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 티아레트: 협죽도 그리고 사람들

by 스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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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펼쳐진 갈색 벌판에 선명한 분홍색 꽃이 피어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멀리 눈이 닿는 끝까지 살펴보아도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었다. 메마르고 황량한 땅에 화사하게 피어 있는 꽃나무 몇 그루는 주위 환경과 너무 대조적이어서 당혹스러웠다. 물은 어디에? 모래밭에 골이 패어 있었지만 물은 보이지 않았다. 로리에-로즈, 우리말로 협죽도, 그 꽃나무의 이름이다. 꽃보다는 무협지에 등장하는 긴 칼이 떠오르는 단어다. 칼처럼 무서운 꽃나무다. 낙타가 그 잎을 먹으면 금방 죽는다. 아, 몸 안에 독을 품고 경계해야 살아남아 꽃을 피울 수 있는 땅이구나!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더 섬뜩한 이야기를 들었다. 별로 특별하게 보이지 않는 모래 바닥을 가리키며 알제리 내전 동안 사람들이 몰살당한 곳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런 무시무시한 사건을 왜 이야기하는 것일까? 설마 지금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겠지? 순간적으로 공포감이 지나갔다. 그때 이해했다. 왜 여러 대 차들이 방문단과 같이 움직였는지, 왜 건장한 남자들이 그렇게 차에 한가득 타고 있는지. 아직 안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무심코 보았지만 경찰차도 호위하고 있었다. 대단위 행정구역 ‘윌라야’의 경계를 넘어갈 때면 따라왔던 경찰이 떠나고 다른 윌라야 소속 경찰차가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알제에서 남서 방향으로 270㎞ 떨어진 고원지대의 도시 티아레트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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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 내전? 1990년 대 일어난 사건이었다. 1962년 프랑스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알제리는 사회주의 이념을 채택하고 사하라에 풍부하게 묻혀 있는 지하자원을 활용해 중공업을 중심으로 경제를 발전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아직 산업화 역량이 모자랐고 전 세계를 강타한 오일쇼크가 있었다. 경기가 침체되고 실업이 늘어났다. 일반 국민 사이에 불만이 쌓여갔다. 혼란 속에서 이슬람 정당이 지지를 받게 되었다. 선거에서 이슬람 정당의 압도적 승리가 예상되자 군이 개입해 중단시켰다. 그리고 10여 년 동안 유혈 사태가 계속되었다. 20만에 가까운 인명이 희생되었다고 추산한다. 알제리에 진출해 있던 한국 기업 대우가 건설해 지금까지 잘 버티고 있는 힐튼호텔의 한국인 사장도 살해되었다. 그때 외국인들이 모두 떠났지만 한국인들은 끝까지 남아 있어 친구로 느꼈다고 말하는 알제리 사람을 여러 명 만났다. 국민 대통합을 선언하고 내전이 끝났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 우리가 도착한 것이다. 공항에서 총을 들고 짐 검사를 하는 것도 아, 이곳은 이렇구나 하는 정도로 받아들이고 특별히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돌아보면 제정신이 아니었다.


