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IN 박물관>, 폴란드에 정착한 유대인의 애환을 담은 박물관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이 주택 마련을 위해 유대인 은행가로부터 대출을 받는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는 사람? 한국에는 유대인이 많지 않아 생소한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미국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라고 한다. 크래그 힐의 '96%의 사람들이 모르는 다섯 가지 부의 비결'에 따르면 작가의 친구 얼 피츠가 유대인 회계사와 부자에 관한 대화를 한 내용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회계사가 유대인 부자가 많은 개인적인 이유를 밝히는 부분이 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기독교인은 신약에서 언급하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해 구약의 재정 율법을 철저히 지킬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것 같다고 한다. 반면 유대인은 율법의 원리를 철저히 지키기 때문에 재정적 원리를 자연스럽게 실천한다고 한다. 위의 예화와 같이 유대인들의 높은 교육 수준과 상업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는 그들이 오랜 기간 부유하고 강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하나의 배경으로 보인다.
그런데 갑자기 유대인 얘기를 왜 하냐고? 이미 눈치챘겠지만, 그 유대인이 투리가 말하려는 '크게 성장한 민족'이기 때문이다. 특히 유대인의 인구와 영향력이 가장 컸던 때는 폴란드에서만 300만 명에 달했을 정도로, 미국 다음으로 큰 숫자였다고 한다. 앞의 글을 읽으신 분들은 그 숫자가 얼마나 큰지 홀로코스트의 희생자 수를 통해 알려준 예시를 기억하실 것이다. 이번 예화에서는 숫자보다는 한때 유럽에서 전성기를 구가했던 유대인의 마음가짐과 성장배경을 강조하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POLIN 박물관'에서 유대인이 잘 나가던 시절, 네 번째부터 여섯 번째 전시관까지에 관한 내용과 투리의 감상을 알리도록 하겠다!
이 글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전시관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후반부 시대의 유대인 마을 부분! 당시 유대인들은 '슈테틀(Shtetl)'이라는 마을에서 독자적인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고 하는데, 해당 전시관에서는 그런 유대인들의 문화와 일상을 소개하고 있었다. 위 사진을 보면 전시관에서 시작되는 시기가 1648년부터인데, 슬프게도 그 지점이 유대인들에게 영 안 좋은 해이다. 우크라이나의 카자크 지도자인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봉기를 일으켜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기 때문이다. 당시 폴란드 출신 귀족과의 분쟁으로 자포리자 카자크의 요새로 도망친 흐멜니츠키는 카자크들과 함께 무장 반란을 일으켜 폴란드 군대를 수차례 격파했다. 그들은 8월 17일에 자치권을 인정받기는 하지만, 결국 그가 지원한 크림 타타르족의 배신으로 인해 전투에서 패배하는 결말을 맞는다.
농민, 도시민, 성직자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은 흐멜나츠키의 격파 대상은 주로 상류 계층인 귀족들이었다. 그랬던 그들이 청지기나 세금 징수인 같이 귀족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 유대인들을 좋게 볼 리 없었다. 코사크와 농민군은 유대인 역시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짓밟았다. 수많은 유대인 공동체들은 파괴를 당했고, 대규모 학살로 인해 유대인은 큰 타격을 입었다.
깊은 충격과 상실을 경험한 유대인들은 하루빨리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파괴된 마을을 다시 세우고, 이전의 상업과 무역 경험을 살려 경제적 기반을 다시 일으켜세웠다. 그들은 교육적으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교육기관을 확립시키면서 유대인은 탈무드나 성서 공부에 박차를 가했고, 이를 통해 신앙과 학문을 꽃피우면서 그들의 시련을 극복해내려고 노력했다.
