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샤바 국립 미술관>, 명실상부 폴란드 최대 규모의 미술관
현재 계속해서 '폴란드 국립 미술관'에 대한 글을 업로드 중인 작가 본인! 이번 글에서 소개할 전시관은 이 미술관에 있어서 심장과도 같은 곳, '19세기 회화 미술관'이다! 왜 심장으로 비유했느냐? 이 전시관이 가장 핵심 되는 미술관이라서? 맞는 말이다. 얀 마테이코(Jan Alojzy Matejko), 알렉산드르 기에림스키(Aleksander Gierymski) 등 폴란드 대표 화가들의 작품들이 이곳에 집결해 있다. 한국으로 따지면 김홍도, 신윤복 등의 화가들의 작품이 이 전시관에 몰려 있는 격이다. 당연히 안 볼 수 없겠지?
그러나 투리가 여기를 심장에 비유한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본인의 글을 꾸준히 읽으신 분들께 깜짝 질문! 쇼팽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부탁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는가?
"내 심장을 조국 폴란드에 묻어달라-"
이 말이었다. 비록 몸은 프랑스에 있더라도, 정체성만큼은 조국 폴란드에 있다는 쇼팽의 강한 신념! 19세기에는 폴란드라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다른 나라들에 의해 분할 점령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상당수의 19세기 폴란드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않았었다. 그런 그들이 남긴 예술적 서사는 명목상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폴란드의 숨결이 남아 있음을 증명했다. 이제야 투리가 왜 해당 전시관을 심장에 비유했는지 이해가 되시려나?
그만큼 이 국립 미술관에 있어서 상징성과 대표성 모두를 갖춘 '19세기 회화 미술관'을, 지금 여러분 앞에 공개한다! 아마 독자 분들 대다수가 순수 폴란드 회화는 그닥 못 접했을 것 같은데, 이번 기회에 폴란드 작품들을 실컷 구경하고 가시길 바란다!
우선 투리가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 전시관. 엄청 크다. 보통은 투리가 전시관을 한 글에 두 개씩 소개하지만, 이 전시관은 글 하나에만 투자해도 충분치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해당 전시관을 들른다면 지금 투리가 보여주는 작품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회화 작품들이 이 안에 있을 것이다. 투리는 분량의 한계로 일부만 언급할 수밖에 없다는 점 먼저 알아두시길 바라고! 회화들을 공개하도록 하겠다~
19세기 폴란드 미술에 대한 배경설명을 조금 하자면, 그 기반은 18세기의 계몽주의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시기의 바로크와 로코코 전통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으며, 간결한 구성과 정밀한 묘사를 특징으로 하는 고전주의도 서서히 확산 중이었다. 폴란드에서는 이런 배경의 예술 경향을 전파한 문화생활의 주요 중심지가 귀족들의 거주지나 왕실 궁정이었다. 당시에는 국내 예술가를 양성할 미술 아카데미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 작품은 타데우시 쿤체(Tadeusz Kuntze)가 그린 회화인데, 해당 작가도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을 잇는 작품을 그린 것으로 알려진 대표적인 화가였다.
이 작품은 베르나르도 벨로토(Bernardo Bellotto)라는 이탈리아 화가가 그린 바르샤바의 풍경이다. 비록 폴란드 화가가 그린 작품은 아니지만, 해당 작품은 전후 바르샤바 복원 과정에서 중요한 자료가 되어 주었다고 한다. 작품 맨 오른쪽을 보면, 건물 2층(한국식으로는 3층)에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국왕이 서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해당 국왕은 정치와 선전에서 예술이 지니는 효용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폴란드의 예술에 많은 후원을 했는데, 이는 이전에 없었던 여러 장르들의 확산을 촉진했다.
이 작품 역시 아쉽게도 폴란드가 아닌 프랑스 화가가 그린 작품. 다만 이 작품은 아까 말했던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국왕의 후원 아래 완성될 수 있었다. 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해당 작품은 꿈속의 행복한 땅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원래 이 작품은 쌍을 이루는 밤 시간대의 작품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 작품은 세계 2차 대전 때 소실되고 말았다.