알제 공항에 도착한 다음 날 티아레트로 출발한 것은 무엇을 알고 선택해서 간 것은 아니었다. 일이 그렇게 되었다. 선입견 없이 낯선 풍경 그리고 낯선 사람과 만나는 것이 진정한 여행이다. 그런 생각으로 아무 계획 없이 알제 공항에 내린 무모한 한국인들을 안내해 주겠다고 선선히 나선 너그러운 알제리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티아레트는 그의 고향이었다. 그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아무것도 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알제리 주재 한국 대사님 부부의 배려가 없었으면 여행 자체가 불가능했으니 고마운 마음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출발 장소에 도착해 잠시 기다리니 다른 팀이 나타났다. 알제리 주재 캐나다 대사 일행이었다. 이미 예정되어 있던 그의 방문단에 우리가 들어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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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낮이가 심한 붉은 땅을 오전 내내 달려 도착한 대학의 큰 강당에는 학생들이 한가득 모여 있었다. 캐나다 대사가 참석하기로 예정된 행사는 티아레트 대학의 학위 수여식이었다. 그와 함께 귀빈석에 앉아 학생들의 열렬한 환영의 박수도 받고 선물도 받았다. 먼 지구 반대편에서 왔다는 것만으로 귀빈이 되는 것은 정말 예상도, 상상도 못 했던 뜻밖의 이벤트였다. 한 일도 없이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고, 큰 일을 치르는 집에 빈 손으로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그때 느꼈던 미안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몇 가지 일을 계획하고 실천에 옮겼다. 쉽지 않았다. 특히 학생 교류가 어려웠다. 교육체제가 워낙 달랐다. 알제리는 국립대학밖에 없다. 대도시나 각 윌라야마다 하나씩 설립되어 있는데, 무상이다. 기숙사도 거의 무료에 가깝다. 돈이 들지 않으니 재학생 수가 최소 2~3만 명이다. 고액의 등록금을 내야 하는 우리 대학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다음 날 캐나다 대사는 이미 떠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출발했다. 멀지 않은 마을의 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프렌다, 마을 이름이었다. 자그마한 키에 빼빼 마르고 눈이 큰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건물로 들어가 책들이 빽빽하게 차 있는 서가를 돌아보게 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동굴로 안내했다. 다른 사람들과 주고받는 말을 보아 마을 문고를 맡아 운영하며 때때로 외부 인사들이 방문하면 동굴을 소개하는 직원 같았다. 여기가 바로 이븐 할둔이 『무캇디마』를 저술한 곳입니다. 남자가 그렇게 말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얼마나 신성하고 중요한 장소인지 감격하기를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뭐 그렇게 간절한 눈빛을? 그때 들었던 생각이 나중에 미안해졌다. 당시에는 이븐 할둔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 그가 남긴 저작이 얼마나 뛰어난 업적인지 몰랐다. 그래도 아, 그렇습니까? 하면서 눈치 빠르게 감탄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어려운 일도 아닌데!

이븐 칼둔 혹은 할둔? 알파벳으로는 ‘Kh’로 쓰니 ‘칼둔’으로 읽게 된다. 그러나 실제 아랍어를 들으면 ‘할둔’으로 들린다. 할둔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14세기 이슬람 세계의 사상가로 우리나라에도 저서가 번역 소개되어 있다. 튀니스에서 태어나 마그레브 여러 왕조 치하에서 고위 관료로 활약했던 그는 자신의 관찰과 경험을 분석해 『무캇디마-역사서설』를 남겼다. 뛰어난 역사적 성찰을 담고 있는 중요한 저작이다. 특히 제국의 흥망성쇠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제국론은 로마, 몽골, 오스만 튀르크 등 역사 속에 나타났다 사라진 제국들의 성립, 성장, 멸망 과정을 설명하는 데 유용한 틀일 뿐 아니라 일반 정치권력의 형성과 쇠퇴를 이해하는 데도 적절한 틀로 평가받는다. 700년 전 역사가의 이론이지만 학자뿐 아니라 정치가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미국 대통령 레이건도 공식 연설에서 몇 차례 언급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급격하게 약화되고 있는 유럽연합이나 대통령이 과격한 정책을 펼치고 있는 미국에서 할둔의 도식에 나타나는 제국 말기 현상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아사비야’, 응원 구호처럼 들린다. 그런데 전혀 아니다. 이븐 할둔이 제국의 성립과 쇠퇴를 주도하는 동력으로 보았던 개념이다. 집단이 하나가 되어 행동하게 하는 사회적 에너지 혹은 집단적 연대의식이다. 생존이 어려운 사막이나 스텝 같은 주변 유목민이 자신들보다 훨씬 풍요롭고 강력한 왕국을 무너트리고 제국을 건설해 팽창하고 번영하게 하는 동력원이다. 그러나 번영이 절정이 이르면 아사비야는 점차 약화되어 제국은 쇠퇴하고 멸망한다. 제국도 인간과 같다. 태어나 성장하고 절정에 이르렀다가 사라지며 자연 수명을 산다. 한 부분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는 저서를 알제리 프렌다에 머물면서 집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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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유적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허허벌판에 제법 높은 야산 아래 차가 서더니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게 했다. 까칠한 풀들에 덮여 있는 큰 무덤이었다. 돌이 둘러싼 하단 위로 봉분이 솟아 있어 우리의 왕릉과 거의 비슷하게 보였다. 이븐 할둔의 무덤? 아니다. 알제리를 떠나 이집트에 가서 책도, 인생도 마무리했으니 그의 무덤일 수 없다. 좁은 입구로 들어가 내부를 보겠느냐고 물었지만 조용히 있었다. 그 보다 훨씬 더 큰 이집트 피라미드도 무서워서 들어가 보지 못했는데… 정확하게 누구의 무덤이었는지 밝혀지지 않은 것 같았다. 젊은 해설사가 나타났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정도 규모의 무덤이라면 상당한 권력자였을 것이다. 아사비야가 충만한 한 때 사막과 멀지 않은 고원에 왕국을 건설한 부족의 지도자의 무덤인 것은 아닐까?


