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블린 기행] 공산 정권의 잔해 위에서 꿀을 만들자

<CSK>, 폴란드 루블린만의 유일무이한 문화센터

by 흑투리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



한국인이라면 학창 시절에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이 명언. 이 말의 출처가 어디인지 아시는가? 60% 정도는 아마 네덜란드의 유명한 철학자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5)라고 말할 것 같은데, 땡~! 놀랍게도 전세계에서 저 말을 스피노자의 명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한국인들밖에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50여 년 전 중앙일보에서 기고된 저 오류가 여러 유명인들의 잘못된 인용을 통해 지금의 우리에게까지 퍼졌기 때문이다. 사실 검색을 국외로 확장되면 해당 경구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한 말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그것도 진위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는 주장이긴 하다만.



그러면 저 말의 출처는 어디에서 온 건가? 투리가 찾아보니 최초의 출처는 1944년 10월 5일, 헤센주 교회 멤버들에게 보내는 목회 신문(Rundbrief)이라고 한다. 당시 정권을 잡은 히틀러 정권에 저항하기 위해 독일의 교회들은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라는 연합체를 만들었는데, 그중 칼 로츠(Karl Lotz)라는 목사가 고백교회의 성도들에게 비밀리에 신문 형태로 목회 서신을 돌릴 때 위의 말을 인용했다고 한다. 저 말을 '루터의 말'이라고 표현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독일을 비롯한 서양에서는 해당 경구를 루터의 말로 착각하고 있나 보다.



물론 투리는 MBTI T라서 이런 팩트체크는 못 참는다만, 누가 말했건 메시지는 명확하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희망을 끝까지 붙들며 실천하자는 말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많은 국가들이 그렇기는 한데, 폴란드는 특히나 기구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시절의 영광은 어디 가고 여러 나라들한테 100년 넘게 분할되는 암흑기를 거쳤으며, 그 뒤로는 독일 나치에 의해 크나큰 상처를 받았다. 겨우 나치에서 해방될 즈음에는 공산 정권이 권력을 잡으면서 또다시 힘든 시기를 보낸다. 이래서 폴란드는 참 사연이 많은 나라라고 불리는가 보다.



20250405_170308.jpg 이번 글의 주인공 건물.



흥미롭게도 여기 루블린에도 희망을 심고자 하는 폴란드인들이 있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이분들은 사과나무가 아니라 을 심고 있다. 그것도 숲이나 공원이 아니라 문화센터에서 말이다. 문화센터? 대체 이 문화센터에 무슨 사연이 있기에 사람들이 꿀을 만드는 걸까? 투리도 처음 갈 때는 몰랐는데, 이 센터에도 나름의 사연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글에서는 루블린의 대표적인 문화시설, CSK(Centrum Spotkania Kultur w Lublin, 영어로 Centre for the Meeting of Cultures in Lublin)에 대해 소개해주도록 하겠다! 아쉽게도 투리가 방문한 날에는 눈이 와서 꿀은 못 구경했지만 말이다!








투리가 이곳을 방문한 날은 4월 5일, 토요일. 한국인들이 들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폴란드는 한국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날씨가 쌀쌀한 편이다. 그래서 저녁에는 눈이 내리는 걸 보면서 본인도 이 날씨가 4월이 맞나 의심했다.



20250405_170514.jpg 정면에서 바라본 CSK.



어쨌든 드디어 도착한 이번 글의 장소! 겉보기에는 별 특징 없는 큰 건물이지만, 아까 말했듯 루블린에는 이만한 문화센터가 없다는 사실~한 번 안에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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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 들어가자마자 발견한 내부 사진들.
20250405_170739.jpg 전체적인 건물 내부 사진.



사진들을 보면 꽤나 규모 있는 문화센터네 하는 느낌이 들 것이다. 2016년에 개관한 이 건물은 연극 공연과 미술 전시부터 영화 상영, 콘서트, 각종 회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행사를 개최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곳이다. 이곳의 중심에는 규모 있는 대극장이 존재하며, 그 주변에는 작은 홀들과 갤러리, 멀티미디어 도서관 등의 다양한 시설들이 자리 잡고 있다.



20250405_170910.jpg 0층 극장 쪽으로 향하는 복도.



이렇게 얘기하면 그저 평범한 문화시설로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사실 이곳은 그 이상의 역사/문화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 폴란드의 루블린은 동유럽과 서유럽 문화의 교차점에 위치한 도시로 평가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화센터는 그 정체성을 현대적인 의미로 재해석하면서 다양한 국제적인 행사들을 진행하고 있다. 이곳에는 여러 문화/예술 공연들은 물론이고, 국제회의나 비즈니스 미팅, 심포지엄 등도 열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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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1층의 여러 영화포스터와 인물들의 사진.



