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문화 중에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아니 시간이 걸리는 것들이 있다.
유럽 박물관에서 흔히 보는 누드가 그중 하나다. 예술이니까 그렇구나 한다. 이해한다.
그런데 정면으로 바라보기 거북스러운 이 사물에 대한 유럽인들의 기호는 어떻게 생긴 것일까?
고대그리스 사람들은 항아리를 많이 만들었다. 올리브유나 포도주를 담았다.
항아리를 만드는 사람들은 비천한 취급을 받았지만 탁월한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항아리 표면을 그대로 두지 않고 그림을 그려 넣었다.
고대그리스 회화란 화폭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항아리에 있는 그림들이다.
고대그리스 장인들은 특이하게도 사람을 그렸다. 다른 문명권 사람들이 좋아했던 기하학적 문양이나
글자 혹은 자연 풍경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려 넣은 사람의 모습은 더욱 특이했다.
대체로 누드다. 그것도 매우 사실적이다.
가까운 데 두고 보는 기름 항아리의 그림으로는 아주 상스럽고 민망하다.
고대그리스 미술의 또 다른 축은 인물 조각상이다. 신전이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가장 좋아할 선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주로 아름다운 신체를 표현했다.
신들 중에 아폴론, 포세이돈, 헤르메스 그리고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그리고 신과 인간 사이에
태어난 ‘영웅’ 중에는 헤라클레스가 자주 모델이 되었다.
인간도 모델이 되었는데, 운동경기에서 승리했거나 균형 잡힌 훌륭한 몸매를 가진 청년들이었다.
움직이는 아름다운 신체가 한순간 정지된 모습은 그 우아한 역동성으로 압도한다.
그런데 탁월한 조형미를 자랑하는 조각들도 대체로 누드다.
옷을 걸쳤다 해도 몸에 착 달라붙어 맨 몸이 훤히 보이는 ‘젖은 옷’ 양식이다.
인물들의 모습은 당대 문화적 관습을 표현한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스 철학자 3 인방의 두상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셋 모두 수염을 기르고 있다. 수염은 자유 시민의 표시였기 때문이다. 노예는 수염을 기를 수 없었다.
전투에 패배하고 살아 돌아오면 벌로 수염의 반을 깎았다. 수염 반을 밀어버리는 것이 무슨 벌인가?
현대 남성들은 그리스 시대 노예들처럼 면도하지 않는가? 그것도 매일.
수염은 남성성의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니까 수염의 절반을 밀어 버린다는 것은
남성성의 절반을 부정당하는 수치였다.
현대에도 수염을 중요한 남성성의 표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슬람교도들이다.
같은 지중해 문화다.
그렇다면 누드는 그리스 사람들은 벗고 다녀서 생긴 것일까?
고대그리스 사람들은 몸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정치를 하려면 몸이 좋아야 했다.
권력을 잡으려면 헬스부터 해야 했다. 몸은 지속적인 관리 대상이었다.
도시국가들마다 신체를 단련하는 공공시설을 운영했다. ‘김나시온’이다.
목욕 시설, 마사지 룸, 올리브유와 모래를 파는 가게가 있는 복합 시설이었다.
체조, 공치기, 권투, 씨름과 같은 운동을 했다.
‘김나시온’은 ‘누드’에서 온 단어다. 신체 단련을 누드로 했다는 것이다.
사실 고대그리스인들이 입고 다니던 치렁치렁한 원피스로는 운동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은 문제를 간단히 해결했다. 스포츠웨어를 개발하는 대신 맨몸이 되는 것이었다.
누드는 운동 복장이었다.
신체 기량을 겨루는 올림피아 경기도 누드로 했다.
참가자들은 경기가 시작되기 전 옷을 벗고 온몸에 올리브유를 바른 후에
모래를 끼얹고 경기장으로 나갔다. 경기 복장이었다.
그림이나 조각에서처럼 완전 누드였을까? 고대그리스의 스포츠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렇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실험해 보니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다.
특히 중요한 신체 기관에 치명상을 입힐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소한 그 기관을 보호하는 장치는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동서고금 대부분 사회에서는 누드를 외설과 관련짓는다.
욕망을 자극해 사회를 문란하게 하므로 보이지 않게 가려야 한다고 믿는다.
고대그리스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누드를 인간 몸의 한 국면으로 보았다. 그것도 미적인 국면으로 보았다.
그리고 우리도 같은 인식을 하게 했다.