그곳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높은 언덕 위에서 아스라이 펼쳐 있는 평원을 바라보며 천 년의 고독을 견디고 있는 권력자의 무덤이 아니었다. 산을 내려오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무슨 일이었는지 설명을 듣지 못했지만 나이 든 어른들이 여러 명이 박하차와 꿀과자가 놓인 소반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그을린 얼굴의 남자들이 웃으며 박하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순간 감탄사가 나왔다. 그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는 곳은 좁은 실내가 아니라 바람이 일기 시작하는 황토색 평원 한가운데였다. 놀라웠다. 해가 넘어가는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붉은 땅에 앉아 있는 흰색 터번과 흰색 간두라 차림의 모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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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가나 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특히 티아레트를 방문했던 기억 속에는 사람들이 유난히 더 많다. 알제에서 티아레트로 내려가는 중간에 있는 도시 밀리아니를 지나 얼마 가지 않아 작은 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눈앞으로 확 들어오는 흰색 천들! 길 양편으로 흰색 간두라 차림의 남자들이 웅성웅성 모여 죽 늘어놓은 긴 의자에 붙어 앉아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남자들이 그렇게 집밖으로 몰려나와 함께 간단한 식사를 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다. 티아레트 근교에 있는 가축 시장에 갔었다. 넓고 시끌시끌했다. 우리가 지나가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양 떼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것 같았다. 양가죽으로 가방 같은 일용품을 만들어 파는 가게들이 주변에 있었다. 들어갔지만 제품이 너무 조악해서 사지 않았다. 그냥 한 두 가지 사도 될 것을! 라구아트로 가는 중간에 한 남자가 낙타 색깔 부르누스를 입고 트럭 뒤 칸에 서서 주변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지나가고 있었다. 신임 시장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뻣뻣하게 서서 턱을 위로 치키고 고개를 뒤로 젖힌 그의 자랑스러운 모습이 기억 속에 여전하다. 저녁이 되니 축하연이 벌어졌다. 아주 큰 집이었다. 올리브기름을 뿌린 야채와 양고기 쿠스쿠스를 먹고 나니 다른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문을 여니 아주 넓은 방에 흰색 간두라에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른 할머니들이 죽 둘러앉아 있었다. MT 온 대학생들 같았다.


한 번 보고 다시는 볼 수 없었던 그 많은 사람들, 그들은 낯선 외국인에게 친절했다. 소개를 받고 인사를 했다. 남자들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우리가 국기에 대해 경례하는 것 비슷했다. 여자들은 선하게 웃었다. 내 눈을 조용히 쳐다보았다. 모두가 내게 말했다. 잘 왔습니다. 잘 지내다 가세요. 메마르고 황량한 땅에 협죽도는 독을 품고 살아 있지만, 사람은 독이 없이도 잘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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