얀 시키스워(Jan Ścisło)라는 이 화가는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국왕의 궁정 화가였다. 그의 역할은 왕궁의 벽에 걸 장식용 그림들을 그리는 것이었다. 지금 보이는 작품들의 배경 역시 아까 보았던 작품처럼 실제 장소를 바탕으로 한 그림은 아니다. 이 작품들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의 장소를 가장 이상적으로 표현한 회화들이라고 한다.
19세기 전반쯤 되었을 때, 낭만주의가 계몽주의의 합리주의적 태도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하였다. 이 사조는 감정, 상상력, 개인적 체험, 그리고 직관을 강조했으며, 이성 중심의 사고에 맞서 인간의 내면세계와 정신성을 중시했다.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낭만주의 예술은 조국의 과거, 영웅적 희생, 자유를 향한 투쟁을 주제로 삼아 민족의식을 고취했다고 한다.
당시의 회화는 극적인 구도, 강렬한 명암 대비, 감정이 고조된 인물 표현을 특징으로 했다. 또한 역사적 사건이나 상징적 장면을 통해 현재의 현실을 은유적으로 드러냈다. 예를 들면 위의 작품은 '일리아드'의 등장인물 파리스가 프랑스혁명의 상징이 되는 모자를 쓴 모습을 담고 있다. 실제 역사에서 파리스는 헬레나를 납치하면서 트로이 전쟁을 유발하는데, 나중에 오페라에서는 파리스가 헬레나와 사랑을 쟁취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각색된다. 작가는 매끄럽고 정제된 방식으로 오페라 속의 파리스를 그려냈다고 평가받는다.
해당 작품은 아까 봤던 회화를 그린 화가의 타 작품. 작품 속의 다윗은 골리앗과 블레셋으로부터 승리를 거머쥐어 창을 든 사울 왕의 시샘을 받고 있다. 이에 사울의 자식들 요나단과 미갈은 다윗을 공격하려는 왕을 말리는 모습을 보인다. 참고로 미갈은 나중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의 포피 100개를 가져오라는 사울의 어려운 요청을 통과한 뒤 그의 아내가 된다. 이 구약성경 속 장면을 담아낸 회화는 이후 폴란드 회화들 중에서 가장 정제된 형태의 작품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역시 동일 작가의 작품. 이 작품은 그리스 로마 신화 속의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를 다룬 회화이다. 오이디푸스는 그가 그의 친아버지를 죽인 후 그의 친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예언을 받는데, 그 예언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키운 부모로부터 벗어난다. 그러나 결국 그가 도망친 부모는 양부모라는 것이 밝혀지고, 예언은 성취된다. 지금 여러분이 보는 작품 속 장면은 눈이 먼 오이디푸스와 그의 어머니이자 아내 안티고네가 동행하는 모습이다. 그림의 배경 속 먹구름은 오이디푸스가 받은 저주를 상징하는 요소라고 한다.
폴란드의 낭만주의 미술은 기존에 없던 특정한 양식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적 태도이자 세계관의 표현에 가까웠다. 그 중요한 요소로는 집단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 모두에서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역동적인 형태와 구도, 풍부한 색채, 때로는 강렬한 명암 대비를 특징으로 한 낭만주의 작품들은 이러한 정신을 지닌 작품들의 표면성을 강화시켰다.
이 작품들을 가장 대표하는 화가는 피오트르 미하워프스키(Piotr Michałowski)였다. 위의 작품은 미하워프스키의 말기 작품들 중 하나로, 그의 딸을 그려낸 회화이다. 이후 이 작품 속의 주인공 셀리나 미하워프스키 역시 아버지가 걸어갔던 화가의 길을 뒤따른다.
