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속에서 키치는 전체 플롯을 꿰뚫는 핵심 개념으로, 작가는 이를 통해 인간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해 탐구한다. 키치란 무엇인가? 다음 구절에서 우리는 그 개념을 조금 이해할 수 있다.
[ 나는 어릴 적 귀스타브 도레의 판화가 삽화로 실린 어린이 구약성서를 읽으면서, 거기에서 구름을 타고 있는 선한 신을 보았다. 늙은 아저씨 모습에다가 눈과 코가 있었고 수염이 길었으며, 입도 있으니 나는 그가 먹기도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먹는다면 창자도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이 생각에 곧 질겁을 했다. 나는 무신론자에 가까운 집안에서 자랐지만 신의 창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신성 모독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신학적 예비지식은 조금도 없었지만, 어린 나는 순간적으로 똥과 신은 양립할 수 없으며 또한 인간이 신의 모습을 본떠 창조되었다는 기독교의 인류학적 근본 명제가 지닌 허약성을 일찌감치 깨달았던 것이다. 둘 중 하나다. 인간은 신의 모습에 따라 창조되었고 따라서 신도 창자를 지녔거나, 아니면 신은 창자를 지니지 않았고 인간도 신을 닮지 않았거나.
…
그것이 종교적 믿음이건 정치적 믿음이건 간에 모든 유럽인들의 믿음 이면에는 창세기의 첫 번째 장이 존재하며, 이 세계는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모양으로 창조되었고, 존재는 선한 것이며 따라서 아이를 가지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거기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근본적 믿음을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라고 부르도록 하자.
최근에도 책 속에서 똥이라는 단어가 점선으로 대체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윤리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똥이 비윤리적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똥과의 불화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똥을 누는 행위는 창조의 받아들이기 어려운 성질을 일상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똥은 수락할 만한 것이라거나 (그렇다면 화장실 문을 잠그고 들어앉지 말아야 한다!) 또는 우리가 창조된 방식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것 중에서.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가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세계는, 똥이 부정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각자가 처신하는 세계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러한 미학적 이상은 키치라고 불린다.
…
키치는 자신의 시야에서 인간 존재가 지닌 것 중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 ]
내가 이 구절로 이해한 키치에 대해 쉽게 설명하자면 '어떠한 불쾌하고, 모순적인 것을 제거하고 보기 좋은 감동적인 표면만 남기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인간이 '똥을 싸는 행위'는 불쾌하고, 더러운 것인데 그것은 한편으로 '인간이 신의 모습을 본떠 창조되었다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명제의 허약한 급소'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 신을 본떠 창조되었다는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으므로, 이를 이상적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세계에서는 '신이 똥을 싸는 행위'처럼 수락할 수 없는 생각은 배제되고,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렇게 진실을 떠나 납득할 수 있고, 불편하지 않은 감정만을 소비하려고 하는 태도가 곧 키치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속에서 쿤데라는 키치가 어떻게 '인간이라는 존재의 복잡함과 그 존재의 무게'를 지우고 껍데기뿐인 허상으로 만드는지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며칠간 생각했을 때 나에게 키치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삶의 방식으로 느껴졌다. 내 생각의 흐름은 몇 주 전 친구와 나누었던 대화에서 시작된다.
대화는 나의 이별이라는 소재에서 시작해 20살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 각자 살아온 자취에 대한 두서없는 반성과 성찰에 대해 이어졌다. 하나의 관계가 시작되고 끝날 때마다, 우리는 '나'라는 사람에 대해 작고 낯선 조각들을 하나씩 얻게 된다. 내 가장 최근 조각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꺼냈을 때, F는 상당히 오래 연애를 하지 않고 자신에게 집중했던 시간에서 얼마나 자신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조각해 나갈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그 시간이 꽤나 행복하고 만족스러웠음에 대해.
듣고 있던 나는 조금 발끈하고 말았는데, 너는 어떠한 관계에서만 자신의 모습을 찾고 만들어 나갈 수 있냐는 듯한 타박으로 느껴졌던 것도 있고, '타인의 사랑에 의존하지 않고도 나 홀로 행복하다는 느낌'을 나라고 왜 찾지 않았겠는가? 내면의 단단함을 너무나 부러워하고, 추구하지만 실제 그러지 못한 나 자신과의 괴리에 괴로워하던 시간이 무색해지는 것 같아 나는 변명과도 같은 반박을 이어갔다. 나도 다른 사람 없이 홀로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고 싶었지만, 내 삶은 매 순간 나의 나약함과 유약함을 확인하고 무너지는 시간이었으며, 그런 부족한 모습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누군가가 보기에 한심해 보일 수 있어도 계속해서 타인의 사랑을 확인하고 그것에 발 디디려는 반쪽밖에 없는 나를 깨달았을 때 살아남는 방법이었다고.
