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룬 기행] 우주의 중심에서 인류를 끌어내린 원천

<코페르니쿠스 생가 박물관>, 천체의 회전 원리를 바로잡은 남자의 생가

by 흑투리


"태양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태양을 돈다."



초등학생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사실, 지동설.

비록 지동설을 완전히 입증하지는 못했으나, 그 가능성에 처음으로 무게추를 올린 사람은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Mikołaj Kopernik, 1473~1543)라고 불려도 무방할 것이다. 지금에야 (극히 적은 수의) 음모론자들을 제외하고는 당연하게 여기는 사실이겠지만, 당시 지동설은 일반인들에게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그때까지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고 인간은 그 위에 사는 존엄한 존재라고 여겨져 왔으니까.



이러한 인식에 정면돌파해 혁명적인 우주관을 제시한 코페르니쿠스의 발표는, 인류가 과학혁명의 길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가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알고 있는 분 계신가? 그가 태어난 곳은 폴란드의 토룬이다. 시대적 배경까지 감안하면 코페르니쿠스는 보통 '폴란드인'으로 구분된다.



물론 토룬은 코페르니쿠스의 생애에 있어 출생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고로 역사적 위인을 음미하는 여행은 출생지마저 성지순례하는 것이 국룰 아닌가. 베토벤에게는 고향 본(Bonn), 모차르트에게는 잘츠부르크(Salzburg)가 있듯, 토룬도 코페르니쿠스에게는 그런 장소이다. 이런 폴란드의 자랑거리를 우리 ESN 위원회가 모를 리 있으랴.



이번 글에서는 그런 그의 생가를 통해 토룬의 또 하나의 하이라이트, '코페르니쿠스'를 다루도록 하겠다! 계속 유치한 진저브레드 얘기만 나와서 슬슬 질릴 참인 독자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글이 그런 독자 분들께 토룬에 대한 새로운 전환점이 되기를 바라며,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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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저브레드 체험을 마친 뒤 약간의 휴식 시간을 가지고, 바로 '코페르니쿠스 생가(Dom Kopernika)'로 이동한 ESN 팀. 말은 생가지만, 개인적으로는 박물관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20250412_121539.jpg 처음부터 천구 사진으로 분위기를 띄운 박물관.



아까 말했듯,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의 구체적인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며 과학을 발전시킨 대단한 인물이다. 그 이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코페르니쿠스는 실제 천체관측궤도 계산을 통해 지동설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는 전적에서 그 의미가 다르다.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가 성경을 근거로 천동설(태양과 다른 천체들이 모두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이론)을 주장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사람들의 세계관 자체를 뒤흔드는 상당한 발상이었다.



20250412_121712.jpg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 진정한 지식이라는 문장. 실제 코페르니쿠스가 한 말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길.



그렇다고 코페르니쿠스가 교회로부터 바로 탄압을 받은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는 성직자였던지라 교회와 대척점에 있던 사람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당시의 교황과 추기경들은 그의 새로운 발상에 관심을 기울였다. 우리가 기억하는 교회의 탄압이 있었던 시기는 코페르니쿠스가 죽고 갈릴레이가 활약하던 때로, 이때가 되어서야 코페르니쿠스의 서적들은 금서로 지정되었다.



20250412_121833.jpg 겸사겸사 다른 과학계 인물에 관해서도 소개되어 있는 설명서.



이후 갈릴레이와 케플러 등 여러 학자들의 발견을 통해 지동설은 점점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얻게 되었고, 뉴턴의 시대에 이르러 지구가 태양을 어떻게 도는가에 대한 원리가 완벽히 규명되었다. 그리고 냉전 시대에 닐 암스트롱이 직접 달 탐사에 성공하면서, 지동설은 둥근 모양의 지구와 함께 인류의 두 눈으로 직접 체감되기까지 한다. 지금은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천동설을 믿거나 지구 평평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20250412_122028.jpg 박물관 안의 어떤 홀로그램.
20250412_122131.jpg 여러 항해사들의 업적이 나와 있는 표시판.