작품 속의 배경이 되는 폴란드 치킨 전쟁(Wojna kokosza)은 1537년 귀족이 폴란드-리투아니아 공국의 지도자에게 반역한 첫 번째 반란 사건이었다. 실제로 누군가가 피를 흘리며 희생했던 전쟁까지 갈 뻔했지만, 이 전쟁은 귀족들이 군대를 끌고 왕 앞에 집결했으면서도 다행히 유혈 사태로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 닭과 같은 가축들은 다 털어먹어서 고생했지만.
작품 속에서 귀족들은 본인들에게 부여된 특권을 왕과 그의 시중들이 보는 앞에서 선언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때 귀족들의 요구는 일부 수용되지만, 왕권은 약해지면서 폴란드가 분열되는 계기를 초래한다.
아름답게 생긴 여성처럼 보이지 않은가? 이 작품의 주인공은 당대 폴란드의 귀족들 중에서 아름답다고 소문난 카타르지나 브래니카(Katarzyna Potocka)이다. 그녀를 그린 네덜란드 화가 아리 셰퍼(Ary Scheffer)는 우수에 잠긴 여인을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화가였다. 지금 보시는 초상화를 보시면 이 아리 셰퍼라는 화가가 얼마나 세심하고 분위기 있게 여성을 표현했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속의 엘리자 크라신스키(Eliza Krasińska)라는 여인은 지그문트 크라신스키(Zygmunt Krasińska)라는 폴란드 시인의 아내였다. 이 초상화 속에서 엘리자는 부드러운 얼굴을 지은 채 그녀의 자식들과 함께 있다. 슬프게도 그녀의 자식들은 아버지 지그문트가 그랬듯 결핵으로 고통받으며 살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그들은 요양원으로 옮겨졌는데, 여기서 엘리자는 프란츠 빈터할터(Franz Xaver Winterhalter)라는 독일 화가와 친한 관계를 맺는다. 빈터할터의 해당 그림은 이러한 연유로 탄생한 것이다.
자, 이다음부터 등장할 작품들은 역사주의와 관련된 작품들이다. 자주국가를 상실한 폴란드인들에게 있어, 열강들의 억압 속에서도 공통된 민족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감각을 유지하고, 그 전통과 언어를 계승하는 일은 지대한 의미를 지녔다. 그러한 영향을 받아 예술은 애국적 소명으로 인식되었고, 역사적 의식을 고취시키며 독립 투쟁에 대한 신념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투리가 교환학생으로 있으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이름의 화가, 얀 마테이코(Jan Matejko)이다. 그는 역사, 철학적 메시지를 담은 기념비적인 대작들을 여럿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투리가 이 이름을 가장 자주 접한 것만 봐도 그는 폴란드 국민들에게 상당히 잘 알려진 화가로 보인다. 그는 일종의 독창적인 해설 방식으로 특정 사물들에 작품의 메시지에 맞는 의미를 부여하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여기 그의 작품 세 점을 통해 자세히 알아보자.
작품의 제목으로 보아하니 이 회화는 작가의 딸을 그려낸 초상화로 보인다. 투리의 눈에는 상당한 미녀이다.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자.
이번에는 작가 본인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이다. 붓들과 팔레트 아래에 놓인 책은 역사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암시하고 있으며, 화가의 주름진 얼굴은 슬픔과 비통함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의 마테이코는 크라쿠프의 높으신 분들로부터 병원 옆의 성당을 지키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하자 크라쿠프 시민권을 포기했다. 어쩌면 마테이코는 그로 인한 상실감을 이 작품 속에 남기고 싶었던 걸지도.
짜잔, 드디어 이번 글의 가장 하이라이트, '그룬발트 전투' 작품의 등장이다! 얀 마테이코가 그린 이 그림은 1410년 7월 15일에 벌어진 전투의 마지막 국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 전투는 브와디스와프 야기에워(Władysław Jagiełło)가 이끈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이 튜튼 기사단을 결정적으로 격파하며 끝났다.
