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오트르코프스카 거리>, 산업과 예술의 향연이 모두 담긴 곳
4월 중순이었다. 필자 본인이 학교 기숙사에서 여행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같은 한국인 동기가 이런 질문을 했다.
"지금까지 폴란드 어디어디 다녀오셨나요?"
바르샤바를 제외하면 당시 투리가 다녀왔던 곳은 네 군데. 브로츠와프, 크라쿠프, 우치, 그리고 루블린이었다. 가감 없이 딱 얘기를 하니까, 그 동기가 대답을 듣고는 또 이렇게 물어봤다.
"그러면 그 도시들 중에 저 같은 관광객들한테 추천 도시로 순위 한 번 매겨주세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나요?"
폴란드를 좀 아시는 분들이라면 폴란드 최대의 관광도시 크라쿠프를 모를 수 없을 것이다. 브로츠와프 역시 규모 있는 도시로 좋은 관광지로 손꼽힌다. 루블린은 비록 소도시지만 옛 폴란드의 정서가 담긴 숨겨진 맛집 여행지로, 알 사람들은 아는 동네이다.
하지만 우치.....?
어디까지나 일반 관광객을 위한 추천 순위이다 보니, 슬프게도 우치는 뒷순위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우치, 우치라. 혹시나 지금 본인의 글을 읽고 계시는 분들 중에 '우치'라는 도시를 여행해 본 적 있는, 아니, '우치'가 어디 있는 도시인지라도 아는 분들 계신가? 아, 미안하다. 그전에 폴란드의 도시를 네 개 이상이라도 아는 분이 계시는지 물어볼 걸 그랬다. 하지만 원활한 진행 전개를 위해, 관광 책자나 판타지 소설에서 최소한 '바르샤바'나 '크라쿠프'라는 이름까지는 들어본 분들이라는 걸 전제를 하고 이야기를 하겠다. 물론 몰라도 투리의 말을 이해하는 데 큰 문제는 없지만 말이다.
선호 관광지 여부와 상관없이, 폴란드는 영토가 한반도보다 넓은 만큼 수많은 도시들이 있다. 그중 우치는 주요 도시들 중 바르샤바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에 속한다. 그런데 인터넷이나 친구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우치'라는 말이 나오면 꼭 하는 말이 있다.
"노잼 도시."
"할 거 없는 도시."
"거기를 왜 감?"
심지어 기숙사의 한국인 동기도 자기 버디인 마티에게 우치 여행 어떨 것 같냐고 물어보니까 "정말로 재미없을 것 같다"라고 한단다. 비유하자면 폴란드의 "인천" 느낌이랄까. 농담이 아닌 게, 바르샤바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무슨 경쟁심이라도 있는 건지, '우치'라는 말을 들으면 '노잼'이라는 말이 자동반사로 튀어나온다. 마치 서울 사람들이 '인천'이라는 말을 들으면 0.1초 만에 '마계'라는 말이 튀어나오듯이 말이다. 이런 편견이 있다 보니, 투리 본인도 우치 얘기를 할 때마다 난감해진다. 그나마 이것도 폴란드 사람이니까 얘기가 여기까지 통하는 거지, 보통 사람들은 우치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실정이다. 그 정도로 우치는 큰 도시치고 관광지로서의 인기가 없는 편이다.
물론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뒤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우치는 한동안 산업적인 기능이 강한 도시였다. 그러다 보니 관광객의 눈을 사로잡을 정도의 랜드마크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전체적인 분위기 역시 그 뭔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칙칙함 같은 게 있다. 이렇다 보니 안 그래도 다른 나라 돌아다니느라 바쁠 관광객들한테 선뜻 '우치'를 추천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폴란드를 여행하는 사람 입장에서 안 가기에도 그 규모와 영향력이 워낙 크다 보니, 투리 입장에서는 참 애매한 도시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투리에게 도시 '우치'란 여행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재미없는 곳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세월을 견뎌온 건물과 공장들의 감성 장면, 몇 세기 전의 활발했던 노동의 흔적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현지인들의 실제 현장들....어떤 의미에서 투리는 우치야말로 진솔한 폴란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비유하자면 이미 충분히 관계가 형성된 여자친구의 생얼을 보는 느낌이랄까? 독자 여러분의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면 여자친구의 민낯도 그 나름의 수수하고 솔직한 매력이 있지 않나? 그 우치의 매력을 알기에 투리가 이렇게까지 기행글을 쓰는 것이다.
자, 그러면 긴 서론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부터 투리가 3박 4일 동안 우치를 방문하면서 느꼈던 기행글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가볍게 유럽 여행을 즐기고 싶은 분들께 우치는 난이도가 높은 도시이기는 하지만, 숨겨진 관광지를 찾는 분들에게는 특유의 매력이 있는 곳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설령 독자 여러분이 이곳을 갈 생각이 없더라도, 이 글을 읽는다면 그대들은 그대들의 여친이나 남친 앞에서 꺼낼 매력적인 '지적(知的)' 포인트를 하나 더 얻고 갈 것이다!