공부 얘기가 나온 겸 전시관에서 봤던 책 하나만 소개하자면, 위의 책은 성경 구절들에 대한 번역과 작가의 논평을 실은 책이라고 한다. 책의 제목 'Tsene-rene'는 구약성경 아가서 3장 11절 '시온의 딸들아 나와서 솔로몬 왕을 보라'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는데, 이 책은 거의 여성들의 성경처럼 주일과 안식일에 쓰였다. 한편 그들은 '카할(Kahal)'이라는 자치기구 제도를 만들어서 방금 전에 설명한 교육적이고 종교적인 내용들을 재정비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종교란 신앙을 통해 찾을 수 있는 일종의 위안과도 같았던 것이다. 물론 그 봉기가 있기 전에도 유대교는 위안을 넘어 삶의 양식 그 자체였지만 말이다.
아, 그리고 이 박물관에 온 이상 이 사진을 빼먹을 수 없지. 위의 건축물은 해당 박물관의 하이라이트와도 같은 전시물로, 우크라이나의 목조 회당을 실물 크기로 복원해 놓은 회당이다. 직접 보면 화려한 색채와 상징적 동물·식물 무늬들을 살펴볼 수 있는데, 지금 어두운 조명의 사진으로만 봐도 꽤 화려해 보인다. 애초에 유대인의 예술은 항상 절제된 형태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회당을 보니 그 편견이 깨졌다.
내용을 자세히 보니 탈무드 이야기에 기반해 만들어진 그림도 있었다. 간략히 말하면 해당 그림은 레비아탄이라는 전설의 괴물이 예루살렘 주위를 휘감은 그림인데, 탈무드에 따르면 메시야가 도래할 때 예루살렘은 다시 지어지고 레비아탄은 베히모스와 싸운다고 한다. 사진에 자세한 설명이 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오른쪽 아래의 영어 번역문을 읽으면 좋을 듯 하다.
그 외에도 전시관에는 유대인들이 당시 어떻게 살았는지 생활 양식들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많이 남아있다. 궁금하신 분들이 계시다면 직접 가서 확인해 주시길 바란다! 이제부터는 다섯 번째 전시관을 살펴보자.
이제부터는 서서히 근대 시대로 넘어가는 단계! 위 사진의 인물들은 왼쪽부터 각각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지배자인데, 이때쯤 폴란드는 여러 나라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버린다. 150년가량 폴란드라는 국가 자체가 없어진 시대가 바로 위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거주하던 국가 자체가 없어졌으니, 당연히 이에 따라 유대인들도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 한때 같은 제도 안에 있었던 그들은 각각 다른 체제와 법 아래에 놓이게 된 것이다.
여러분이 만일 세 국가들 중 하나로 이동해야 한다면, 어디로 이동하겠는가? 투리가 저 당시의 유대인이었다면 본인은 오스트리아를 선택할 것 같다. 유대인들이 폴란드 쪽으로 온 이유가 서유럽에서 살기 힘들어서였는데, 다시 서쪽의 프로이센에 돌아가고 싶을까? 실제로 프로이센은 능력이 되지 않는 유대인은 엄격히 입국을 통제했다고 한다. 러시아도 마찬가지로 유대인 구역을 따로 만들어서 엄청난 제한을 가했으니, 그나마 자유로운 오스트리아로 가는 게 최선의 선택일 것 같다. 물론 어딜 가든 눈에 보이는 차별이 있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이 당시 유럽 유대인들 사이에는 계몽주의와 함께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한 많은 논쟁이 일어났다.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은 '하스칼라(Haskalah)'라는 계몽 운동이다. 이들은 일종의 민족주의적 운동인 시온주의의 씨앗을 뿌림과 동시에 그들의 거주하는 국가로의 문화적 동화를 장려했다. 현대 기독교 CCM이 시대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듯, 그들도 현지의 문화와 교육에 적응하면서 기존 국가들과의 경제적, 문화적으로 통합되어 갔다.