이 공간이 얼마나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공간인가? 무려 넷플릭스의 "1983", “A Girl and an Astronaut”의 일부 장면이 여기에서 촬영되었고, Apple TV+의 드라마 촬영팀도 이곳을 방문한 전적이 있다. 실제로 공연과 전시도 얼마나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는지, 지하로 내려가보니 위 사진과 같이 많은 그룹의 공연들이 이곳에서의 공연을 예고(?)해주고 있었다. 이 건물의 총규모가 1만 m² 이상이라고 하니, 공연 규모가 얼마나 클지 어느 정도 예상이 될 것이다. 단순한 소도시로만 생각했던 루블린에 이런 어마어마한 사이즈의 센터가 있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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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jciech Siudmak의 특별 전시 공간. 2025년 3월부터 6월까지 열린 임시전시회. 이쪽은 지하 1층의 전시회였다.
20250405_172425.jpg 전시회 안의 그림들.



물론 이 안에는 특별 전시회도 자주 열리는 것 같았다. 투리가 찾아갔을 당시에는 Wojciech Siudmak라는 화가의 그림들이 두 개의 층으로 나뉘어 전시되고 있었는데, 표 하나로 두 전시관을 한꺼번에 방문할 수 있었다. 본인은 그저 이 문화센터가 궁금해서 들른 것뿐인데, 여기서 미술 전시회를 또 하나 체험하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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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리가 지하에서 감상한 작품들. 이전 회화들과는 달리 생생함이 강조되어 있다.



이분의 작품세계를 감상하면서 CSK에 대한 설명을 좀 더 해보자. 해당 문화센터는 동유럽과 서유럽 문화를 잇는 가교 역할을 잇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실제로 위 내용을 토대로 국제 예술가의 참여, 협업 프로젝트, 교육 워크숍 등을 정기적으로 주요 프로그램에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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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철학의 영향인지 CSK에 걸려 있는 그림들은 일반 미술관의 작품들과는 차별점이 있었다. 해당 전시관만 해도 일반 작품들에 비해 역동적이고 현대적인 느낌이 강했는데, 아무래도 문화센터를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이 대상이다 보니 시각적으로 친밀한 작품들을 주로 전시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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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층 전시관에서 구경한 작가의 드로잉 전시 작품들.
20250405_174634.jpg 작가가 만든 조각상.



물론 CSK에 있는 전시관은 일부 공간일 뿐! 이번에는 표를 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전시회가 아닌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공간을 산책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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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잔! 위의 사진들은 다른 층에 있는 개방형 무대와 그 근처 복도에 걸려 있는 그림들이다. 이 공간들은 사람들이 오가면서 편하게 구경할 수 있는 장소로 설계되어 있는 것 같았다. 처음에 저 무대를 봤을 때는 다른 층의 복도들과 연결되어 있어서 뭔가 낯설었는데, 이 문화센터는 애초에 이름부터 "Meeting of Culture"라는 말이 들어간 만큼 장르 혼합이나 형태 실험, 낯선 표현 방식을 장려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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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을 보니 Barbara Drelich라는 작가의 작품들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제는 "동화 속 새들"



이 개방형 공간 전시회 같은 경우는 화가가 루블린 출신이란다. 그녀가 그린 작품들은 기쁨과 희망이 가득한 동화 속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었는데, 이를 통해 평온함과 부드러움이 드러나도록 의도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투리도 어렸을 적에는 생각 없이 문화센터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던 경험이 있다. 그때도 동심을 자극하는 여러 작품들이 벽에 걸려 있었는데, 이런 로컬 작가의 작품들을 보니 당시의 동심이 되살아났다. 그래, 이런 작품들이 있어야 문화센터답지.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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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공연들의 장면을 담은 사진들과 의상, 소품들.



전시회에 대한 설명은 여기까지 하고. 공연에 대한 배경설명도 조금만 더 하자. 건물의 사이즈를 보면 납득하겠지만, 이 문화센터의 대극장은 약 900명에서 1000명까지 수용이 가능할 정도로 크다. 하지만 아까 말했듯, 이곳에는 대극장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CSK에는 소규모 공연이나 영화 상영, 지역 예술 행사가 진행되는 작은 무대들이 따로 있다. 방금 전에 지나가면서 봤던 무대도 그 무대들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20250405_181817.jpg 중간에 지나가면서 발견한 휴식 공간.



이쯤 되니 투리 본인도 궁금해졌다. 그렇게 여러 무대들이 있다는데,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본인도 직접 들어가서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공연이 진행되지 않는지라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설령 무대가 열려 있더라도 표를 사야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이 글에서는 대극장과 영화관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사이트를 찾으면 좋은 사진들이 많을 것이다. 궁금하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20250405_182050.jpg 조금 더 들어가니 식당이 있었다.