기본적인 배경설명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부터는 이 생가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하나하나 살펴보자. 위의 사진들을 보면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시대부터 지구에 대한 서구인들의 인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간단하게 서술하고 있다. 잘 보면 바스코 다 가마,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라는 이름이 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셋 모두 항해사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항해 경로는 종합적으로 지구가 둥근 모양이라는 것을 직접 입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셋 모두 순수한 학문적 호기심이 아니라 항로 개척이 항해의 의도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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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지구본 책과 배 모형, 그리고 코페르니쿠스 그림. 그림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신앙적인 면모가 돋보인다.
20250412_122658.jpg 중세와 근대 시대 토룬에서 쓰인 유물들.



좀 뜬금없어 보였지만, 토룬에서 쓰인 토기들도 이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회색 토기 조각으로 만든 도자기류 유물들이 상당히 있었고, 가죽 부츠나 어린이 신발 등의 유물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이러한 물질문화 유물들은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나 문화를 가늠할 좋은 자료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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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간이 부엌 사진. 주로 후기 고딕 양식 연립주택에서 볼 수 있는 부엌의 형태인데, 전체적으로 어둡고 그을음으로 뒤덮인 느낌이 강했다. 아마 불에서 연기를 밖으로 빼내기 어려운 구조였기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딱히 특별한 점은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중세 시대의 부엌이지만, 오히려 그 점이 코페르니쿠스 생가의 전체적인 분위기상 낯설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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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상인의 사무실. 13세기 무렵부터 상인들은 더 이상 직접 상품을 들고 여행하지 않고, 사무실에 머물며 사업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책상 오른쪽을 보면 등팔 저울(Equal-arm scale)이 있는데, 해당 저울은 동전의 무게를 달아 진위 여부와 금속의 가치를 판단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저울은 직사각형 단면의 강철 막대와 중앙의 눈금 표시로 이루어져 있으며, 막대의 양 끝에 황동 고리를 달아 저울 접시를 다는 식으로 설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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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저장실.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 다양한 종류의 물품들이 보관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기는 선반이나 갈고리, 벽감에 두었으며, 햄 등의 가공육은 건조해서 방 안에 매달아 두었다고 한다. 한편 소금은 통에 보관되었는데, 이 통은 고기나 생선을 보존하는 데 매우 유용하게 쓰였다. 그들 중 가장 흔히 저장된 생선은 청어였다. 그 외에도 기름이나 버터는 작은 항아리나 단지에, 와인이나 우유는 더 큰 용기에 저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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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서부터는 좀 더 코페르니쿠스의 생가다운 전시관들이 등장한다. 여기는 코페르니쿠스의 주거 공간. 원래는 창고로 사용되었으나 16세기 후반부터 주거 용도로 개조되었다고 한다. 사진에서 여러분이 보시는 도구들은 과학자들이 소품으로 쓴 물건들을 전시한 것들이다. 18세기에 이르면 과학자들은 여러 분야에서 활동했는데, 그 분야는 철학이나 의학, 혹은 자연과 기술 과학 등으로 다양했다. 이들은 각각의 도구를 직접 설계하거나 제작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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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전시를 하다가 우연히 한국인 동기들끼리의 대화를 들었는데, 그중 한 분이 토룬이 생각보다 흥미롭다는 평을 내렸다. 처음에는 폴란드에 대해 그다지 흥미가 없었는데 막상 둘러보니 볼만한 것들이 꽤 많이 보인다는 것이다. 뭐, 냉정히 얘기하면 폴란드가 한국인들한테 완전 유명한 국가는 아니니까. 그래도 본인이 정착할 나라라면 어느 정도의 배경은 알고 가는 게 좋지 않았을까, 하고 T 성향의 투리는 조용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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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16–17세기 도시 시민들의 실내 공간! 여기는 코페르니쿠스 사후의 토룬 양식으로 보이는데, 확실히 아까와는 실내 장식과 생활 방식이 달라졌다. 아마 대항해 시대의 지리적 발견으로 인해 유럽이 세계로 개방되면서 일어난 현상이 아닐까 싶다. 전시관은 특히 사진 오른쪽의 붉은 찻주전자를 강조했는데, 해당 주전자는 차를 대접할 때 가장 선호되던 물건이라고 한다. 여기서 찻주전자의 뚜껑은 중국식 양식으로 제작되었으며, 근처의 찻잔들은 아랍풍 문화가 반영된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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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토룬 근처의 공동 주택 / (오른쪽) Filippo Buonaccorsi(Callimachus라고도 불렸음)의 묘비 복제본.



