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쳉스토호바 시청사 박물관>, 순례 이미지 밖의 근대화의 흔적
이 두 가지 용어가 한 주제에 공존할 수 있다면 믿겠는가? 맞다. 사실 이상할 건 없다. 성지순례자들이 많은 도시라도 얼마든지 산업화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다. 다만 둘을 같은 선상에 두려는 시도 자체가 낯설 뿐이다.
그 부분이 바로 투리가 말하고 싶은 내용이다. 대다수의 한국인은 폴란드의 쳉스토호바가 어떤 도시인지도 모르지만, 그나마 아는 사람들도 야스나 고라 수도원에만 관심을 가진다. 투리가 이 말을 계속 강조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본인은 지금 야스나 고라만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도시 그 자체를 다루고 싶은 것이다. 수도원은 수도원이고, 이 도시도 이 도시대로 지금의 쳉스토호바가 되기까지의 서사가 있다. 이것을 조금이나마 알리기 위해 투리가 의식해서 계속 쳉스토호바에 관한 기행글을 쓰는 것이다.
.....라는 말은 사실 좋은 명분이고. 투리 본인이 이만큼 쳉스토호바를 많이 돌아다녔는데, 이걸 그냥 갤러리 안에 조용히 묻히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 더군다나 포털 사이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사진들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그만큼 남들은 못 가본 희소성 있는 곳들도 보여주는 기행글이 투리의 글이니, 이 글의 알고리즘에 선택받은 여러분은 자랑스러워하시길 바란다.
아무튼 이번 글의 주제는 쳉스토호바라는 도시 자체를 다룬 박물관! 한때 근대 시대에는 시청사였던 건물이 지금은 도시의 전체적인 기록과 흔적을 담은 전시관으로 변모했다는데.....과연 그 안에는 어떤 것들이 숨어 있을까? 한국인들 중에서는 오직 투리만(아마?)이 가진 그 자료들, 지금 여기서 개봉박두다!
쳉스토호바 거리의 중앙 한복판.
중앙 광장에서 야스나 고라까지 쭉 걸어가면, 위 사진과 같이 위쪽이 원기둥 모양인 붉은 건물이 눈에 띈다. 그것도 정확히 사거리에 해당하는 중앙에서 말이다. 고전주의(클래식) 양식의 단정한 외관이 특징인 이 건물은 19세기 초(1828년경)에 건축된 舊 시청사. 예전 시청사 글과 달리 흔적만 남은 건물이 아니라 진짜로 형태가 온존한 진짜 시청사 출신의 건물이다. 이렇게 튀는 건물인데, 투리 본인이 여기를 지나칠 수 위인이겠는가. 당연히 무엇이 있는지 궁금한지라 안에 들어가 보았다.
확인해 보니 이 박물관의 정식 명칭은 '쳉스토호바 시청사 박물관(Muzeum Częstochowskie – Ratusz Miejski)'. 현재는 쳉스토호바의 역사와 정체성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들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보통 성지가 있는 도시 하면 전체적으로 신앙심이 넘칠 것 같은 그런 막연한 느낌이지만, 이 박물관은 세속 도시로서의 쳉스토호바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확실히 이전에 들렀던 장소들과 달리 근대 시대를 엿볼 수 있는 사진들이 이곳에는 많이 담겨 있었다. 전체적으로 따지면 이 박물관은 고대사부터 근대사까지 도시의 전체적인 흐름을 소개하고 있기에 그 내용만 중점적으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사진이라도 볼 수 있는 게 어디인가. 어쨌든 한 번 전체적으로 빠르게 빠르게 훑어보도록 하자. 여기는 투리 기억상 입장료도 나름 합리적이었다.
지구상 존재하는 지역 어디든 해당하는 말이겠지만 시작은 역시 구석기 시대부터다. 대략 50만 년 전부터 1만 2천 년 전까지의 기간에 해당되는 이 시기는 폴란드 땅에 인류가 정착한 시기이다. 적어도 20만 년 전 크라쿠프와 쳉스토호바 고지대에는 네안데르탈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소규모로 단체를 이루며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우리의 직접적인 조상이 이 폴란드 땅을 지배한 시기는 4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이 사라진 이후이다. 12000~14000년 전, 빙상이 북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툰드라 환경이 도래하고, 이에 따라 순록 무리가 증가하면서 인류는 사냥을 왕성하게 함과 동시에 유목 생활을 이어갔다.
