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할때
밀젖, 기린알, 출아된 개미. 단어는 단어 자체의 논리로 형성된다. 그것이 실제 사물과 어떠한 연관을 짓는지는 상관없이. 수학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체계,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 관료주의-bureaucracy의 한 방면으로, 즉 프랑스어 어원의 bureau, 서랍장에 무엇들을 분류하듯 개념이라는 장에 인식들을 분류하는 법으로 세워진 것이다. 언어의 형태가 어떻게 꼴지어지느냐에 따라 우리의 세계인식이 달라진다는 가설(사피어-워프 가설)은 그러한 측면에서 인정된다.
세계와 자아, ‘나’라는 개념으로, 그 부분집합적 개념으로 우리는 세계를 이해한다. ‘나’는 실상 세계에 속하지만, 그것은 나머지 세계와 다른 특질을 지니기에 그것이 하나의 주체라는 말로 쓰여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세계를 인식한다. 세계의 형태가 반영된 꼴로 쓰인 논리계가 우리에 내재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주체를 세계 인식이 가능한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주체라는 개념은 우리 자신에게서, 우리와 닮은 여러 것들에서 파생된 개념이기에, 그것과 동질적인 성질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세계의 형태가 반영됨을 그 정의로 사용한다면, 하나의 현무암도 주체로 충분히 상정될 수 있다. 그것도 주위의 세계의 특질을 충실히 반영한 논리계가 내제되어있기 때문이다. 숭숭 난 구멍과, 깎여나간 표면, 자라난 이끼 등이 세계의 논리적 반영으로 이해된다. 인식은 그렇게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주체는 그것 외에도 가져야 할 여러 인간적인 필요조건들이 있다. 다만, 이 글에서의 인식의 정의 형태를 통하자면 그러한 인식은 휴지조차 포용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은 그러한 것에 비해 더욱 다양하고,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인식 외에도 의식이 존재한다. 이 의식으로 하여금 우리는 자아와 세계의 구분을 명확히 한다.
의식의 물리적 틀은 많은 사람에게 비슷하지만, 그것이 드러나는 형태는 그가 사용하는 언어에 한정되므로, 의식은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뱀은 움직이는 사물을 구분가능하고, 그것이 먹이나 아니냐를 구분가능하다. 그러한 뱀의 언어는 먹이, 아니다. 적, 아니다. 춥다, 아니다. 등의 단순한 체계로 구성된다.
인간 언어는 인간 인식의 틀을 제대로 반영한 투사물로 볼 수 있을까? 인간 언어는 조잡하게 짜여진 잠망경처럼 인간 의식의 다면성을 가둬놓는 딱딱한 관료주의의 가장 개인적인 형태일 수도 있다. 언어의 복잡성에는 위계가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고대 언어에 비해 현대의 언어는 더 다층적인 사유를 다룰 수 있다. 그러한 면에서 언어는 인간 인식의 투사물이며 동시에 조잡한 틀이라고 볼 수 있겠다.
우리는 그렇다면 어떠한 언어로 사고의 확장을 낳을 수 있을까? 더 발전된 형태의 언어는 무엇일까? 시공간성을, 즉 세계의 본질을 가장 잘 반영하는 언어가 인식의 정교함에 기여할 것이다. 점, 선, 면, 시간. 이것으로 세계를 기술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