마지막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일대기에 대해 아주 간단히만 얘기해 보자. 코페르니쿠스가 태어난 곳은 토룬이었지만, 그가 학업을 시작한 장소는 크라쿠프에 있는 크라쿠프 아카데미였다. 이 아카데미는 현재의 야기에우워 대학교(크라쿠프 글에서 몇 차례 언급했다)와도 같다. 그는 그곳에서 철학에 대해 깊이 있는 지식을 쌓았는데, 그 과정에서 지구의 운동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아무래도 당시의 철학자들은 다른 자연 영역들에 관해서도 지식이 많은 축에 속했으니 말이다.



그는 이후 산술, 기하학 등 석사 시험에 요구되던 과정을 모두 이수했고, 여러 인문학자들과도 교류했다. 오른쪽 사진 속 묘비의 인물은 '칼리마흐'라고 불렸던 이탈리아의 인문학자였는데, 그 역시 코페르니쿠스와 교류했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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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6년, 코페르니쿠스는 이탈리아의 여러 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그는 볼로냐에서 교회법을, 파도바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페라레에서는 교회법 박사 학위 논문을 변호했다. 이 모든 과정을 마친 코페르니쿠스는 교회법 박사로서 에르믈란트로 귀환한다. 이런 개인사를 보니, 확실히 코페르니쿠스는 성직자이면서도 학자로서의 면모를 동시에 갖춘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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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르니쿠스의 연구와 관련된 여러 종이와 자료들을 전시해놓은 모습.



어쨌거나 위의 모든 배경을 다 갖춘 코페르니쿠스는 그의 임무를 다하면서 천문학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이어갔고, 마침내 1543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라는 세기의 책을 출판해 낸다. 바로 이 책이 행성이 움직이는 규칙성, 즉 지동설이 담긴 내용을 코페르니쿠스 나름대로 분석한 천문학 서적이다.



이 책은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 당대의 실력 있는 천문학자가 아니라면 그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점점 사람들에게 널리 퍼지게 되고, 코페르니쿠스는 천문학자들에게 전혀 새로운 정확도의 행성표 계산을 가능하게 하는 기하학적 도구를 제공했다고 평가받는다. 시간이 흘러 1616년, 가톨릭 교회는 이 책의 영향력을 염려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책을 금서로 지정했다. 누차 말하지만, 그의 이론은 전통적인 교회의 입장과 달랐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교회는 18세기 중반부터 지동설과 관련된 책들의 규제를 조금씩 풀었으며, 1835년에는 갈릴레이와 코페르니쿠스의 저작을 금서 목록에서 완전히 삭제했다. 그러다가 1979년이 되어서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갈릴레이 사건을 재조사하는 위원회를 설치했고, 13년간의 조사 끝에 교황청은 공식적으로 신학자들이 성경 해석과 과학을 구분하지 못한 오류를 저질렀다고 잘못을 인정하며 사과했다.



20250412_125524.jpg 코페르니쿠스의 친필 종이와 그의 시대에 쓰였던 동전들.



생각보다 교황청이 잘못을 공식적으로 시인한 시기가 늦어서 꽤 놀랐다. 갈릴레이가 활약한 지가 언제인데, 어째서 소련이 붕괴하는 와중에 이르러서도 사과 한 마디 없었던 건가. 물론 교황무류설이나 신앙과 교리의 경계 문제 때문에 교계에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이해한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늦은 건 늦은 거다. 다시는 종교의 권위에 의해 확실히 증명된 과학적 사실이 부정되는 안타까운 일이 없었으면 하는 것이 투리의 마음이다. 이런 일이 많아지면 본래 타협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종교의 영역까지도 사람들의 의심과 눈초리를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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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내용이 코페르니쿠스 생가의 전시관과 배경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어떤가, 생가치고는 박물관의 느낌이 더 강하지 않았나? 만일 '생가'라는 말이 없었다면 투리는 여기가 생가라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다. 어쨌든 코페르니쿠스에 대해 알아볼 소중한 기회를 제공한 도시 토룬! 이 글을 읽은 여러분이 모든 내용을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딱 한 가지 사실만 기억하고 넘어가주면 고맙겠다. 위대한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의 어느 한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으며, 지금도 폴란드인으로서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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