이 전시관에는 '의인'이라는 뜻을 가진 치딕(Tsadik)이라는 존재가 계승되는 그림을 담은 방도 있었다. 저 치딕은 하시딤이라는 종교 모임에서 해당 그룹의 영적 지도자와도 같으며, 하나님의 유익함을 흐르게 하는 통로 역할을 감당하는 자라고 한다. 그들은 미래 세대에게 본인들이 배운 것을 전수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그 지위가 선생님에서 일반 제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버지에서 아들에게로 계승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다섯 번째 전시관에 대해서도 간략히 둘러봤고, 다음은 20세기 초의 유대인 전시관이다.
배경이 되는 시대는 폴란드가 다시 독립하는 1918년부터 홀로코스트 직전까지. 유대인은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서 외부인 취급을 받았지만, 그들은 다시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번성했다. 몇 백년 전의 상처를 딛고, 그들은 이전의 전성기를 되찾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구가 300만 명으로 폭증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디아스포라를 통해 생긴 곳들 중 하나가 구독자 여러분도 익히 아는 '카지미에시 지구'이다.
유대인의 인구가 갑자기 이렇게 늘어난 데는 러시아 제국의 갑작스런 강제 이민이 있기도 했지만, 자연 출산율 자체가 타 유럽 민족들에 비해 높은 것도 있었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유대인의 수는 100만 명에 달했다. 이전 글에 나왔던 시대의 인구 수에 비하면 상당히 많아진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초가 되었을 때 유대인의 수는 무려 330만 명(1939년 기준)이었다. 비교적 유대인에게 친근했던 이민 국가였다는 점에 그들의 높은 번식력(?)까지 더하니, 그들의 분포가 폴란드의 전체 인구의 최대 10%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무엇이 가장 먼저 달라졌나고 물으면, 인구에 대한 교육을 빼놓을 수 없겠지? 기존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자라온 유대인 학생들은 근대 시대에 맞춘 최신식 교육에 익숙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정통파 교육자들은 유대인의 생활양식과 근대 필수 교육을 모두 갖춘 학교들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해당 전시관을 보면 학교 교실을 재현한 코너, 그들이 공부한 자료들에 관한 것도 전시되어 있을 것이다. 다른 관광지에서 봤던 것 같은데, 당시에 체육 단체나 청년 운동이 신설되어 그에 관한 많은 사료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투리 같은 경우는 특히 루블린이나 오시비엥침에서 그런 흔적들을 많이 봤었는데, 딱 신사나 숙녀 차림의 모던한 의상을 입은 유대인들의 사진은 정말로 품위가 있어 보였다. 뭐랄까, 흑백 영화 속 주인공의 가족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필자 흑투리나 유한열이 정장을 입었을 때와는 풍기는 아우라가 전혀 다르다. 인종이나 문화 양식이 크게 차이가 나서 그런 게 아닐까 싶긴 하다만.
유대인들의 낭만은 교육이나 복장에서만 끝이 아니다. 도시와 문화 역시 황금기를 맞이할 정도로 많은 것이 변했다. 바르샤바나 빌뉴스(리투아니아의 수도) 같은 대도시에 인구가 집중됨에 따라 연극이나 영화, 음악과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유대인의 문화가 싹텄다. 도시에는 유대인을 위한 이리디시어 극장 포스터, 영화 자료, 대중문화 잡지 등이 여기저기에 퍼졌고, 관련 출판물들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위의 사진을 보면 바르샤바의 유명 카페에 모인 작가, 배우, 시인, 예술가 등을 묘사한 그림이 벽에 비추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마조비에츠카 거리(Mazowiecka Street)를 자주 오가던 작가, 배우, 예술가들에게 카페 마와 지에먀인스카(Café Mała Ziemiańska)는 작은 커피 한 잔 즐기기에 완벽한 장소였다. 어떤 문학 그룹은 아예 이 카페의 2층에 특별히 예약된 테이블을 가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들이 나눈 지적 대화는 빠르게 퍼져나가 바르샤바 전역에 돌아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듣자하니, 근대 시대 서유럽에는 학자들끼리 여러 담론을 나누었던 '커피하우스'라는 게 있었다고 한다. 지금 언급한 카페를 보면 약간 유대인 버전의 커피하우스를 보는 것 같다.