이내 F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나만의 방식으로 버텨낸 노력을 인정했고 결국 사람은 모두가 행복해지고 싶은 것이며,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고, 우리는 열심히 살아온 것뿐이라 정리했다.
그럼에도 못내 울분이 남았던 나는 '주인공이 실연을 겪고 그 이후 자신의 커리어와 취미 등에 심취하여 혼자로도 충분하고 성취한 삶을 이뤄냈어요' 따위의 플롯을 남발하는 소설에서 말하는 '홀로써 완전한 삶'도 하나의 허구의 이미지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운명적 사랑'을 다루는 드라마는 그런 완벽한 사랑이 존재하지 않음을 모두가 알고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데 비해, '홀로써 완전한 삶'은 반드시 가능하다고 대부분이 믿고 있으며, 우리는 그런 책들 때문에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모든 외로움의 해결책인 것처럼 선동당하고 있다고. F는 이 의견에도 동의해 주며 삶에 정답이 없는 만큼 그것도 하나의 이상화된 환상일 뿐, 답은 아니라는 것에 우리는 합의를 이루었다.
이 대화에서 우리가 다뤘던 '사랑으로 완전해지는 삶'과 '나 혼자만으로도 충만한 삶'이라는 관념이 밀란 쿤데라의 키치와 맥락이 닿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막장 드라마 속에서 운명의 상대를 한눈에 알아보고 그 사랑으로 구원받는 서사에 감동하고, 그런 사랑이 실존한다고 믿는다. 또 누군가는 타인과의 관계없이 나 자신만으로도 모든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자아를 실현하는 독립적인 삶이 정답이라고 믿는다. 어찌 보면 그 두 개의 이상 역시, 현실과의 차이를 무시하고 감동만을 추구하는 이상화된 키치와 다를 바 없다.
나는 이상과 완벽이라는 개념은 실존하지 않으며, 그것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자신이 설정한 궁극의 목표를 좇게 되고, 그 시점부터 그곳에 도달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실망하고 좌절한다. 하지만 이렇게 이상에 다가가는 과정에 수반되는 괴로움과 실패의 과정은 생략되기 때문에 우리가 쫓는 이상은 키치이다.
무엇보다, 그 이상을 좇으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또한 키치이다.
책에서 키치는 '두 방울의 눈물'로 표현된다.
[ 어떻게 이 상원 의원은 어린아이들이 행복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까? 그들의 영혼을 읽었을까? 만약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그들 중 세 명이 한 아이에게 달려들어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면?
상원 의원이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한 논거는 하나밖에 없다. 그의 감수성. 가슴이 말할 때 이성이 반박의 목청을 높이는 것은 예의에 벗어난 짓이다. 키치의 왕국에서는 가슴이 독재를 행사한다.
물론 키치가 유발한 느낌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키치는 유별난 짓을 할 수밖에 없다. 키치는 인간들의 기억 속에 깊이 뿌리내린 핵심 이미지에 호소한다. 배은망덕한 딸, 버림받은 아버지, 잔디밭 위를 뛰어가는 어린아이, 배신당한 조국, 첫사랑의 추억.
키치는 백발백중 감동의 눈물 두 방울을 흐르게 한다. 첫 번째 눈물은 이렇게 말한다. 잔디밭을 뛰어가는 어린아이, 저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두 번째 눈물은 이렇게 말한다. 잔디밭을 뛰어가는 어린아이를 보고 모든 인류와 더불어 감동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키치가 키치 다워지는 것은 오로지 이 두 번째 눈물에 의해서이다.
모든 인간 사이의 유대감은 오로지 이 키치 위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
즉 두 번째 눈물은 '어떤 것(사회적으로 감동하기로 약속된 것들)에 감동받는 나에게 감동받아서' 나오는 눈물인데, 이 비유에서 우리는 '현실과 무관하게 나의 감정에 도취되어 소비하고 싶은 것만 소비하는 태도' 또한 키치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면서 바라는 우리의 이상적인 모습'을 하나로 규정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삶의 태도 또한 '이상을 추구하는 나에게 감동하는' 키치이다. F와 나의 삶의 방향에 대한 열띤 논쟁조차 삶의 이상적 서사에 도취된 우리들의 또 다른 키치였던 셈이다.