그림 속에서 마테이코는 얀 드우고슈(Jan Długosz)가 '연대기'에 기록한 내용을 바탕으로 중세 전투를 극적으로 환기시키는 장면을 창조했다. 그는 전투의 폭력적 격렬함에 장엄함과 비장미를 부여했으며, 이름 없는 기사들조차 역사적 서사 속 영웅의 반열로 끌어올렸다. 이 시기에 제작된 그의 작품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공국의 위대함을 표현하면서, 폴란드인들에게 미래의 조국 부활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려고 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에서 완성된 이 작품은 당시 폴란드에 있었던 사회적 불평등을 표현하는 회화였다. 작품 속에서 한 농민과 아이가 교회 벽에서 신부를 기다리고 있는데, 옷차림으로 미루어보아 그들은 매우 가난한 계층에 속해 보인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자세는 슬픔과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의지를 보이는 듯하다. 한편 회화 속의 날씨는 그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잘 드러나고 있다.
펠릭스 펜차르스키(Feliks Pęczarski)의 해당 작품은 카드 도박사와 술고래, 고리대금업자와 사기꾼의 삶을 드러내는 류의 여러 회화들 중 하나이다. 다소 과장스러운 그림체는 작품 속 주체들의 옳지 못한 인생을 비판하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다. 또한 어딘가 불쾌한 감정을 유발하는 두 남자의 모습은 그들의 비열한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은 폴란드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 알렉산더 지에림스키(Aleksander Gryglewski)의 작품이다. 나중에 소개하겠지만, 작품 속의 장소는 폴란드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빌라노프 궁전(Wilanów Palace)의 내부 모습이다. 빌라노프 궁전은 폴란드 땅의 초창기 미술관으로서 1805년 이후로 관람객들에게 개방된 곳이라고 알려진다. 참고로 작품 속의 방은 얀 3세 소비에스키(Jan III Sobieski)의 부인이 쓰는 침실이다.
아까 언급했듯 19세기 초에는 폴란드에 마땅한 예술 아카데미가 없었지만, 19세기 중후반쯤에는 아카데미 교육 체계를 일부만 반영한 하급 수준의 미술 학교나마 생기기 시작했다. 많은 폴란드 예비 예술가들은 새로운 예술 사조에 비교적 개방적이었던 뮌헨 미술 아카데미에서 수학하기를 선호했으며, 그들 중 요제프 브란트와 막시밀리안 기에림스키를 중심으로 한 '뮌헨 학파'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역동적인 전투 장면, 분위기 있는 풍경, 그리고 지방 생활을 그린 풍속화를 폴란드 회화의 주요 방향으로 설정하였다.
아, 다만 위의 작품은 뮌헨 학파와의 작품과는 완전히 무관한 작품이다. 저 회화를 그린 사람은 러시아의 사실주의를 담아낸 것으로 알려진 러시아인 마코프스키이다.
위 작품의 화가 빌린스카(Anna Bilińska-Bohdanowicz)는 학회의 교육을 전문적으로 받은 최초의 여성 폴란드 작가이다. 작품 속 여인의 의상은 야외 분위기에 어울렸음에도 화가는 실내에서 그녀를 그렸다. 해당 작품은 초상화 속 인물의 고풍스러운 옷의 색깔과 결을 잘 표현해 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 속의 남자. 어딘가 범상치 않은 분위기였는데, 한때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정치인이면서 외교관이기까지 한 폴란드인이었다고 한다. 해당 회화는 저 인물이 젊은 시절 영국에서 투어를 하던 시절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 그가 연주했던 공연장들 중 한 군데는 이 작품을 그린 네덜란드인 화가 로런스 알마타데마(Lawrence Alma-Tadema)의 런던 거주지였다고 한다. 어쩐지 그림이 너무 세밀하다 싶었다만, 저 피아니스트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 작품은 제단 주변에서 행해지는 신비로운 의식을 묘사한 작품이다. 밤에 펼쳐지는 해당 장면은 연인들의 행렬과 그들과 동행하는 인물들이 아닐까 싶다. 관람자의 상상력과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작가는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시적인 분위기를 환기하는 데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부러운 커플들.