위 사진은 세계 1차 대전 이후의 연극 포스터이다. 극장가는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엄청 많았는데, 당시 출연한 배우와 예술가들 중에는 유대인과 유럽인 모두가 있었다고 한다. 특히 1920년 바르샤바에서 상영된 'The Dybbuk(악령)'이라는 연극은 아주 대박을 쳐셔, 한때는 세 달 동안 300번이나 상영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러시아 유대인이 만든 해당 연극은 얼마나 유명했는지, 그 작품은 유럽과 미국으로도 퍼져나갔다고 전해진다.
아쉽게도 시간이 없어서 홀로코스트 이후의 부분을 둘러보지는 못했지만, 이 박물관을 통해 투리는 처음으로 유럽을 활보(?)했던 유대인들의 역사를 깊이 마주할 수 있어서 인상 깊었다. 나치 독일의 집권 시절 이후까지 다루면 더욱 좋았겠지만, 사실 홀로코스트 이후에 관한 내용은 투리도 참 많이 봐서 여기에서마저 그 부분을 언급한다면 나중 글에서 금방 질릴지도 모른다. 투리에게 이 관광지의 진짜 중요한 부분은 폴란드와 중부, 동부 유럽에서 살아왔던 유대인의 전체적인 역사였다. 왜냐하면 이렇게 포괄적으로 유대인을 역사적으로 다룬 곳은 해당 관광지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이후의 전시관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가셔서 감상하시면 좋을 듯 하다. 분명히 그 안에도 충분히 많은 내용이 담겨 있을 테니 말이다. 아무쪼록 이번 글을 통해 투리가 유대인에 대한 내용을 독자 여러분들에게 잘 전달시켰는지 모르겠다. 내용을 정리해 보면, 유대인은 자신들만의 룰을 통해 홀로코스트 이전까지 부흥을 이룰 수 있었다. 유럽의 교회들은 상공업을 천히 여기는 경향이 있었고 지금도 미국과 한국교회에 그런 시선이 약간 남아있는 듯 하다. 주식이나 비트코인 얘기만 하면 치를 떠는 교회의 성도들이 있는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교역과 무역, 상업에 발을 디뎠고 그 결과 엄청난 부를 얻었다. 그 결과 많은 유럽인들의 멸시를 받기는 했지만 말이다.
지금도 보면 홀로코스트로 인해 많은 유대인이 희생당했음에도 그들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로스차일드(Rothschild) 가문, 골드만삭스와 JP모건 등의 투자은행, 헤지펀드를 만든 조지 소로스(George Soros)나 노벨상 수상자의 20%를 차지한 역대 유대인들...토라(구약성서)에 기반한 생활양식을 둔 유대인들은 지금도 눈부신 성취를 보이고 있다(민족별 IQ 순위도 전세계 2등으로 한국인 다음으로 높다는 밈도 돌아다니고 말이다). 그 쉽지 않은 성서를 몸에 새기면서 유대인들은 기초 문해력도 높이고 재정적 관리에도 탁월한 능력을 갖출 수 있던 게 아닐까 싶다.
물론 본인이 한국 동지 여러분들께 당장 안 읽던 구약성경을 완독하고 유대인들처럼 살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다만 그들의 철저한 교육환경을 보면서, 우리도 그들에게서 분명히 배워야 하는 지점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바이다. 유럽인들의 끊임없는 박해에도 계속 살아남아 그 능력을 뽐내는 불굴의 민족, 유대인. 그런 그들의 모습을 통해, 신약성경 속 한 므나를 열 므나로 불려 주인에게 칭찬받은 한 종(누가복음 19:11~17)을 되새겨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