고대그리스인이 남긴 누드에 대해서 누구도 음란하다거나 외설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누드를 성적 사물이 아니라 미적 사물로 인식했고 그렇게 인식할 수 있는 지평을 열어준 것이다.
누드는 고대그리스인이 창안한 미적 범주다.
고대그리스가 열어 주었던 누드의 미적 지평은 기독교 시대가 되면서 닫히게 된다.
창세기에 따르면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맨 몸으로 살았으나 죄를 짓고 에덴동산을 떠나면서
수치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맨 몸은 잃어버린 천국 에덴동산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기독교는 천국보다 선악과를 따먹은 원죄와 관련된 것으로 맨 몸을 정의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화가 마사초가 그린 ‘에덴동산에서의 추방’을 보면
인간의 몸에 대한 기독교의 시선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아담은 자신의 몸을 차마 볼 수 없다는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고,
이브는 두 손으로 몸을 가리고 입을 벌린 채 괴로워한다.
인간의 몸은 진정으로 추하고 불결하고 고통스럽다.
중세기 동안 유럽인들이 몸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이었다.
철저하게 억압되었던 누드는 르네상스 시대에 귀환한다.
그림, 조각, 장식 속에서 수없이 많은 누드를 만난다.
시스티나 성당에는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정화 '천지창조'와 벽화 ‘최후의 심판’이 있다.
'최후의 심판'은 압권이다. 400여 명의 인물이 ‘거의’ 누드로 그려져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성자들까지 포함된다.
벽화를 의뢰한 교황은 미켈란젤로가 완성한 그림을 보자 경악했다. 벽을 깨부수려고 했다.
그러나 화가의 노고가 너무 엄청나서 그대로 두었다.
트리엔트 종교 회의는 약간의 옷을 그려 넣어 부끄러운 부분을 가리라고 명령했다.
우람한 누드들에 한 조각의 천이 흘러내릴 듯 걸쳐 있게 되었다.
누드는 건물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도 있었다.
흰 대리석을 깎아 만든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은 피렌체 광장 노천에서 벗은 몸을
지금까지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유럽의 회화나 조각에 나타난 누드를 일일이 열거할 수 있겠는가?
누드는 유럽 문화에서 보편적 현상이었다.
유럽의 예술 작품 속에 누드는 점점 남성의 몸을 외면하고 여성의 몸으로 바뀌어 갔다.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 왕이었던 프랑수와 1세의 거처였던 퐁텐블로 성 내부로 들어가면 눈을 돌릴 곳이 없다. 천정화와 벽화에 누드가 있고 벽화들 사이에 누드 조각들이 있다.
건물 밖도 전신 누드나 젖은 옷을 반쯤 걸친 윗몸 누드 조각들이 넘친다. 누드를 안 볼 방법이 없다.
프랑수와 1세의 아들 앙리 2세 때에는 실존 인물의 누드가 등장했다.
앙리 2세보다 20세가 연상이었던 애인 디안 드 푸와티에는
우윳빛 피부에 아름다운 몸매를 가졌던 귀부인이었다.
자신의 누드에 매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반신과 전신 누드를 그림으로
여러 점 남겼을 뿐 아니라 말년에 살았던 아네트 캐슬을 자신의 누드 조각으로 장식했다.
성으로 들어오는 정문 위쪽을 청동제 누드로 장식하고, 정원은 그녀의 누드 조각상으로 장식했다.
거의 실물 크기다. 자신의 누드를 별로 민망해하지 않는 대단한 과시욕이었다.
앙리 2세는 애인의 과시욕만이 아니라 다른 여성들의 몸매 과시욕을 허락하는 데도 기여한 왕이었다.
그의 프랑스 궁정에서는 드레스의 목 부분을 깊게 파서 젖가슴의 일부를 드러내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이러한 전통은 시공간을 넘어 21세기 패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서양에서 가장 공식적인 여성의 의상은 긴 드레스다. 파티만이 아니라 중요한 이벤트에 입는 특수 의상이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드레스들은 이상하게도 발까지 몸 전체를 완벽하게 감추면서도
어깨만은 활짝 드러내고 젖가슴의 일부를 충분히 드러낸다.
일상에서도 볼 수 있다. 목 선이 깊이 파진 셔츠를 입거나 블라우스의 단추를 한 두 개 풀어
가슴의 일부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 광경이 가깝게 있다고 즐거워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가지만, 정작 잘 보려고 하면 ‘희롱’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
난감한 사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