자, 다시 알렉산데르 기에림스키의 작품으로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그의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자. 사실주의 화가답게 그는 자연을 관찰하는 좋은 감각이 있었지만, 그의 진가는 빛의 신비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색조의 변화에 있었다. 예를 들면 위의 작품은 로마에서 르네상스 복장의 귀족들이 참여한 음악회를 그려낸 작품이다. 작가는 그림 속에서 서 있는 여성으로부터 진하면서도 따뜻한 색조를 통해 여성의 자비와 우아함을 표현해냈다.
이 작품은 같은 작가가 라벨로 대성당의 중앙 통로를 표현한 그림이다. 이 회화에서는 기에림스키의 자유롭고 즉흥적인 스케치 기법을 통해 빛과 색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내는 순간적인 인상을 작품 속에 담아냈다. 특히 색채의 섬세한 명도 변화는 깊이감이 있는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킨다고 평가받는다.
1898년부터 1899년까지 2년에 걸쳐 기에림스키는 베네치아의 성당 내부에 관한 그림들을 많이 그렸는데, 이 캔바스에서는 레오나르도 성당의 날개 부분을 그려냈다. 공간 전체적으로 보이는 어두운 분위기는 미세하게 들어오는 빛과 함께 건축물들과 모자이크 창문을 더욱 두드러지게 표현하는 효과를 일으킨다.
자, 다음으로 소개할 예술가는 야체크 말체프스키(Jacek Malczewski)다. 말체프스키의 작품들은 1890년부터 1914년까지 모더니즘의 붐과 함께 형성된 상징주의(Symbolism)와 관련이 깊다. 상징주의자들은 사실적이고 문자적인 재현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숨겨진 의미를 암시하는 상징을 통해 감정의 내면 세계와 보편적 관념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예술 양식은 폴란드의 애국적 참여 미술적 의도를 관람자들에게 이해시키면서 동시에 정치적 검열을 피해가는 효과가 있었다.
말체프스키는 창조자의 역할과 같은 주제의 성찰을 위해 풍부한 상징 어휘 체계를 구축했다. 예를 들면 위의 작품에서는 가운데에 해골을 든 남성이 어딘가 근심에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는 사회적 복종과 개인의 만족 사이에서 선택을 주저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양쪽에는 뱀으로 중요부위만 가린 두 여성이 남자를 유혹하고 있고, 남자의 뒤에는 뮤즈라는 예술의 상징적 생명체의 얼굴이 보인다. 해당 작품은 1905년 러시아에서 폴란드 독립 운동이 발발했을 때 말체프스키의 기대와 걱정을 동시에 담아낸 작품이라고 한다.
작품 속에서 우물 근처의 여성은 방금 그녀의 연인을 본 듯한 모습이다. 그는 여행자였을까, 그게 아니면 시베리아 유배생활에서 귀환한 남자였을까. 그녀는 그이에게 시원한 물이라도 제공해 주고 싶은 행동을 취하고 있다. 사실 이 작품은 말체프스키의 미완성 작품이라고 하는데, 해당 화가는 이런 식으로 봄이나 우물을 모티브로 한 작품들을 많이 그렸다고 한다. 또한 그는 이 작품과 같이 시베리아로 유배된 폴란드인들의 순교적 운명을 시각화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말체프스키는 자연의 완벽한 질서를 표현하기 위해 풍경에 종합적인 양식을 취한다. 작품 속 세상은 성 아녜스 덕분에 보기 조화로운 모습을 띠고 있다. 여기서 종달새를 풀어주는 그녀 뒤에 봄의 상징과도 같은 바구니가 접근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상징주의자들은 자연을 주제로 하는 작품들을 그릴 때 주관적이고 감정이 강하게 실린 회화를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이 작품의 작가 요제프 메호페르(Józef Mehoffer)는 상징주의 영역에서 출발한 대표적인 작가이다. 위 작품을 통해 어느 정도 느낄 수 있겠지만, 그의 회화는 장식적인 양식과 풍부한 색채로 두드러지는 경향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많은 작품들을 구경한 것 같으니, 마지막으로 한 작가의 작품들만 더 보고 마무리하도록 하자. 마지막으로 소개할 스타니스와프 비스피안스키(Stanisław Wyspiański)라는 화가는 20세기 전환기 폴란드를 대표하는 가장 뛰어난 예술가들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는 폴란드 연극 무대의 개혁자로 평가받으면서 동시에 초상화가이자 풍경화가였다. 그의 주요 회화들은 한 세기 동안 외세에 분할 지배되었던 폴란드가 국가를 되찾는다는 이상에 헌정되어 있다.
