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샤바 기행] 유대인의 눈물 나는 폴란드 정착기

<POLIN 박물관>, 폴란드에 정착한 유대인의 애환을 담은 박물관

by 흑투리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의 죽음은 통계다."



튀는 제목을 보고 호기심에 이끌려 들어오자마자 독자들 앞에 나타난 이 섬뜩한 문장. 혹시 들어본 적 있는 독자 분들? 정답은 그 무시무시한 소련의 독재자로 유명한 이오시프 스탈린의 말이다. 살면서 특정 사회 그룹이나 공동체에 소속되다 보면 새삼 한 명의 영향력이 크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데 백만이라니, 상상이 되는가? 그쯤 되면 누군가의 빈자리를 느끼는 걸 넘어 아예 와닿지가 않을 것 같다.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뭐냐. 이번에 투리가 언급할 유대인 박물관의 배경 속 무서운 비밀이 하나 숨겨졌기 때문이다. 현재 유럽에서 가장 유대인이 많은 유럽 국가가 몇 명 정도 될까? 21세기 초 기준 유대인 인구 1위 국가는 프랑스로, 어림잡아 45만에서 50만 명 정도 된다. 그런데 불과 100년 조금 안 되었던 시절만 해도, 유대인이 가장 많았던 국가는 폴란드300만 명을 넘는 숫자를 가졌다. 지금 폴란드에 거주하는 유대인은 약 1만 명에 그친다.



KakaoTalk_20250831_145214661.jpg ESN 위원회에서 공지한 박물관 트립.



그 많던 유대인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렇다. 거의 모두 나치 수용소로 향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홀로코스트에 희생되었다. 그 수는 거의 300만을 육박할 정도인데, 다시 말하지만 사상자 숫자가 300만이라는 게 아니다. 사망한 사람들300만이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양측의 사상자가 모두 합해 100만이라고 한다. 사상자가 100만 명이라는 말만 들어도 너무나도 끔찍하고 마음이 아픈데, 사망자가 300만이라니. 이건 통계를 넘어 말살이다.



20250327_155035.jpg POLIN 박물관 정면.



아무튼 한때 그렇게 엄청난 인구를 차지했던 유대인은 홀로코스트 전까지 유럽 국가들 중 가장 활동이 자유로웠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에 거주하며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갔다. 그래서 폴란드나 동유럽을 가면 유대인에 관한 상당히 많은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르샤바의 '폴란드 유대인 역사박물관(POLIN 박물관)'이 그 자취를 엿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장소이다! 과연 그 수많은 유대인들은 어쩌다가 폴란드를 삶의 터전으로 잡은 걸까? 그 비밀이 담겨 있는 이 POLIN 박물관을, 투리는 ESN 친구들과 함께 감상하기로 했다.



20250327_155942.jpg 박물관 매표소와 메인 홀 사진.



아무래도 동기들과 같이 가다 보니 생긴 문제점이 하나 있었는데, 이번 관광지는 투리가 시간 이슈로 끝까지 관람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못 본 부분은 홀로코스트 이후의 역사 전시관이라서, 해당 내용은 설명하기에 더욱 어울리는 관광지들 편에서 다룰 수 있다! 따라서 이번 글은 폴란드를 돌아다녔던 유대인들의 천 년 역사를 홀로코스트 이전 내용까지 전체적으로 훑어보도록 하겠다.



