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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on Nov 04. 2022

[데킬라 선라이즈] 01화

하건해의 독백-01

그녀를 죽였다.


내가 죽였다.


내가.

그녀를.

죽였다.     


그녀를 위한 복수로 쥐어 든 글록-19.

권총이 뱉은 탄환은 그녀의 심장 한복판으로 날아갔다.

내가 그녀를 죽인 것이다.     


몸을 일으킨다. 정수기로 다가가 컵에 찬물 한 잔을 받는다. 벌컥 들이켠 냉수는, 그러나 체온을 낮추지는 못한다.     


온몸이 안으로 타들어 가는 느낌이다. 제멋대로 뛰는 심장의 속도는 늦추지 못해도, 우선 머리를 차갑게 식혀야 하는데... 생각을, 생각을 해야 한다, 생각을.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빨리 판단해야 한다.     


두 시간 전.

7월 16일 오전 2시.     


산장으로부터 1km쯤 떨어진 숲 근처 공터. 사이드 브레이크를 채우고 시동을 껐다. 백만 마리가 모인다고 해도, 새벽 풀벌레가 우는 소리는 자동차 엔진 소리를 덮지 못한다. 그래도 이 정도 거리라면 외부인의 접근을 산장에서는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 담배에 불을 붙였다. 지포 라이터. 이지가 사 준 것이다. 주머니에 넣었다. 저승길에 꼭 들고 가고 싶었다.     


장마가 잠시 쉬어가는 산속의 공기는 불쾌한 냄새에 물든 습기로 잔뜩 무거웠다. 젖은 진흙창 위보다는 풀숲 위를 걸을 때 나는 소리가 더 작다는 사실을 깨달을 무렵에는, 어느덧 두 눈동자도 어둠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2층 건물. 산장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은 없었다. 잠에 빠진 짐승처럼 웅크린 산장. 외벽의 붉은 벽돌들이 달빛에 저항하기라도 하듯, 낮 동안 품었던 태양 빛을 희미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높이로 봐서는 세워둔 이유가 침입 방지는 아닌 게 분명한 나무 울타리를 가볍게 뛰어넘자, 마당에 펼쳐진 잔디 비린내가 콧속을 휘저으며 뛰쳐 들어왔다. 마치, 잠시 후에 맡게 될 피비린내에 미리 적응하라는 듯.     


잰걸음으로 산장 건물 외벽으로 다가갔다. 건물 정면에서 봤을 때 오른쪽. 우측 외벽 중앙의 출입문은 물론 잠겨 있었다. 문 옆에 지그재그로 겹겹이 쌓인 골판지 상자들. 조심스레 맨 위에서 두 번째 상자를 끄집어냈다. 상자 속. 규철이가 놓아두었을 열쇠. 금속 표면에서 돋아나는 둔탁한 차가움이 손가락 끝을 통해 몸속에 들어와 심장을 두드렸다.     


또 하나의 둔탁한 차가움. 아까부터 심장 가까이 도사리고 있는 재킷 왼쪽 안주머니 속 글록-19 권총 무게는 600g. 성인 남성 심장의 무게는 300g. 이제 잠시 후면 이 권총은 딱 제 무게만큼인 성인 남자 둘의 심장을 찢을 것이다. 그놈, 그리고 나.     


이지야. 조금만 기다려 줘. 이제 곧 끝나.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줘. 금방 갈게.     


규철이가 보여준 산장 도면과 사진 그대로, 2층으로 오르는 내부 계단은 시멘트 재질이었다. 처음 도면과 사진을 보고서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이 계단 소재였다. 나무 계단이 아니라 다행이다. 아무리 착지 소음이 적은 신발을 신더라도, 나무 계단에서 나는 특유의 삐걱 소리는 막을 방법이 없으니까.     