그렇지만, 그래서 키치는 나쁜 것인가? 우리가 손가락질하고 거리를 두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소설 속에서 쿤데라도 키치를 비판하지만 동시에 '인간 조건의 한 부분'임을 인정한다. 이는 주요 등장인물 중 하나인 사비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비나는 예술가로, 소설 속에서 키치의 반대편에 서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공산주의 체제의 정치적인 키치와 그곳에서 강요하는 행진을 혐오했지만, 한편으로 소련의 침공을 받은 체코인임에도 불구하고 체코인들의 항의 시위 대열 속에서도 어울리지 못하고 도망친다. 그녀에게는 '팔을 치켜들고 입을 맞춰 똑같은 단어를 외치며 행진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추구하는 키치가 공산주의, 파시즘, 침공을 뛰어넘는 악으로 느껴졌다. 또한 사비나는 그 외에도 테레 자라는 인물이 대표하는 전형적인 여성성, 부모와의 관계, 도덕적인 가치, 타인과의 애착 등 모든 키치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배반하는 삶'을 산다. 그런데 정작 그녀는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짓눌려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키치(진중함을 가장했지만 가벼운 것, 거짓 감동)를 떠나왔지만, 역설적으로 어떤 것과도 엮이지 못해서 존재의 무게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무게를 잃은 존재는 쉽게 흔들리고 부서진다. 키치를 거부한 대가는 무한한 자유가 아니라 아무것도 지탱할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또한 작가는 한 장면에서 사비나 역시 내재된 키치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며 키치가 인간의 조건의 한 부분임을 설명한다.
[ 그녀는 팔레트를 내려놓고 욕실로 가서 화장을 고쳤다. 남자는 의자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혀 테이블에 기대 있던 지팡이를 들었다. 아틀리에 문은 곧장 잔디밭으로 통했다. 어둠이 깔려 있었다. 20여 미터 건너편에는 일층 창문을 환히 밝힌 하얀 목재 집이 한 채 있었다. 사비나는 석양 속에서 반짝이는 두 창문을 보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녀는 일생 동안 자신의 적은 키치라고 단언했더랬다. 그러나 그녀조차도 자신의 존재 깊숙한 곳에 키치를 품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그녀의 키치, 그것은 사랑하는 어머니와 지혜로운 아버지가 군림하는 평화롭고 부드럽고 조화로운 가정의 모습이다. 이 이미지는 그녀의 부모가 죽은 후에 가슴속에서 배태되었다. 그녀의 삶이 이 아름다운 꿈과는 아주 달랐기 때문에 이것이 지닌 매력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텔레비전의 멜로드라마 속에서 배은망덕한 딸이 버림받은 아버지를 품에 껴안는 모습이나 행복한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의 창문이 황혼 속에서 반짝이는 것을 보면, 그녀는 두 눈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
일생 동안 키치를 거부해온 사비나조차도 자신이 가져본 적 없는 '좋은 부모와 행복한 가정'의 이미지를 가지는 '황혼 속에서 빛나는 창문'을 보고 감동을 느낀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 존재하는 결핍에 의해 자각하지 못해도 자신만의 '황혼 속 빛나는 창문'을 꿈꾼다. 우리가 키치에 끌리는 것은 단순한 감상적인 취향이 아니라, 불완전한 존재로써 완전해지고 싶은 생존 본능이다. 그것은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며, 비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결국, 키치가 외면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일부라면 우리는 키치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힌트는 사비나가 그녀 안에 내면화된 키치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취하는 태도이다.
[ 그녀는 이 노래에 감동하지만 자신의 감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는 이 노래가 아름다운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안다. 키치는 거짓말로 인식되는 순간, 비-키치의 맥락에 자리 잡는다. 권위를 상실한 키치는 모든 인간의 약점처럼 감동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초인이 아니며 키치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나는 그녀가 키치의 존재를 인정하는 한편, 그것이 주는 감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키치에 대한 혐오와 그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욕망이 공존하는 내적 갈등을 현명하게 해결했다고 생각한다.
키치는 인간의 불완전함이 드러나는 방식이며, 동시에 그 불완전함을 견디게 해주는 감정적 장치이다.
우리는 키치를 무조건 배척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자각하고, 진지하게 추구하지만 집착하지 않는 유연함을 가져야 한다.
한 번뿐인 삶, 돌이킬 수 없는 삶에서 인간은 모두 '의미'를 추구하고, '의심할 필요 없는 아름다운 이상'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순수한 사랑, 행복한 가정, 진실한 우정, 진정한 자아와 같은 것의 실존을 믿으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주는 감동을 온몸으로 느끼고, 그 감동에 위로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갖지 못하는 자신에 좌절하고, 상심해야 한다. 그러다 너무 괴로울 때는 이상에 도취되어 힘들어하는 나를 한번 비웃어주면 된다.
키치를 뿌리치지도, 그것에 휘둘리지도 말고 끌어안자.
그렇게 해야 '존재로서의 무게'를 지닌 채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