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술에 대해 관대한 곳이다. 세계 10대 알코올 소비 국가 중에 9개 나라가 유럽에 있다.
전 세계에서 유통되는 알코올의 절반은 유럽에서 생산된다. 1인 당 1년에 소비하는 알코올이 평균
9.5ℓ다. 술의 종류별로는 맥주 190ℓ, 포도주 80ℓ, 독주 24ℓ다. 우리나라도 술에 관해서는 일가견이 있지만,
연간 술 소비량이 8.7ℓ라고 하니 그보다는 약한 편이다.
술은 담배, 고혈압에 이어 유럽인들의 사망 원인 3위다. 그러니까 아프리카, 아랍세계, 아시아로
이어지는 무 알코올, 무 담배인 이슬람 벨트는 대단히 안전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전쟁과
테러 희생자가 많아서... 차라리 술을 마시는 것이 낫지 않을까?
유럽에는 술꾼들이 많다. 포르투갈과 영국은 주민의 17.5%가 일주일에 한 번 취하도록 마신다.
“음주와 가무를 즐기는” 아일랜드 사람들은 그들보다 더 하다. 매일 마시는 것은 아니지만 주중에도
마실 때는 하루 맥주를 6잔이나 마신다. 주말에 마실 때는 그 2배인 12 잔을 마신다.
체코는 1인 당 맥주 소비가 세계 1위다. 프라하에서 맥주는 거의 물이다. 맥주는 유럽 중세기 동안
식사를 대신하는 '물 빵'이었다. “혹한에서 아내 없이는 살아도 보드카 없이는 살지 못한다”는
러시아 사람들도 있다. 보드카는 표준 알코올 도수가 40도인 독주다.
북유럽 사람들도 빠지면 안 된다. 전해지는 역사에 따르면 10세기 바이킹 왕이 종교를 도입하기 위해
여러 곳에 사절단을 파견했는데, 십자가에서 사형당한 허약한 신을 모시는 기독교에 몹시 실망했지만,
그래도 술을 금지하는 이슬람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유럽인들의 술은 크게 3 종류로 나눈다. 북부의 맥주, 남부의 포도주 그리고 남북 공히 개발한 독주들이다.
기질과 문화가 달라 먹는 음식도 다르지만 술의 소비 패턴도 다르다. 북유럽 사람들은 매일 마시지 않지만
폭주하는 경향이 있고, 남유럽 사람들은 많이 마시지는 않지만 조금씩 계속 마신다.
영국인들의 주량은 OECD 평균보다 높은 편이다. 그런데 술꾼이 많기로 널리 알려진 영국에서 1년 중
최소한 1월 한 달은 금주를 하자는 ‘드라이 재뉴어리(dry January)’ 운동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2013년 시작했는데, 10년이 지난 2023년 작년에는 900만 명이 동참했다.
금주하고 보니 집중력도 좋아지고 잠도 잘 자고 돈도 절약도 되고 등등 좋은 점이 많다는 것이다.
알코올 프리 맥주도 등장하고 알코올 프리 바까지 생겼다.
최근에는 이 운동이 프랑스에도 수입되었다. 2024년 올해 1월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국민의 ⅓이 한 달
금주를 고려할 의향이 있다고 대답했다. 간을 쉬게 할 수 있고 수면의 질을 높이며 집중력을 향상하고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술을 마시면 간이 피로하고 수면의 질이 낮고 집중력이 떨어지며 기운도 없어진다는 것이다.
소주에 맥주를 타서 재벌 총수들에게 마시게 한 어느 나라 대통령이 유념해 들을만한 말이다.
실제 프랑스에서 알코올 때문에 1년에 4만 1천 명이 사망하고 있으며, 3만 명이 암에 걸린다는 통계가 있다. 하루 2잔, 1주일 10잔이 권장량인데, 국민의 22%가 권장량을 넘긴다.
프랑스는 포도주와 매우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하나님이 안 계시니 술을 마신다. 술은 하나님을
대신한다.” 작가 뒤라스(Duras)가 했던 말이다.