20250327_160434.jpg 전시관 쪽을 내려가자마자 가장 먼저 마주한 장소



표를 사고 아래로 내려가자마자, 웬 자연 휴양림 분위기를 풍기는 스크린이 전시관 앞쪽에 여러 개 설치되어 있었다. 사실 이 스크린의 의미는 관광객들한테 적당히 힐링하고 가라는 얘기가 아니라, 이 박물관의 진정한 시작을 의미하는 말이다.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중세 시대 때 서유럽에서 박해를 피해 이동하던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폴란드로 도망치라는 일종의 계시를 받는다. 이들이 지시를 따라 숲으로 이동할 즈음, 주변의 새들이 "Po-lin! Po-lin!"이라고 짖는 소리를 듣는다. 그들의 언어로 말하면 "가서 쉬어라!"라는 뜻과 유사한 발음이라는데, 저 소리가 곧 "폴란드"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연출한 것이 위 전시관의 시작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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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시작된 전시관은 중세 초기의 폴란드 땅. 위 사진들은 10세기경 유대인들이 폴란드 땅과 교류하게 된 초창기 배경을 설명하는 그림들이 담겨 있다. 당시 교역의 대상은 모피나 목재 같은 자연 자원들이었는데, 그 자원들을 가지고 뗏목을 통해 강을 건너면서 교역을 했나 보다. 오른쪽 사진을 자세히 보면 상인의 이동 경로가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는데, 프라하, 폴란드, 카자르 지역 등 여러 지역들을 왕성하게 이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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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의 교역 활동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료는 이브라힘 이븐 야쿠브(Ibrahim ibn Ya‘qub)라는 유대인 여행가의 보고서이다. 그는 이슬람 세계 출신의 유대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부와 동부 유럽을 탐험하면서 각 대륙의 문화나 풍습 등의 귀중한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어쨌거나 유대인들은 처음부터 유럽에 터를 잡은 게 아니라, 여러 나라들과의 교역 과정에서 유럽과 폴란드를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폴란드를 위시한 나라들은 유대인에게 있어 정착지보다는 교역의 대상 지역으로써의 의미가 더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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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당시 기독교 신앙은 유럽 전역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폴란드도 966년 미에스코 1세 공작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그 흐름에 합세하게 되는데, 이후 그니에즈노와 같은 도시들이 정치와 종교의 핵심 중심지로 성장한다.



이때 똑똑한 몇몇 독자 분들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참된 주로 영접하고 받아들이는 종교인데, 그런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자들이 유대인이다. 그러면 유럽인들은 유대인을 원수로 생각하고 그들을 핍박하지 않았을까? 얼핏 생각하면 그럴 것 같지만, 국익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고. 오히려 유대인들은 폴란드와 서유럽 사이의 중개자들로 활약해 왕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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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걸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내용이 위의 사진이다. 사진에는 왕의 모습이 담겨 있고, 그림 위에는 그리스도인이 유대인의 묘지를 훼손할 경우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저 문구는 유럽 군주가 유대인 공동체를 보호하겠다고 내린 칙령의 일부인데, 당시 왕이 저렇게 직접 유대인들을 보호 대상으로 지정하면서 그들의 권리와 안전을 보장하는 문서들을 발급해주었다고 한다.



저걸 전문 용어로 특권 헌장(Privilege Charter)라고 하는데, 저 문서 덕분에 유대인들은 왕으로부터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이미지는 주로 금융이나 세금 관리 쪽에 종사하는 느낌이 강하다. 그런 전문 인력들을 이용할 수 있다면, 투리라도 유대인들을 이용해먹지 않았을까? 물론 그들이 왕의 보호를 받았다는 말은 반대로 말하면 주변인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그들의 안전은 그저 왕과 나라의 이득을 담보로 얻은 것뿐이니.



20250327_161022.jpg 동전들 사진. 당시 화폐로 이용되었던 동전들의 그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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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크라쿠프와 포즈난의 그림 자료



본론으로 돌아가면, 저 당시까지만 해도 유대인들은 중부 유럽과 동유럽을 정착지라기보다는 교역의 무대로 여겼다. 그러다가 13세기쯤 폴란드에 독일의 법이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큰 변화가 일어나는데, 마그데부르크 법(Magdeburg Law)이라고도 불리는 해당 법은 유대인들의 거주와 상업 활동을 공식적으로 허락해 준다. 이 이후 폴란드 내의 여러 대표적인 도시들에 유대인의 집단 거주가 시작된다.



위의 사진들은 각각 크라쿠프와 포즈난의 그림들인데, 위 도시들 역시 독일의 법을 적용받은 대표적인 도시이다. 설명문에 따르면 포즈난 같은 경우는 1500년경 폴란드에서 가장 큰 유대인 공동체를 형성한 도시였다고 한다. 다만 그렇다고 유대인이 그 국가의 구성원으로 완벽하게 인정받은 것은 아니다. 길드에 참여할 권리와 시민권은 부여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유대인은 어디까지나 외부인으로 취급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0250327_161740.jpg 독일 법이 적용받은 뒤의 도시들의 그림



20250327_161809.jpg 크라쿠프에 있는 유대인 거주 지구.



