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 대극장>에서 난생처음으로 감상하는 외국 공연
투리 본인은 유럽여행을 좋아한다. 유럽에는 낭만이 있기 때문이다. 투리와 같은 육체적 나이대(어쩌다가 벌써 20대...)인 여자 지인들도 특히 유럽여행을 장기간 갔다 오는 경우가 많다. 그녀들도 대화를 하다 보면 유럽에 낭만을 많이 가지고 있어 보인다.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 여러분들! 여러분은 아마 교환학생/어학연수 꿈나무들이거나 유럽에 관심이 많은 분들, 혹은 순수히 여행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고 생각이 되는데(애초에 저 사람들 중에 없으면 투리의 글을 볼 이유가 없지 않나...),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유럽의 낭만은 무엇인가?
미술관? 공감한다. '유럽 자체가 박물관의 산실'이라고 말하는 여행책자가 있을 정도로 감성 넘치는 작품들이 많으니까. 경치? 맞는 말이다. 유서 깊은 건축 양식과 유럽 특유의 자연환경은 아시아에서는 볼 수 없는 감성의 그것과도 같으니까. 역사? 부인하지 않겠다. 비록 식민지 국가들의 피값이라는 이면이 존재하지만, 상당수 선진적인 국가 체제와 과학기술의 근원은 유럽에서 출발했으니까.
하지만 투리가 생각하는 낭만의 요소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게 있다. 바로 '문화 공연'이다. 우리가 아는 비발디의 '사계(四季)'나 베토벤의 '운명교향곡' 같은 순수 오케스트라 음악부터 발레, 오페라, 무곡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즐기는 공연들의 상당수는 그 맥이 유럽에서부터 시작한다. 유럽여행을 가면 클래식 공연 한 번 감상하고 오는 로망을 가진 사람은 아마 투리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투리는 주로 머물렀던 국가가 폴란드니, 본인은 대형 규모의 공연을 바르샤바에서 처음 가질 줄 알았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라고, 본인이 처음으로 공연을 감상한 곳은 뜻밖에도 우치였다. 그것도 대형 규모의 공연으로는 유일하게 말이다. 왜 하필이면 익숙하지도 않은 동네인 우치였나고? 너무 따지지 말아 달라. 느낌 따라가다 보니 그렇게 되어 버린 거니까. 그래도 우치에서 공연을 감상한 경위랑 소감 정도는 적당히 얘기해 주겠다.
초반에 폴란드 방방곡곡 여행을 짤 때, 우치를 보면서 들었던 느낌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 우치가 한국인한테는 덜 유명한 대도시라는 것. 둘째, 그 도시가 영화 도시로 변모 중이라는 것. 그리고 셋째, 해당 도시가 '캐주얼한 공연문화'의 도시라는 것이었다. 세 번째 느낌을 받았던 계기는 어떤 네이버 블로그를 통해서였는데, 그 블로그의 주인장님의 우치 여행 포스트 중에 남편하고 밤에 공연을 보러 갔던 후기가 있었다. 대충 내용을 보니 가벼운 공연에 가까운 음악회로 보였다.
"흠, 우치에서 공연이라. 내 인생 첫 음악회로는 나쁘지 않겠는데?"
그도 그럴 것이, 유럽에 머문 지 아직 5주밖에 안 된 상황. 유럽에 장기간 머무는 이상 음악회나 공연을 감상할 기회가 질리도록 많은 건 필연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투리는 예열 느낌으로 가볍게 체험 한 번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우치에서 공연을 감상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치에 어떤 공연이 있나 살펴보니, 공연 일정은 거의 매일 하나 이상 잡혀 있을 정도로 다양한 리스트가 있었다. 그나마 맘에 드는 적당한 가격의 공연을 하나 찾아 구매하려 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카드 결제가 되지 않았다.
한창을 사이트와 씨름했지만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당시에는 포기하기로 했는데, 다행히도 직접 가서 관광 안내원에게 물어보니 당일 결제도 가능하단다. 그래서 투리는 희망을 갖고 둘째 날 저녁을 노리기로 했다. 이미 점찍어둔 오페라 공연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유럽대륙까지 가지 않더라도, 폴란드만 해도 영토가 한반도의 1.6배일 만큼 다양한 지역들이 있다. 그런데 그 하고많은 지역들 중에 우치의 공연을 가야 할 이유가 있냐,라고 묻는다면 명확히 설득시킬 포인트는 없다. 우치 자체가 그렇게 인기 많은 관광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폴란드의 여러 도시들과 중부유럽의 여러 대표적인 도시들(ex) 비엔나, 부다페스트)들을 방문한 경험에 비추어볼 때, 우치는 폴란드 로컬 감성이다. 무슨 말이냐, 쇼팽의 흔적이 담긴 바르샤바나 모차르트의 화려함이 충만한 비엔나와는 달리 가벼운 연극이나 공연 예술로서의 개성이 강하다는 말이다.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굳이 따지자면 투리가 방문한 지역들 중에서 가장 '혜화'에 가까운 느낌이다. 재미있게도 우치에는 도시가 띄워주는 영화학교도 있어서 그곳의 젊은 창작자와 공연장이 많은 인프라와 궁합이 맞는 편이다. 이러한 자유분방하고 실험적인 공연들과 무게감 있는 영화학교의 조합은 뭔가 심리적 접근성을 낮춰주면서도 다가가기 어려운 기분을 동시에 안겨주는 것 같다.