아무리 포도주가 좋지만 이렇게 불경한 언사를! 술은 신체의 갈증만이 아니라 영혼의 갈증도
해소해 주는 가치의 정점에 있는 음료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된다.
프랑스 요리는 포도주와는 떼어놓을 수 없다. 요리와 적절하게 어울리는 술을 골라주는 것을
업으로 하는 ‘소믈리에’라는 직업도 있다.
프랑스 대통령의 저택인 엘리제궁 소속 소믈리에는 ‘비르지니 루티’라는 이름의 여성이다.
궁의 지하에 있는 1만 4천 병의 술을 관리하며 국빈 만찬 등에 술을 골라 내놓는 장인 중의 장인이다.
대통령 궁에서 여성이 골라주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했던 레스토랑 협회 대표가 있었는데,
이렇게 여성의 음주 능력을 과소 평가하는 분들은 K-drama를 보아야 한다.
술은 여성들이 마시는 것이라는 것이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아직도 집으로 식사 초대하는 것을 상대방을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표시이며 친밀해지는
중요한 한 단계로 생각하는데, 초대하면 보통 4~5 시간 정도 식사를 하며 보낸다.
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술 때문이다. 술 종류를 계속 바꾼다. 식욕을 돋우는 식전주, 요리에 따라
적포도주나 백포도주, 치즈를 바게트와 맛있게 먹게 해주는 포도주, 디저트를 동반하는 포도주 외에도
식사가 끝나고 나면 독주 한 잔이 소화를 돕기 위해 기다린다.
결혼식, 장례식 등 특별한 기회는 술이 풍성하게 곁들여져야 한다. 화초에 물 주는 것과 같은 동사를
사용한다. 물을 흠뻑 머금은 화초의 줄기와 잎처럼 인간도 생기에 넘치게 되는 것이다.
거실의 탁자나 부엌 식탁에 마개를 닫아두고 오며 가며 마시고 손님이 오면 한 잔씩 권하는
풍습은 보편적이었다. 거실이나 서재에 크리스털 병에 술을 넣어두고 한 잔씩 마시는 영화의
장면들은 그 풍습의 고급 버전이다.
술을 통상 식사의 반주로 생각하는 우리 문화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광경이다. 아이들이 식사하면서
마시는 물에 포도주를 몇 방울씩 떨어트려주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믿기 어렵지만 프랑스에서는 1950년대까지 초등학교 급식에서 포도주를 서빙했다.
14세 이하 급식에서 포도주를 금지하기 시작한 것은 1956년이었고, 고등학교에서 금지한 것은
1981년이었다. 먼 과거가 아니다. 4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포도주는 알코올이 아니라 음식이며, 자신들이 술은 마시는 방식은 중독이 아니라는 착각은
이들에게 무리가 아니다.
프랑스에서도 음주 문화가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1960년대 1인이 1년에 소비하는 포도주가
26ℓ였지만, 2018~21년 사이 조사를 보면 절반 이하 10.5ℓ로 줄어들었다. 1991년에는 술 광고를 금지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그럼에도 프랑스의 1년 알코올 총소비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다. 소비자가 4천3백만 명이다.
‘드라이 재뉴어리’를 ‘1월의 도전’이라고 부르며 장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한다.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어떤 좋은 점이 있는지 자꾸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절반으로 줄어든
소비량을 아주 없애겠다는 의지에 넘친다.
사실 정부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9년 보건부에서 캠페인을 벌이려고 했다.
그런데 대통령이 포도주업계와 면담을 하고 나서 취소했다. 2023년에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포도주 생산에 80만 명의 일자리가 달려 있고, 매출액 1조 5천억 유로가 달려 있으니 어쩌겠는가!
알코올 소비세 수입보다 알코올 때문에 생기는 병 치료에 돈이 훨씬 많이 들지만 마크롱 대통령은
맥주 한 병을 원샷하는 동영상을 찍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