그다음은 기원전 9700년에서 5400년 사이의 기간, 중석기 시대. 아무래도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 사이에 있었던 과도기적인 기간을 말하는 것 같다. 땅은 툰드라 생태계를 넘어 숲이 점점 울창해졌고, 사람들은 강 근처의 사구에 정착해 어업과 낚시를 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다가 기원전 5400년에서 2300년 사이의 신석기 시대가 찾아오고, 이때부터 인류는 다뉴브 강 일대에 가축과 경작을 하면서 지역과 국가라는 개념을 형성한다.
역사책에서 한 번쯤은 본 석기 도구들이나 토기 그릇들이 바로 이 시기에 등장한 유물들이다. 이 두 기간을 아우르는 전시관도 사진들을 통해 빠르게 살펴보자. 그래봤자 토기 사진들밖에 못 찍은 것 같다만.
이것이 선사 시대 때 유물들의 모습이다. 다음으로 쳉스토호바가 도시의 구색을 갖추기 시작하는 중세 시대로 넘어가 보자.
쳉스토호바가 어떻게 도시의 구색을 갖추게 되었는지는 이전의 글들에서 충분히 설명했으므로 여기서는 투리가 찍은 사진들 위주로 얘기해 보도록 하자. 위 사진의 투구와 방패는 15세기의 리투아니아 기사가 쓰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속에서 보이는 문장(紋章)은 벨스코 지역의 코파 가문의 문장이다. 이 박물관에서 리투아니아 것이 나온 이유는 당시의 폴란드가 리투아니아와 연합국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위 사진 속의 유물들은 당시의 체코를 다스리던 두 역대 왕의 화폐들. 두 왕은 각각 룩셈부르크를 다스렸던 찰스 1세(재위 1346~1378)와 바츨라프 4세(재위 1378~1419)였다. 14세기에서 15세기 것들로 추정되는 이 유물 파편들은 쳉스토호바의 구시가지에서 발굴되었다. 아마 찰스 1세가 집권했을 당시에 보혜미아 왕가가 폴란드를 잠시 지배했던 적이 있었기에 이런 유물들이 나왔던 것이 아닐까 싶다.
쳉스토호바가 도시로서의 모습으로 발돋움하게 한 데에는 카지미에시 3세의 역할이 컸다. 위 사진의 문서는 카지미에시 왕이 크셰피체(Krzepice)에서 발급한 문서인데, 그는 바르타 강 오른쪽 기슭에 위치한 올슈틴(Olsztyn, 투리가 이전에 잠깐 언급한 그 북동부의 소도시 올슈틴과는 별개) 성과 강 왼쪽 기슭의 크셰피체 방면 지역을 연결할 도시를 세우기 원했다. 이는 단순히 바르타 강 양쪽 지역 간의 원활한 소통뿐만 아니라 크라쿠프와 실레지아를 연결하는 도로를 조직하기 위해서도 중요했다. 그렇기에 왕은 그 목적을 이룰 도시로 쳉스토호바를 선택한 것이다.
쳉스토호바 마을은 독일법에 따라 1356년에 설립되었다고 한다. 이 말은 즉 그전에는 이곳이 사람이 잘 살지 않던 부지였음을 암시한다. 그렇기에 해당 지역이 어엿한 도시가 되려면 정기적인 거리 계획을 잘 세우고, 개별 건물의 위치나 시장 광장의 규모, 본당 교회의 위치 등을 사전에 정하는 과정이 필수였다. 이 점으로 미루어 보아 카지미에시 3세 왕은 이 도시를 즉흥적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의 노력이 드디어 빛을 발한 것인가. 쳉스토호바는 16세기와 17세기에 경제적 번영의 시기를 맞게 된다. 쳉스토호바는 이제 중요한 경제 중심지로 기능했으며, 주로 식품 관련 수공업의 발전과 금속 산업 지역에서의 교역 중심지 역할을 통해 그 입지를 다졌다. 당시 체스토호바 인구의 절반 이상은 산업적 성격의 수공업계에 종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에도 많은 시민들이 바르타(Warta) 강과 그 수많은 지류에서 어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그렇게 보다 보니 벌써 다음 전시관으로. 이제부터는 18세기 이후의 배경과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되기 시작하는데, 그 내용들과 함께 전시된 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1717년 1월 30일, 국왕 아우구스트 2세(강건왕)는 체스토호프카(Częstochówka)라는 도시를 설립할 수 있는 특권을 공식적으로 부여한다. 신(新) 체스토호바(New Częstochowa)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야스나 고라 소유의 토지에 건설되었다. 그리고 이에 맞추어 9월 8일에 기적의 성화(Miraculous Painting)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이후 1752년, 야스나 고라 원장의 요청에 따라 국왕 아우구스트 3세는 신 체스토호바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입지 특권을 다시 발급해 수공업 활동을 허가하고,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에 시장을 열 수 있도록 하며, 연례 장터 개최 권한도 부여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기에는 가톨릭 신앙과 도시 길드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이 당시에는 수공업자 길드들이 많이 있었고, 그중 일부 잔이나 램프들은 교회 의식을 위해 사용되었다.