위의 작품은 그가 그의 동기 유제프 메호페르(Józef Mehoffer)와 함께 수학할 때쯤 그린 작품이다. 둘은 같은 크라쿠프 미술아카데미에서 공부한 사이이며, 얀 마테이코의 감독하에 성 마리아 성당의 다색화(Polychrome) 장식에 함께하기도 했다. 그들은 파리에 가서도 함께 공부를 이어나갔는데, 작품 속에서 비스피안스키는 그 시절의 메호페르를 담고 있다. 회화에는 그들이 있었던 스튜디오가 어떠했는지도 잘 나타내고 있다.
타락한 천사를 주제로 한 이 작품은 비스피안스키가 프란체스코 수도원에서 다색화 장식에 도입되었던 회화이다. 해당 작품은 마태복음 25장의 미련한 처녀들과 슬기 있는 처녀들과 함께 배치가 되었다. 당연히 맥락상 타락한 천사들은 미련한 처녀들과 쌍으로 배치되었겠지? 반면 슬기 있는 처녀들은 예수를 안은 마리아와 쌍으로 배치되었고 말이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신랑을 맞이한 열 처녀 중 슬기 있는 다섯 처녀들은 등과 기름을 가지고 신랑을 맞이하고,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깜빡하고 기름을 안 가져와서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이미 신랑이 도착해 혼인 잔치에 참가하지 못한다. 대충 그런 내용인데, 비스피안스키는 1895년부터 1896년까지 2년에 걸쳐 아까 설명한 배치 양상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래서 그는 이 때 자신은 미련한 처녀들과 슬기 있는 처녀들에 관한 두 개의 그림으로서 두 개의 만화를 그리고 있다고 적었었다.
이 그림은 비스피안스키가 파리에서 머물었던 20대 초반에 그의 자화상을 그린 모습이다. 다른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을 팔레트와 붓을 이용해서 묘사했는데, 갈색 계열의 다양한 색조를 선택한 점이 눈에 띈다. 이는 전통적인 아카데미즘 회화 방식으로 제작된 작품으로, 앞으로 그려낼 실험 정신이 가득한 작품들을 그리기 전의 마지막 작품에 속한다. 달리 말하면, 해당 작품은 얀 마테이코의 크라쿠프 화가를 따르던 사람으로서 비스피안스키가 남긴 작별 인사와도 같은 작품이다.
이렇게 해서 이 미술관 안의 대표적인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들 몇몇을 이번 글에서 알아보게 되었다! 물론 지금 보여준 작품들은 수많은 작품들 중 일부에 지나지 않다. 그래도 직접 정해진 시간 안에 그 많은 작품들을 일일이 보는 것보다는 이렇게 몇몇 회화들을 집중적으로 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라 본다. 어땠나, '바르샤바 국립 미술관'의 핵심과도 같은 미술관을 맛본 소감이?
본인 나름의 마무리 멘트를 하자면, 해당 전시관은 역시 폴란드스러운 회화 전시관이었다! 어떤 작품은 독립의 정신이 담긴 애국 작품이었고, 폴란드의 풍경을 잘 그려낸 작품들이 보이기도 했다. 다만 그 작품들이 어떤 류의 작품이든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으니, 바로 폴란드가 없었을 때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비록 나라는 없어졌지만, 그들은 각자의 작품들을 통해 폴란드의 정체성을 만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유럽은 유럽이지만 신기하게도 우리와 공감대가 깊은 나라. 그 나라의 정신이 담긴 회화들을 보자니, 유럽의 모든 문화 양식들이 마냥 고급스럽기만 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