산장 울타리를 넘어 2층 복도까지 이르는 동안, 내가 낸 것이든 아니든, 귀에 들리는 소리는 없었다. 적막에 휩싸여 복도 끝에 선 채로 어둠을 향해 미소를 흘렸다. 이제 내 삶은 몇 분 남지 않았다. 최대한 시간 간격을 좁게 할 것이다. 그놈의 심장을 한방에 쪼갠 직후에 주저 없이 나를 종결할 것이다.     


바지 오른쪽 뒷주머니. 피에 젖지 않도록 랩으로 감싸 비닐봉지에 밀봉한 유서를 마지막으로 확인하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의 검은 막 위로 이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웃음이 많았다. 웃을 때마다 분홍 입술 사이로 가지런히 빛나던 하얀 이. 맑고 한없이 또렷한 눈망울. 바람에 흩날리는 긴 생머리가 그녀의 목덜미를 간질일 때마다 황홀하게 번지던 그녀 향기. 그녀는 한 줌 재조차 남기지 못하고 세상과 작별했지만, 그녀는 그대로 내게 남아 있었다. 영원한 스물여섯 살 푸릇한 아름다움으로 멈춘 채 그녀는 변함없이 내 안에 머물러 있었다.     


이제 악마의 숨통을 끊고 나서...     


더는 그녀가 외롭지 않게, 그녀의 손을 잡을 때가 되었다. 함께 영원 속으로 잠기자.     


목표물이 들어 있는 침실의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심호흡 한 번. 왼손으로 손잡이를 돌리고 방문을 미는 것과 동시에 오른손은 재킷 안주머니의 권총을 꺼냈다.     


은회색. 반쯤 열린 커튼 틈새로 침실에 들이친 달빛은 은은한 회백색이었다. 담담한 색깔의 달빛 부스러기들은 ‘살인 직후 자살’을 앞둔 마음을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방 오른쪽에 놓인 침대를 향해 총구를 겨누며 성큼 다가섰다.     


잘 가라. 악마 새끼야!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런데... 악마가?

없다!     


침대가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당혹감은 길지 않았다. 발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휙 돌리자 침실 왼쪽 구석, 은회색 달빛이 채 닿지 못한 짙은 어둠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악마의 윤곽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1초.


어둠 속 기둥의 정체가 악마 새끼 그놈이라는 확신을 다시 확인하고 글록-19의 방아쇠를 당기기까지 걸린 시간은 1초였다. 그 1초가 1천 년처럼 느껴졌다. 총신을 떠나 총구를 통과한 탄환은 굉음으로 은회색 달빛 조각들을 잘게 부수며 방구석 시커먼 어둠으로 날아갔다.     


방아쇠를 당긴 순간에 알았다. 이 단 한 발로 악마의 심장을 터뜨릴 수 있겠다는 명중의 확신. 그런데...     


곧바로 글록-19 총구를 입으로 가져가는 사이에 들려온 단말마의 비명은 여자 목소리였다.     


?!     


차갑고 딱딱한 권총 총구를 도로 입에서 꺼냈다. 2미터 앞에 쓰러져 있는 비명의 주인 얼굴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몸뚱이만 꿈틀거릴 뿐이었다.     


문 근처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올렸다. 천장 조명등이 켜지고, 내 눈에 들어온 죽어가는 얼굴은.

 

...... 이지였다.     


아... 아... 이...     


총을 내던졌다. 이지를 향해 뛰어갔다. 바닥에 누운 그녀를 끌어안았다. 눈을 뜨고 있었다. 그녀의 왼쪽 가슴에서 뿜어 나오는 선혈이 내 얼굴과 옷을 붉게 물들였다.     


이... 이... 이지야... 지금 여기 왜... 지금 왜...     


절명의 순간에도 그녀의 눈은 감기지 않았다. 그녀의 심장에서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핏줄기가 잦아들 때까지 그녀를 안은 채, 그 눈을 바라보았다.     


죽었던 그녀가 살아 있었다.     


그리고 살아 있던 그녀를 죽였다. 내가, 내가 그녀의 심장에 총을 쏘았다.     


완전히 엉켜 뒤섞인 머릿속. 덜덜 떨리는 온몸.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을 시작조차 못 하던 바로 그때.     