이 물건은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 문화의 산유물과도 같은 허리띠! 이 허리띠를 착용한 인물은 Karol Stanisław Radziwiłł로, 가장 부유한 귀족 가문 중 하나인 라지비우 가문의 인물이었다. 이 당시의 귀족들은 국가의 주권을 수호와 함께 가톨릭 신자들과 자신들의 기존 특권 유지를 위해 바르 연맹(The Bar Confederation)을 결성했다. 이 연맹을 지지했던 귀족들은 가톨릭 신앙을 강조하며 전통 귀족 복장의 착용을 주장했다고 한다.
위의 문서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1791년 5월 3일에 공식적으로 지정한 헌법을 기리는 100주년 기념판! 이 헌법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모르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겠지만, 놀랍게도 이 헌법은 유럽 최초의 근대적 성문헌법이자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두 번째로 제정된 근대 헌법에 속한다. 당시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외세(러시아, 프로이센)의 정치 개입과 귀족들의 권력 남용으로 국가 기능이 마비된 상태에 있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연방은 새 헌법을 만들어 제도를 개선하려 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헌법은 러시아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폴란드의 분할로 이어지게 된다.
슬슬 이 박물관의 끝이 보인다. 지금 들어갈 전시관은 근대 전시관이다. 어찌 보면 쳉스토호바의 산업적인 면을 가장 직관적으로 볼 수 있는 곳일지도 모르는 이곳. 빠르게 훑어볼까?
근대사에 다다르면서 여러 나라들에 의해 분할된 폴란드는 처음에는 쳉스토호바를 잠시 프로이센에 넘긴다. 그러다가 1815년 빈 회의 이후 러시아 지배 하의 폴란드 왕국에 편입되고 만다. 이때 쳉스토호바는 철도 개통, 금속과 유리, 기계 공업의 발전을 통해 공업 도시로 급성장하게 된다. 그러면서 인구 역시 크게 증가하고 유대인 상인과 장인 공동체도 이에 힘입어 함께 성장한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폴란드인들은 알렉산드르 1세의 통치 방식에 반감을 가진다. 빈 회의 이후 폴란드에 비교적 자유주의적 헌법을 허용한 왕은 폴란드인들에게 어느 정도 기대를 받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러시아의 통제가 강화되고 군사적 억압이 심화되면서 불만을 품는다. 그 결과 일어난 봉기가 1830년에 일어난 11월 봉기이다.
그 이후 폴란드는 1918년 힘겹게 독립을 달성하면서 쳉스토호바를 다시 폴란드의 품으로 돌아오게 한다. 공업 재건과 도시 행정 정비가 발 빠르게 진행되었고, 동시에 가톨릭 순례 중심지로서의 위상 강화도 꾀했다.
투리의 글을 이미 오랫동안 보신 분들은 그 뒤 역사가 어떤 식으로 흘러갔는지 이미 눈치채셨을 것이다. 1939년 나치 독일의 침공으로 쳉스토호바 역시 독일에 점령당하고, 유대인 공동체도 사라진다. 그 뒤에는 소련의 영향 아래 공산 폴란드에 편입된다. 여기에서 쳉스토호바는 사회주의식 도시의 확장을 따르지만, 동시에 야스나 고라 수도원의 영향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가톨릭의 저항 상징으로도 남게 된다.
이렇게 해서 폴란드의 역사와 관련된 쳉스토호바의 여러 가지 역사적 흔적들을 전체적으로 훑어보았다. 계속 전시관 안에만 있으면 머리가 아프니, 조금 분위기 환기를 해볼까?
짜잔! 위의 사진들이 박물관 위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쳉스토호바 광장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어떤가? 평범하면서도 어딘가 평화로워 보이는 전형적인 유럽의 소도시 풍경. 이것이 바로 쳉스토호바의 소소한 매력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이상이 '쳉스토호바 시청사 박물관'이 담아내고 있었던 도시 쳉스토호바의 일대기였다! 남들은 수도원만을 바라봤지만, 투리는 다르다. 수도원? 맞아, 너도 관심 없는 건 아니야. 하지만 투리 본인이 관심 있는 건 쳉스토호바, 바로 그대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