어쨌거나 희망을 가지고 둘째 날의 마지막 목적지, '우치 대극장(Teatr Wielki)'으로 향한 투리! 우치에서 가장 큰 대극장이자 폴란드에서 두 번째로 큰 이 오페라 극장은 문화 공연과 다양한 대중 행사의 장으로 이용되는 곳이다. 1967년 1월 19일 오전 극장의 개관을 알리는 행사를 시작으로, 이곳은 관객들에게 300편이 넘는 초연 작품을 선보였다고 한다. 여기에는 고전 오페라와 발레, 뮤지컬과 오페레타뿐 아니라, 뛰어난 현대 폴란드 작곡가들의 작품도 포함된다.
별생각 없이 들어갔던 극장 안은 생각보다 분위기가 고급스러웠다. 입구를 지키던 사람들은 좋은 정장을 입고 있었고, 일부 관객들도 포멀한 차림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전까지 '예술의전당' 한 번 안 가본 투리였기에 이런 분위기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애써 침착한 모습으로 매표소부터 찾기로 했다.
다행히도 매표소는 찾기 쉬운 곳에 있었다. 조금만 늦으면 표가 매진될라, 투리는 급한 마음으로 표를 사기 위해 매표소 앞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 순간,
"어이, 잠깐. 혹시 너 이 공연 보러 왔니?"
"?"
놀라서 옆을 보니, 표를 사지 않고 매표소 옆 난간에 계속 서 있던 남자가 본인을 부른 것이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니,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오, 잘 되었다. 사실 내가 가족끼리 같이 공연을 감상하려고 표를 하나 샀거든. 그런데 한 명이 못 가는 바람에 자리가 하나 남아서 말이지. 혹시 현금이나 BLIK 계좌(폴란드인의 송금 결제 시스템)로 내 표를 살 생각 없니? 일반 가격보다 좀 더 싸게 팔게."
금액 얘기를 들어보니, 그가 제시한 금액은 학생 할인 금액보다도 15zt 정도 더 쌌다. 투리는 BLIK 계좌가 없었기에 현금으로 낼 수밖에 없었지만, 폴란드 현금이 약간 부족했다. 협상 끝에 부족한 금액은 유로로 보충하기로 하고, 투리는 남자의 표를 사는 데 성공했다. 외국에서 직접 대면 거래를 하다니, 별로 대단한 건 아니지만 여행자의 입장에서 뭔가 기분이 미묘했다.
물건을 맡기고 적당히 주변을 서성이며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공연 시간이 가까워졌다. 태어나서 실시간 공연은 난생처음이었던지라 투리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최근에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공연을 감상할 기회가 있어서 지금 보니 크게 감흥은 없지만, 그때는 이런 자리에 앉는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신기한 경험이었다. 공연 도중에 사진 촬영은 금지라서 오페라의 분위기를 사진으로 담을 수는 없었지만, 아래에 투리가 보았던 공연의 일부 장면을 담은 영상 링크를 남긴다. 영상과 실물은 느낌이 또 다르기는 하지만 대충 어떤 공연이었는지 유추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한국의 오페라 공연 마니아 분들. 혹시 이 글을 읽고 계신가? 폴란드의 우치 공연에서 특별한 점이 있다면 댓글 남겨주시기 바란다! 투리는 한국의 오페라를 감상한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기 때문이다.
„Carmina burana” Carl Orff / chor. Tamás Juronics I Teatr Wielki w Łodzi
그렇게 생애 첫 오페라를 즐겁게 마치고 숙소로 돌아간 투리. 워낙 오페라에 문외한이라 말할 내용이 많이 없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연극과 음악이 합쳐진 공연을 보는 클래식 장르는 처음이라 뭔가 신기했다. 그러면서도 유럽에서 이런 공연을 봤다는 사실에 뿌듯하면서도 뽕이 차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한국에서도 양질의 공연을 볼 수 있는 장소는 많아서 생각보다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낭만이란 게 있지 않은가. 감상 위치가 유럽이라는 사실 자체가 주는 심리적인 효과는 한국인들에게는 분명히 크다. 그런 의미에서 투리는 이 글에서 보잘것없는 자랑거리를 하나 남기며, 낭만 넘쳤던 그 시절을 추억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