이번에도 브로츠와프에 갔을 때처럼 바르샤바의 서쪽 버스 정류장에서 Flixbus를 이용한 투리. 사실 브로츠와프로 가는 길 중간에 우치를 지나치기 때문에 경로는 당시와 거의 차이가 없다. 그때도 우치에서 멈췄을 때 이 도시는 어떤 도시일까 호기심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진짜 우치에서 내리다 보니 뭔가 신기했다.
우치 중앙역에서 나오자마자 발견한 큰 대로와 여러 사진들. 거리 양쪽에 있는 모습을 딱 보니, 이 도시가 미적 감각에 관심이 많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현재의 우치는 예술과 영화 산업에 상당히 관심이 많은 도시이기도 하다. 유럽 연합에 가입한 이후 폴란드는 우치에 영화 산업을 거의 몰빵 했는데, 그 결과 폴란드 영화의 대부분이 우치 지역에서 촬영될 정도로 폴란드에 있어 명실상부한 영화산업도시로 부상하게 된다. 그 위상이 어느 정도냐면, 한국으로 따지면 영화의 전당에 해당하는 폴란드의 영화 박물관이 우치에 있을 정도이다. 투리도 그 박물관을 방문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맞지 않아 그곳을 들어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200년 전의 우치 사람들이 이 얘기를 들었다면, 아주 크게 경악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치는 원래 영화와는 하등 관련이 없는, 섬유 산업이 크게 발달한 공업 도시였기 때문이다. 원래 우치는 작은 마을에 불과했으나, 러시아 제국이 섬유 공장들을 세우면서 면직물과 섬유 산업을 크게 발달시켜 근대 시대에 바르샤바를 잇는 제2의 도시로 부상한다. 우치의 발전이 얼마나 컸는지, 한때 우치는 '폴란드의 맨체스터'라고 불릴 만큼 중부 유럽에서 산업 혁명을 이끄는 역할을 맡아왔다.
그러다 90년대 이후로 우치는 민주화가 찾아오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고, 여러 공장들이 문을 닫으면서 도시는 쇠퇴하고 말았다. 바로 그런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우치에 특유의 칙칙함이 남아 있던 것이다. 공장들이 문을 닫은 일이 생각보다 오래 전의 일이 아니라서, 아직 가동을 멈춘 공장이나 폐허를 모두 활용할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우치의 재도약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우치는 현재 창조 산업, 영화·영상 예술, IT 산업에 크게 집중하고 있으며, 여러 국제적 행사를 개최하는 등 기존의 침체된 모습에서 탈피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 결과 우치는 나름의 매력을 갖춘 성공적인 도시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우치의 눈부신 성공은 특히 영화 산업에서 드러난다. 우치에 있는 영화학교는 중부 유럽에 있는 최고의 영화 전문대학이 되었다고 하고, 다른 나라의 영화사들도 폴란드에서 영화를 촬영할 일이 있을 때 꼭 우치를 방문한다고 한다. 혹자는 이런 우치를 두고 폴란드의 '할리우드'라고 부른다고 한다.
실제로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그 흔적을 약간씩은 느낄 수 있었던 게, 가끔씩 피아노를 치는 사람과 같은 조각품이나 영화인들의 이름이 새겨진 길바닥을 볼 수 있었다. 투리는 외국 영화에 관심이 크게 없어서 그분들을 모두 알지는 못하지만, 구경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웠다.
아, 그래도 딱 한 명 아는 사람이 있다. 바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Arthur Rubinstein). 루빈스타인은 악보에 충실하면서 안정감 있는 연주를 선보인 근대사 최정상급 피아니스트로 평가받는데, 태어난 곳이 이곳 우치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도시에서도 정체성 홍보를 위해 위 사진과 같이 루빈스타인의 동상을 설치한 것 같다. 실제로도 이곳은 루빈스타인의 팬들에게 좋은 포토스폿이라고 한다.
위의 사진에 있는 두 분 같은 경우는 각각 폴란드 독립의 아버지, 폴란드 자유의 영웅이라고 불리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Klemens Piłsudski),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Andrzej Tadeusz Bonawentura Kościuszko)이다. 이 도시에는 단순히 예술가들만 있는 게 아니라, 저렇게 나라의 영웅들을 세운 동상도 찾을 수 있었다.
한동안 주변을 둘러보면서 한쪽으로 계속 걷다 보니, 투리는 어느새 광장의 중심으로 들어와 있었다. 아까 언급한 왼쪽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동상이 딱 그 중간에 있었는데, 찾아보니 그 광장이 '피오트르코프스카 거리'라는 길의 맨 끝 지점에 있었다.
