 웬 뜬금없이 중국방이냐고 물어볼 수 있는데, 사실 이 중국 유물 보관실은 얀 3세 국왕이 아끼던 방이라고 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극동 예술 전시관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곳에는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 작품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20250515_144523.jpg 방 곳곳에서 중국식 흔적이 묻어나 있다.



중국방은 그 규모와 수가 결코 적지 않았는데, 이곳에는 다양한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 화려한 광저우 에나멜 공예품과 점토, 상아로 만든 작품들이 있었다. 당시의 정교한 중국 판화와 회화 작품들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으며, 심지어 전 세계에 몇 점 없다는 남만(Nanban) 테이블도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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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위 사진에서 보시는 이 책상이 남만 테이블이다. 남만은 중국의 기준에서 주로 장강 유역 및 그 남쪽에 살던 이민족으로, 남쪽에 사는 오랑캐를 일컫는 말이다. 썩 좋은 표현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어쨌든 이 남만이 정확히 어느 구역을 지칭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중국 남쪽이나 베트남 쪽의 동남아시아 일대의 국가 쪽이 아닐까 싶다. 아무래도 중국 대륙이 광활한 만큼 그 문화도 다양할 테니 말이다.



20250515_144905.jpg 남만 테이블을 위에서 본 시뮬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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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은 유럽실 옻칠 기법으로 제작된 물품들 내지는 도자기나 의복 요소 등의 작은 일상용품들의 사진들이다. 진열장의 크기가 생각보다 커서 조금 놀랐는데, 이 공예품들이 어찌나 매력적이었는지 얀 3세가 죽은 뒤에도 그 뒤의 거주자들 역시 이 공간을 소중히 관리했다고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유럽은 말로는 극동을 미개하다고 하면서 뒤에는 극동 문화를 애용했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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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빌라누프 궁전에 어울리는 방들로 이동해 보자. 위의 사진 속 방은 사냥방이다. 사냥방은 총 두 개가 있는데, 지금 보시는 방은 첫 번째 방에 속한다. 이 방에는 유럽 가구들과 약간의 동양식 옻필 장식이 전시되어 있다. 아까의 방들보다는 좀 더 유럽풍처럼 보이지만 동양풍 냄새가 조금은 남아있다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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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 부근의 방은 이자벨라 루보미르스카(Izabela Lubomirska)라는 후대 소유주가 이용했던 방이다. 그녀는 궁전의 소유주가 되자, 남쪽 별관에 욕실을 추가했고 안뜰에는 부엌과 근위대 건물도 세웠다. 아까 정원에 영국식 풍경의 성격도 강화되었다고 언급했는데, 이것 역시 그녀의 지시로 인해 도입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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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러분이 보시는 곳은 루보미르스카가 있었을 당시의 거실이다.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안락의자는 18세기 초에 가져온 프랑스식 의자이며, 군데군데 보이는 청자 꽃병들은 1730~1760년 사이에 마이센이라는 독일 지역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 외에도 벽난로 위에는 극동에서 온 그릇과 접시들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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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시는 이 넓은 공간은 빌라누프 영지가 베틴 왕조의 아우구스트 2세 강건왕(Augustus II the Strong)이 임대했을 때 조성된 백색의 방(White Hall)이다. 궁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공간으로도 유명한 이 공간에서는 많은 중요한 의식들이 열리기도 했다.



주변을 둘러보면 벽 군데군데 여러 초상화들이 걸려 있다. 그 초상화들은 궁전의 역대 소유자들 혹은 그와 관련된 인물들의 그림이다. 특히 가장 가치 있는 작품 중 하나로 알려진 바로 위의 오른쪽 사진 속 초상화는 스타니스와프 코스트카 포토츠키(Stanisław Kostka Potocki)라는 인물의 그림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 인물은 나폴리 궁정에서 왕실 마구간의 사나운 야생마를 두려움 없이 길들였다는데, 이에 감탄한 나폴리 국왕이 그 순간을 후대에 남기기 위해 저 그림을 의뢰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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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위의 통로는 왕궁의 북쪽과 남쪽 사이를 잇는 통로이다. 원래 빌라누프 궁전은 이곳에서 정원으로 바로 걸어 나갈 수 있는 구조였는데, 그것이 이 저택이 노리는 '자연과의 연결'이라는 특징이기도 했다. 초반 부분에서 얀 3세가 만든 이 궁전은 그의 왕비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지었다는 의미로 '여름의 사랑 궁전'이라는 별칭이 있다는 언급을 했었다. 여기서 '여름'이라는 표현이 붙은 이유는 이 궁전이 왕의 여름 별장으로 지어진 장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얀 3세는 뛰어난 군 지휘관이기도 했지만, 예술과 학문의 후원자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자주 귀족 전통을 주변에 장려했으며,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직접 정원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고 한다. 마침 위쪽의 오른쪽 사진을 보면 기마 기념상이 하나 있는데, 그 기념상 속 인물이 얀 3세이다. 해당 동상은 빌라누프 저택을 창건한 영웅적인 얀 3세의 용맹함과 승리를 상징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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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위의 사진 속 방은 1875년, 당시 궁전의 소유주였던 알렉산드라 포토츠카(Aleksandra Potocka)의 요청으로 조성된 방이라고 한다. 이 방의 벽에는 석관이나 항아리, 그 외에도 여러 유물들에서 나온 고대 예술 작품의 파편들이 끼워 넣어져 있었다. 그 외에도 주변을 보면 걸려 있는 예술품들이 꽤 많은데, 해당 작품들은 포토츠카가 고고학 발굴에 참여하는 동안 수집한 것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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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 같은 경우는 얀 3세를 알현하러 온 손님과 궁전 신하들의 대기실과도 같은 공간이다. 여기도 역시 작품들이 꽤나 많이 있다. 확실히 외부인을 접대하는 곳이다 보니 앞에서 봤던 공간들보다는 화려한 장식과 작품들이 한층 늘어난 느낌이었다. 투리가 여러 궁을 돌아다니면서 느낀 건데, 원래 손님을 맞이하려면 약간의 과시도 관계형성에 중요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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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빌라누프 궁전은 꽤나 눈호강을 해주는 요소들이 많았다. 의외의 동양풍 유물들과 여러 고대 전시물들, 그리고 전형적인 서양 회화 작품들.....그래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감상 속도가 느린 편인 투리의 기준으로 한 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를 돌아다니니 내부는 모두 둘러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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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주에 따라서 분위기는 약간씩 달랐지만, 전체적으로 이 궁전에서 확실히 느낄 수 있었던 부분을 말하자면 그것은 '얀 3세에 대한 예우'였다. 실제로 그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유럽을 보호했던 그의 업적을 생각하면 그 위용은 실로 과시할 만하니까 말이다. 더군다나 이 궁전이 투리가 아는 바르샤바 관광지들 중에서 유일하게 재건이 필요 없는 역사적 건물이라는 점 역시 희소적인 가치를 부여해 주는 것 같았다.



비록 다른 관광지들과는 떨어져 있었지만, 그렇기에 별장으로서의 의미가 컸던 빌라누프 궁전. 이 궁전의 용도를 생각하면, 오히려 베르사유 궁전만큼 크지 않게 설계한 것이 얀 3세로서는 나았을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빌라누프 궁전은 휴식을 위한 그와 그의 아내의 별궁이지, 국가 운영의 심장부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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