침실 창밖에서 자동차 시동 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하게 권총을 집어 들고 창문을 열었다. 괴괴한 달빛을 맞으며 중형 세단 한 대가 산장 정문을 빠르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곧바로 권총을 조준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지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복수는커녕, 내 손으로 이지를 죽였다. 글록-19의 총구를 다시 입에 물었다. 눈을 감았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이 엉망진창 비극의 공연장에서 나가야겠다는 충동뿐이었다. 방아쇠에 올린 검지에 지그시 힘을 주다가,     


눈을 떴다.     


죽는 건 언제든 할 수 있다. 일단 알아내야겠다. 기가 막힌 이 상황이 누구의 설계인지를 알아내야 한다. 그리고 악마 새끼를 다시 찾아내서 죽여야 한다. 내가 죽는 것은 그다음 일이다.     


탁. 권총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뜨고 있었다. 허공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는 그녀의 눈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가슴에서 솟구쳐 나온 핏줄기는 이미 침실 바닥을 붉게 물들여 덮고 있었다. 피비린내가 달콤하다는 엉뚱한 생각을 갑자기 멈춰 세운 것은, 머릿속 한구석에서 스스로에게 외치는 내 목소리였다.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한다!     


서둘러야 한다.     


침실 왼쪽 방은 욕실이었다. 아마도 이지는 여기에 있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밖으로 나온 걸까. 피범벅이 된 모든 옷과 신발을 벗어 침실 가운데 바닥에 던졌다. 욕조 위에 놓인 샤워용 헤어 캡을 손에 씌우고 샤워 건을 쥐었다. 몸에 묻은 피를 물로 씻어냈다. 방바닥에 흥건한 핏물을 피해 발걸음을 조심히 옮겨 침실 오른쪽 구석의 옷장을 열었다. 다행이었다. 남녀 구분 없는 옷들이 옷장 구석에 몇 벌 걸려 있었다. 여름이라서 또 다행이었다. 적당한 셔츠와 바지를 한 장씩 골라 걸쳤다. 서랍을 열고 제일 두터워 보이는 양말을 꺼내 신고, 그 아래 서랍 속에서 면장갑을 찾아 손에 끼었다. 그리고는 침실을 나서 1층 보일러실로 향했다.     


도면을 기억해 두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깊은 산속 여기까지는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는다. 기름보일러가 분명할 것이다. 보일러실에 기름통들이 있을 것이다.     


등유 한 통은 침실 바닥에 벗어둔 옷가지와 신발 위에 붓고, 반 통은 욕실에, 반 통은 목재 침대와 옷장, 책상에 뿌렸다. 이어 손에 낀 면장갑으로 방문, 창문, 옷장 손잡이와 라이터 표면을 재빠르게 문질러 닦아냈다. 방안 손길이 스친 모든 곳을 눈길로 훑으며 침실 안을 둘러보는데, 책상 위 반짝 빛나는 작은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납작한 원통형 은색 상자. 오르골?     


묘한 이끌림. 권총과 함께 오르골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문 앞에서, 이지가 사 준 지포 라이터를 켜기 전, 내가 죽인 이지를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마비된 듯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상처를 비집고 피가 솟았다.     


피를 삼키며 불붙은 라이터를 방에 던졌다.     


화라락 불꽃이 번지는 열기를 등에 맞으며 계단을 내려가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희미한 웃음소리가 목 뒤를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다시, 입술에서 치솟는 피를 삼켰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좀 전에 들어왔던 건물 우측 현관문. 손잡이에 묻은 지문을 닦아내고는, 물비린내가 여전한 잔디 위를 전력으로 질주해 낮은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차를 세워둔 곳으로 미친 듯이 달렸다. 몇 번인가, 축축한 진흙창 사이 도사리고 있던 깨진 돌멩이 조각들이 양말을 찢고 들어와 발바닥을 찔러댔다.     


운전석 문을 열었다.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잠시 주춤거렸던 장맛비가 구름을 뚫고 땅으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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