보면 크라쿠프 역시 큰 유대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사실 크라쿠프에 있는 거주 지구가 폴란드에서 가장 큰 유대인 거주 지구인데, 그곳이 바로 '카지미에시 지구'이다. 카지미에시 지구에 관한 내용은 앞의 크라쿠프 기행글에서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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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폴란드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숫자는 점점 늘어났고, 15세기가 되었을 무렵에는 폴란드 내의 유대인 공동체가 14개에서 100개로 증가했다. 위의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당시에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연방을 이룬 형태였는데,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법이 유대인에게 비교적 유화적인 편이라 많은 유대인들이 독일 지역에서 이동해왔다고 한다. 큰 공동체 같은 경우는 유대인이 500명에서 800명 정도 거주하는 형태였으며, 폴란드에 사는 모든 유대인을 합하면 5000명이었다. 그래도 아직 이때까지는 인구가 그렇게 큰 편은 아닌 걸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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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왕의 특권 헌장과 마그데부르크 법의 영향력은 유대인에게는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이는 위 사진에서부터 시작하는 세 번째 전시관의 이름 'Paradisus ludaeorum'만 봐도 알 수 있는데, 해당 이름은 라틴어로 '유대인의 낙원'이라는 말이란다. 아까도 말했지만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그다지 호의적인 편이 아니다. 이런 관계로 유대인들은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상당한 박해를 받았는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그래도 그들에게 종교적 자유와 경제적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이렇다 보니 더욱 많은 유대인들이 들어오는 것은 결국에는 시간문제에 불과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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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당시 유대인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인생은 참으로 혹독했던 것 같다. 위의 사진들은 투리가 꽤나 인상 깊게 봤던 그림인데, 죽음이 사람들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나타내는 작품이었다. 그림을 보면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은 귀족과 성직자, 아이 등과는 춤을 추고 있지만, 유독 유대인에게만 고통을 선사하는 모습을 보인다. 가장 혹독한 인생을 보낸 사회적 계층은 유대인이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유대인은 상당수의 유럽 지역들에서 수많은 박해와 폭력을 견뎌내야 했다. 그나마 낙원의 땅이라고 불리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마저 유대인은 지역적인 차별은 물론이고, 제대로 된 시민권 하나 못 받으면서 외지인 취급을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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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만 아니라, 크림 타타르족의 침략과 폭동 역시 유대인들에게 큰 시련으로 다가왔다. 오스만 제국 쪽에 속한 타타르족은 지속적으로 폴란드 영지를 습격하여 여러 마을들을 약탈했으며, 여성과 아이를 잡아 오스만 제국에 보내는 일도 빈번히 일어났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체적으로 방비를 하거나 더 안전한 북부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위의 오른쪽 사진을 보면 거대한 성벽 같은 그림이 있는데, 저 그림은 사실 유대인들의 회당을 나타낸 것이다. 적들의 습격을 막아내기 위하여, 그들은 두꺼운 벽과 높고 작은 창문들로 회당을 설계했다. 만일 적들이 해당 지역을 공격할 시, 저 회당은 유대인 공동체의 방어 거점이자 피난처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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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유대인은 누구에게도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지만, 이들은 그 힘든 상황 속에서도 여러 성취들을 일구어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16세기의 인쇄술 기술이다. 이 인쇄술 기술은 유대인 공동체의 교육과 학문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전시관 중간에 이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투리도 한 번 종이를 대고 찍어보았는데, 도장 찍는 느낌과 상당히 유사했던 걸로 기억한다.



해당 기술을 처음 발명한 유대인은 크라쿠프의 Helicz 형제들(Szmuel, Aszer, Eljakim Helicz)로, 1534년에 인쇄소를 세운 뒤 첫 유대 문헌을 인쇄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후로 유대인들 사이에서 보이콧 운동이 일어났고, 얼마 안 가 1541년 인쇄소는 문을 닫고 만다. 그러다가 30년가량 뒤 Prostitz라는 사람이 다시 유대인을 위한 인쇄소를 열어 60년 넘게 인쇄소를 운영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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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인쇄술은 그들에게 사회적으로 굉장한 영향을 가져다주었다. 그들은 그들의 율법 지식을 더욱 광범위하게 전승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공동체 내의 연대와 연결망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위 사진은 탈무드를 공부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나타낸 그림인데, 실제로도 그들은 문서를 통해 보다 향상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15세기 중반까지의 유대인들이 폴란드에 정착하게 된 전체적인 과정을 박물관의 내부와 함께 간단히 소개해 보았다! 내용이 길어진 관계로 유대인이 백만 단위로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 과정은 뒤의 글에서 서술하겠지만, 유럽에 있던 유대인들이 초반에 폴란드로 이주한 계기는 독자 분들이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라 믿는다.



어느 한 곳에도 제대로 정착하지 못했던 유대인들의 눈물겨운 인생. 우리는 유럽에 있었던 유대인을 떠올리면 '홀로코스트'라는 비극만을 떠올리기 쉽지만, 그만큼 그들이 유럽에 오랫동안 미친 영향을 간과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통해 유대인에 대해 가졌던 막연한 느낌이 조금 구체화되었기를 바라며, 오늘의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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