독자 여러분의 눈을 조금 즐겁게 했으니, 슬슬 이 문화센터의 역사에 대해서도 시동을 걸어볼까. 지금 보면 이 건물은 여러 면에서 볼거리가 많지만, 원래 이 건물은 수십 년 동안 뼈대만 앙상한 "흉물"과도 같은 구조였다. 1974년,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폴란드 공산 정부소련식 극장과 필하모니를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었다. 무려 1만 m² 이상씩이나 되는 극장 건물을 활용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사가 시작되었지만, 늘어나는 부채와 공산 체제의 한계성은 그 대형 프로젝트를 감당하기에 너무나 부족했다. 결국 얼마 안 가 공사는 중단되고 말았고, 건물은 한동안 철골 구조물과 콘크리트만 남아 유령 건축물로 남아버렸다.



20250405_182136.jpg 움직이는 영상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복도.



그 상태로 건물은 오랫동안 방치되었고, 1980~90년대에는 국가 예산 대부분이 단지 시설을 유지하고 안전을 확보하는 데 그칠 뿐이었다. 그러다가 자본주의가 들어서면서 1996년부터 다시 건물이 조금씩 보수되기 시작했고, 루블린 뮤지컬 극장과 루블린 필하모니가 해당 건물로 이전했다. 그 외에도 일부 공간이 대학의 연습실로도 활용되면서 건물에 점점 활기가 돌다가, 마침내 2016년 완공해서 지금과 같은 문화센터에 이르게 된 것이다.



20250405_182920.jpg 복도에 걸려 있는 작품들 중 하나를 찍은 사진.



이제야 이 글의 제목에 나온 "공산 정권의 잔해"가 무슨 의미였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CSK의 시작은 처음부터 순탄하게 시작한 건물이 아닌, 공산 세력이 무리하게 공사를 시도하다 실패한 미완성의 흔적이었다. 그 건물이 지금에 이르러 루블린의 문화 정체성을 표현하는 현대적인 상징이 된 것이다. 유럽에서도 보기 드문 극장과 콘퍼런스 센터, 도시 라운지 등이 모두 합쳐진 초복합적인 문화시설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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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보면 이 거대한 건물은 복도를 걸어갈 때마다 공간이 참으로 크게 열려 있었다. 보면 이렇게 식물들이 벽에 걸려 있는 경우도 확인할 수 있는데, 실제로 CSK는 옛 콘크리트와 철 구조를 일부러 노출시키면서 생태 공간들도 함께 만들어 놓았다. 투리가 간 날에는 춥고 눈이 많이 와서 제대로 운영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옥상에는 시민에게 개방된 하늘 위의 공원도 있다. 이 공원의 식물들은 루블린의 자연 생태계가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20250405_184151.jpg CSK의 한쪽 출구.
honey.png 실제로 꿀을 생산하는 사진 / 출처: CSK Lublin



그리고 그 옥상 쪽에는 벌통을 비치하고 꿀을 생산하는 도시 양봉장이 운영되는 공간이 있다. 이 양봉장에는 진짜로 벌들이 돌아다녀서을 만든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은 실제로 문화센터 상점에서 판매한다고도 한다. 투리는 그런 것도 모르고 상점은 패스했는데, 조금 아쉽다. 그런데 알았다 하더라도 건물이 너무 커서 못 찾았을 것이다.



20250405_183307.jpg 과거 방송국의 발전을 나타내는 미니전시관.



물론 을 생산하는 것 자체는 건물의 단순히 생산성을 과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닐 것이다. CSK의 자랑들 중 하나는 이 센터가 환경과 문화, 커뮤니티까지 포괄하는 하나의 문화 시설이라는 것. 폴란드인들이 옥상에 설치한 벌집과 의 생산은 문화기관의 지속 가능성과 함께 루블린의 지역 생산성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CSK는 활용하지도 철거하지도 못하는 공산주의의 유산에 불과했다. 그 허울 좋은 건물에 폴란드인들은 다시 희망을 싹 틔우고, 다시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으려 했다. 투리는 그 시도들 중 하나가 바로 옥상 위의 양봉장 생산이라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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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그런 배경이 이 문화시설의 전말이었다는 사실! 결론을 내면, 독일인은 힘들 때 사과나무를 심지만(?) CSK의 폴란드인을 만든다는 얘기이다. 각자의 상황을 비교하면서 얘기하기는 했지만, 둘 다 희망을 잃지 않고 싶다는 마음만큼은 동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인류의 위대한 작품들은 그 작가들이 힘든 순간에 만들어진다고. 어쩌면 인간이란 존재는 절망적인 상황이 있기에 그것을 토대로 더욱 위대한 극복 정신을 발휘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기에 이 CSK라는 문화센터가 본인, 흑투리에게 다르게 다가왔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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