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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리아 Apr 01. 2024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포도주 문화

지중해 사람들은 언제부터 포도주를 마시기 시작했을까? 신석기시대부터였다. 

아테네문화가 절정에 이르렀던 BC 6∼4세기 포도주 생산이 가장 많았는데, 

이후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그리스 산 포도주 종류를 세는 것보다 백사장 모래알을 세는 것이 

더 쉽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가 지금 태어났다면 아마도 프랑스나 이탈리아산 포도주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같은 땅에서도 경사면이 어느 방향을 향해 있는가에 따라 포도주 이름이 달라지니 

그 다양성은 ‘백사장의 모래’와 견줄만하다.  


고대그리스인들은 포도주를 디오니소스 신이 준 선물로 생각했다. 

마시면 젊어지는 느낌이 들어 나이 먹는 우울함을 잊게 해 주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시공을 초월해서 모든 사람들이 합의하지 않을까? 그러나 유대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탈무드에 따르면 포도주는 악마의 선물이다. 이슬람교 입장도 같다. 

지중해 남쪽 해안 모로코에서 인도네시아까지 이어지는 긴 이슬람 벨트에서는 술이 금지되어 있다. 

나이 먹는 우울함을 맨 정신으로 견뎌야 하다니! 


그런데 똑같이 유대교의 전통을 이어받았어도 기독교의 입장은 다르다. 포도주를 신성하게 여긴다. 

예수님은 ‘나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전도서 9장 7절은 이렇게 권주하고 있다.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너의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라.”


고된 전투를 하는 로마 군단은 매일 포도주를 1ℓ씩 배급받았다. 

로마제국 황제는 군대가 공훈을 세우면 장교인 백부장들에게 그리스 산 포도주를 하사했다. 

주둔할 곳을 찾으려면 포도를 심을 수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포도밭은 로마 군단과 함께 북진했다. 

지중해로 흘러가는 론(Rhône) 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 부르고뉴(Bourgogne), 샹파뉴(Champagne), 모젤(Mosel) 지방에 포도를 심었다. 로마인들이 파놓은 지하 동굴을 아직도 포도주 저장고로 사용한다. 

21m 깊이 땅 아래 160km나 뻗어 있는 곳도 있다. 




술은 종류에 따라 마시는 방식이 다르다. 맥주는 목을 젖히고 벌컥벌컥 마신다. 

위스키나 코냑은 조심스럽게 나누어 마신다. 포도주는 한 모금씩 입 속에 머금고 맛을 느껴가며 마신다. 

알코올 도수가 13° 밖에 되지 않는 과실주 따위를 뭘 그렇게? 


포도주를 마시는 행위는 심오한 철학적 의미를 지닌 행위다. 지나간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원샷으로 되찾을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가 마시는 것은 포도주가 품고 있는 시간이다. 

숙성의 시간, 수확의 시간, 저장의 시간, 돌보는 시간, 즐거움의 시간. 

그래서 사람들은 포도주를 즐길 때 절대로 성급하면 안 되고 속도를 내서도 안 된다.”


포도주를 ‘와인’이라고 부르면 색다른 기분이 난다. 

큰 유리잔에 시간을 되찾아가며 혼자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둥근 유리잔을 떠오르게 하는 ‘ㅇ’의 연속적 조합 때문인지 모른다. 어쨌든 음식과의 조합이 중요한 술이다. 치즈도 좋고, 돼지고기 기름이 점점이 박혀 있는 마른 소시지도 좋고, 입 속에 기름칠을 한 뒤에 마셔야 한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마시는 것이다. 포도주는 혼자 마시는 술이 아니다. 

수다스러운 술이다. 올리브유가 듬뿍 들어간 짭짤한 음식을 먹으면서, 

이것저것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점점 올라가는 술기운을 느끼는 것이 

지중해 사람들이 포도주를 마시는 방식이다. 취기가 어느 정도 오르면 모두 동시에 떠든다. 들으면서 말한다. 그래야 아침에 일어나 머리가 덜 아프다. 혼자서 마시고 취하면 다음 날 머리가 아파서 초 죽음이다. 


프랑스인의 식사 시간이 긴 것은 포도주가 있기 때문이다. 포도주 없이 맨 정신에 저녁 7시부터 밤 2시까지 식탁에 앉아 있을 수 없다.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은 맨 정신으로 취기가 오른 사람들과 

7시간을 어울려야 하니 너무나 괴롭다. 그렇지만 그들을 따라 같이 술을 마시면 천국이 따로 없다. 



포도나무를 키우는 사람들은 모두 양조학자들이다. 각자가 나름 포도주에 대한 철학과 노하우가 있다. 

품종, 토양, 기후, 재배 기술에 따라 향과 맛이 이러저러하게 달라진다는 

전문가의 언설은 알 듯 모를 듯한 신비의 세계다. 