피오트르코프스카 거리피오트르코프스카 거리피오트르코프스카 거리
피오토르코프스카 거리? 여기가 무슨 거리길래 그렇게 중요하다는 거지? 찾아보니, 피오트르코프스카 거리는 단순한 거리가 아니라, 폴란드에서 가장 긴 보행자 거리라고 한다. 약 4.2km 정도 되는 이 거리는 우치 시내 중심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곳으로 한때 19세기 산업도시 성장의 핵심축이었다고 한다. 현재 그 거리는 여러 상점들과 기념품 샵들이 모인 거리로 다양한 상점들이 거리의 양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음, 하지만 투리.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도 좋지만,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던지라 배가 고프다. 자세한 탐색은 뒤로 하고, 우선은 밥부터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유명하지 않은 도시라도, 유럽은 유럽이다. 폴란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을 찾아 들어갔는데, 안은 인스타충들이 좋아할 만한 감성이 아주 충만했다. 가격은 투리에게 좀 비쌌지만, 다른 레스토랑과 큰 차이는 없는 수준이었다. 기왕 여행으로 온 거라면 이 정도 소비는 해야 여행할 맛이 나지 않겠는가? 다만 항상 느끼는 거지만, 한 번 주문할 때마다 양이 많지 않은 게 아쉽기는 하다.
일단 점심은 클리어! 배도 어느 정도 채웠으니, 이제 다시 발걸음을 옮겨보자! 약간 달라진 하늘을 바라보면서, 투리는 한 번 거리를 끝까지 갔다 오기로 결심했다. 과연 우치의 거리는 다른 도시들과 어떻게 다른 걸까?
거리를 둘러보니, 유럽 티가 나는 건물들의 건축 양식뿐만 아니라 길가의 거리 공연과 벽보, 우치 특유의 장식들이 소소하면서도 독특한 매력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거리를 보면서 '왜 우치가 재미없는 도시라고 단정 짓는 걸까'하는 생각까지 들기도 했다.
아, 여기서 거리의 핵심 볼거리 한 군데 짚고 넘어가자! 해당 거리의 중심에는 'Off Piotrkowska Center'라는 곳이 존재했다. 이곳은 원래 19세기 섬유 산업 시대에 지어진 공장 단지였는데, 역시 공업 쇠퇴 후 방치되다가 문화와 창의 산업 공간으로 재탄생한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안에 들어가 보니 디자인 스튜디오나 아트 갤러리, 개성 있는 바와 카페 등 여러 재미있는 장소들이 있었다.
낮과 밤의 분위기를 대조하기 위해 밤에 찍은 사진도 함께 올렸는데, 화질이 조금 안 좋아 아쉬운 마음이다. 아무튼 이런 곳은 우치가 쇠퇴한 지역을 매력적으로 되살린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특별히 관광지로 강조되는 곳만 투리의 눈에 들어왔던 건 아니다. 위 사진을 보면 저렇게 트램이 기다리는 큰 공간이 있었는데, 누군가에게는 저 정류장이 평소 자주 지나갔던 평범한 장소로 여길지 몰라도 투리에게는 시각적으로 가장 맘에 들었던 곳이 저기였다. 뭐랄까, 진짜로 투리 본인이 영화의 한 장면 속에 있었던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저 트램이 지나다니는 곳일 뿐인데도 어째서 본인에게는 그렇게도 낭만적이었는지.
그렇게 긴 거리를 한 번 왕복하면서 성당이나 다른 장소들까지 구경하고 나니, 어느새 하늘은 많이 어두워져 있었다. 확실히 투리는 한 군데를 제대로 구경하다 보면 오래 있는 성격인 것 같다. 사진 위의 동상을 보다가 갑자기 다시 배가 고파진 투리. 아까 점심은 레스토랑에서 해결했으니, 저녁은 부득이하게 돈을 조금 아끼도록 하자.
고민 끝에 투리가 고른 장소는 맥도날드! 개인적으로 투리가 폴란드 맥도날드에 대해 마음이 드는 게 있다면, 서브 메뉴로 감자튀김 대신 샐러드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건강을 생각하는 양심은 요만큼은 있던 투리, 그날은 샐러드와 함께 베이컨버거를 주문하며 기나긴 하루를 마쳤다!
자, 지금까지 독자 여러분은 우치라는 도시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사진을 딱 보았을 때, 마냥 재미없고 지루한 도시처럼 느껴졌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으나, 투리는 이것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모르고 지나치는 대도시 우치, 그럼에도 그 특유의 매력은 남아 있다. 본인은 어지간하면 모든 여행지는 다 그 여행지만의 매력이 있다고 믿는다. 여러분도 가끔씩은 유명 여행지만을 고수하기보다는 본인의 맘에 드는 인생 여행지를 찾으러 떠나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