막걸리나 소주처럼 하나로 통일된 맛을 통해 취기에 도달하는 사람들로서는 불가해한 측면이다.


포도주 양조에는 태양빛이 만드는 당분이 핵심이다. 

포도 껍질의 효모가 포도가 품고 있는 당분과 작용해 알코올이 되기 때문이다. 

당분이 없어지면 발효가 중단된다. 당분 함량은 알코올 도수나 맛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여름 해가 따가울 때는 견디기 힘들지만 포도가 달아져서 술맛이 좋아진다. 

흐린 날이 많아 햇빛이 충분하지 않은 해에는 설탕을 따로 넣는데, 

프랑스는 넣을 수 있는 설탕의 양을 정부가 고시한다. 포도 알갱이 그대로 써야 하니까 

살충제 같은 것을 쓰면 안 되고 포도 따기도 일일이 사람 손으로 따야 한다. 


포도주 숙성이란 “천천히 복합적으로” 변질되는 과정이다. 

포도를 따서 으깬 후 찌꺼기를 제거하고 통에 넣어 두면 시간이 지나면서 색, 냄새, 맛이 변한다. 

숙성 과정이다. 통은 밤나무, 물푸레나무, 참나무를 쓴다. 나무통은 적당한 양의 공기를 공급하고 

나무 향이 스며들게 한다. 길이로 잘라 모아 쇠 띠로 묶어 형체를 만들고 

그 안에 불길이 대충 잡힌 숯을 넣어 구우면 열기로 나무가 팽창해 모양이 잡힌다. 

나무를 통해 수분이 날라 가버리기 때문에 매일 통마다 몇 방울씩 더 넣어준다. ‘천사의 몫’이다. 

프랑스 하늘 위에 있는 천사들은 매일 마실 수 있는 자기 ‘몫’의 포도주가 있으니 날아다니기 수월할 것이다. 프랑스인들이 약간 신경질적이면서 예민한 것은 점심 식사부터 반주로 마시는 포도주에 

약간씩 늘 취해 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숙성 중인 포도주는 시간이 지나면서 술맛이 좋아지지만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성질을 잃으므로 

각 병에 넣어 보관한다. ‘보졸레(Beaujolais)’처럼 새로 나온 술을 마시는 포도주도 있다. 

매년 ‘새 보졸레’를 출시하면서 식음 이벤트를 하는데, 한국이 프랑스보다 7~8시간 빨라 

서울에서 먼저 맛본다. 


저장할 때는 기온 8∼15°, 습도 65∼80°로 일정하게 유지한다. 보관 통 안 온도가 30∼35° 이상이면 

효모가 죽어 발효가 중지되고 식초가 된다. 유럽 서부 석회암 지대에 파놓은 ‘카브(cave, 영어: lodge)’가 

적당한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한다. 병에 넣은 후에는 병마개가 건조하지 않게 병을 눕혀야 한다. 

어둡고 조용하고 통풍이 잘 되는 곳에 두어야 하고 병을 움직인 후에는 일정한 시간 쉬게 해야 한다. 

술 여러 병을 차로 운반하고 나서는 가까스로 잠이 든 아기를 대하듯 조심스럽게 눕혀 두는 

프랑스인들을 보면 원, 요란스럽기는!  


포도주는 4℃ 이하면 향이 사라지고, 온도가 너무 높으면 무거워지고 신선함이 사라진다. 

붉은 포도주는 미리 마개를 따고 유리병에 담아 실온에 맞추기도 한다. 유리잔은 19세기 보급되었는데, 

다리가 있는 둥근 잔에 마신다. 다리를 잡고 마셔야 체온 때문에 술이 더워지지 않는다. 


포도주는 물 잔에 따라 마실 수 없는 프로토콜이 까다로운 술이다. 시음은 마치 종교 의례처럼 엄숙하다. 

잔에 약간 따르고 잔을 움직이며 바라본다. 색이 진하고 연한 정도, 투명도, 

잔의 안 벽으로 흘러내리는 속도를 탐구한다. 그리고 잔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고 입에 한 모금 머금고 

입 안에서 세 번 후룩거린다. 그리고 꽃, 과일, 향신료, 동물 향, 훈현 향, 나무 향 등등 냄새와 맛을 

묘사하는 언설이 이어진다. 어떤 신맛이 있으며 어떤 떫은맛이 나는지도 덧붙인다. 

오묘한 맛을 도저히 표현하지 못하겠다는 듯 현란한 언어를 구사하는 것을 보면 

가히 높은 정신세계이며 예술의 경지다.


어릴 때부터 물에 포도주를 몇 방울씩 타서 마시기 시작하고 매일매일 마신 긴 경력이 있어야 

그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초등학교 급식에서 포도주를 주었던 사람들이니 더 할 말이 없다. 

새벽에 카페 카운터에 기대 서서 동그란 잔에 와인을 마시고 있는 것을 보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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