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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on Nov 07. 2022

[데킬라 선라이즈] 02화

지은도의 독백-01

오늘 그의 표정은 평소보다 더 지쳐 보인다.


항상 그렇듯, 오늘도 그는 말이 없다. 저녁 7시가 조금 넘어서 가게를 찾은 그는, 항상 그렇듯, 바 맨 구석에 앉는다. 평소보다 더 딱딱한 표정과 말투로 호세 꾸엘보 1병을 주문하고서 텅 빈 가게 안을 휙 둘러보더니 그가 나를 쳐다본다. 무슨 말을 할지 나는 안다.


“저, 손님 없으면, 담배 좀 피워도 될까요?”


“네.” 항상 그렇듯, 물을 조금 따른 종이컵을 그 앞에 가져다 둔다.


항상 데킬라만, 그중에서도 호세 꾸엘보만, 그는 마신다. 데킬라와 함께 내놓는 소금과 레몬을, 그는 손도 대지 않는다. 하지만, ‘소금이랑 레몬은 주지 않으셔도 돼요.’라는 말을 그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어차피 건드리지도 않을 소금과 레몬이지만 빠뜨리지 않고 곁들여 낸다.


그의 이름은 하건해. 남은 데킬라를 보관할 때면 그는 명함 대신 이름 세 글자를 메모지에 적어 주곤 했다.


푸르스름한 담배 연기 사이로 하건해의 눈빛이 번뜩인다. 3일 전에 왔을 때와는 사뭇 다른 눈빛이다. 3일 전의 그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좀체 웃지 않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스치는 것을 그날에는 세 번인가 보았었다. 내가 미처 보지 못했을 때도 몇 번쯤 그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을 것이다. 그 미소에 숨이 살짝 멎었었다.


호세 꾸엘보 한 병과 간단한 안주를 그 앞에 내놓고, 그가 앉은 자리에서 좀 떨어진 바 안쪽 의자에 앉는다. 가게가 한가할 때는 혼자 오는 손님 앞에 마주 앉아 주거니 받거니 잠깐 말벗 노릇을 하지만, 이 남자는 주문과 계산 외에는, 단 한 번도 나와 말을 섞지 않았다. 침묵 속에 멀뚱히 마주 앉는 것이 어색하기도 하지만, 조금 비켜서 떨어져 앉는 편이 그의 얼굴을 가끔이라도 흘끔거리기에 편하다.


그런데, 이지, 이 계집애는 왜 어제부터 전화를 받지 않는 걸까. 메시지에도 답이 없고. 스마트폰을 열어 또 한 번 신호를 보내본다. 긴 신호의 끝에, 오늘만 다섯 번째 듣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연결이 되지 않아...”


‘야! 안이지!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메시지 보면 바로 전화해 줘.’


메시지를 남기고 스마트폰을 닫으려다, 포털 사이트를 열어 뉴스를 구경한다. 손가락 끝을 스치며 휙휙 올라가는 뉴스들 틈에서 여기 이 도시의 이름이 눈에 띈다. 뉴스를 연다.


“...... OO산 남측 소재 산장에 화재 발생. 2층 내부 침실 전부 불에 타. 인명피해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OO산에 산장 같은 게 있었나? 무심코 뉴스를 보다 스마트폰을 닫으려는데, 출입문이 열리며 인기척이 난다.


“어서 오세요. 혼자 오셨...?”


덩치 큰 남자는 대답 없이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바 맨 구석의 하건해 곁에 앉는다. 놀랄 일도 아닌데 놀랍다. 그가 누군가와 바에 나란히 앉는 건 처음 본다.


“여기 잔 하나만 더!”


말끝만큼 머리도 짧고 싸가지도 짧은 검은 양복은 보아하니 건달이다. 데킬라 잔을 건달 앞에 툭 내려놓고 발길을 돌리는데, 덩치 큰 건달이 한마디 붙인다.


“여기 냉수 좀 가져와! 레몬이나 라임 넣어서!”


주방으로 들어가 레몬을 자르다가 문득 뭔가 생각이 떠오른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 그때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후회를 할 수도 있겠다는 예감도 함께 든다. 그래도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로 한다.


해서는 안 되는 짓임을 안다. 하지만 호기심은 그보다 더 강하다. 하건해를 조금 더 알고 싶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싶다. 얼굴과 이름 석 자 <하건해>, 그 이상으로 그가 궁금하다.


얇게 저민 레몬 조각들이 담긴 물병을 두 남자 앞에 가져다 놓는다. 그와 동시에, 두 남자가 눈치 못 채게 바 안쪽 테이블 아래 서랍에 스마트폰을 내려놓는다. 녹음 버튼은 주방에서 나오기 직전에 눌러 두었다.


“말씀 나누고 계세요. 잠깐 화장 좀 고치고 올게요.”


심각한 얼굴의 두 남자는 대꾸도 하지 않는다. 바에서 나와 홀 쪽으로 향하다 뒤를 돌아보니, 하건해는 큼지막한 물 잔에 데킬라를 콸콸 붓고 있었다. 홀 맨 구석 테이블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매니저 언니 앞을 지나가며 말을 남긴다. “나가서 담배 좀 피우고 올게.”


화장실과 담배 두 대, 길어야 한 15분 되었을까. 가게로 돌아왔을 때, 하건해는 순식간에 만취해 있었다. 호세 꾸엘보는 1/3도 남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취하는 건 처음 본다.


“그만 드시지요. 형님.” 잔을 채우려는 하건해의 손을 깍두기 머리가 붙잡는다.     

“놔. 이거 놔! 이 새끼야!”

“취하셨습니다. 이제 그만...”


쿵! 하건해의 머리와 상체가 바 테이블 위로 고꾸라진다. 깍두기 머리의 표정에 당황한 기색이 번지더니, 그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낸다.


“차 어딨냐? 여기 가게 이름이...” 나를 힐끗 쳐다보는 건달에게 재빨리 대답한다. “<선라이즈>에요.”


“<선라이즈>! 애플 나이트 건물 2층이야. 지금 빨리 와!”


건장한 체구의 남자 둘이 가게로 들어와서는 하건해를 조심스럽게 부축해 데리고 나간다. 깍두기 머리가 지갑에서 5만 원 지폐를 세지도 않고 꺼내어 테이블에 내려놓고 그 뒤를 따라 나간다. 열 장이다.


“저기... 이거, 너무 많은데...”


“나머지는 형님 이름으로 데킬라 몇 병 보관해 놔!”


두어 걸음 내딛던 건달 두목이 고개를 돌리고 씩 웃는다.

“근데... 가게 이름이 <선라이즈>라고? 해 떨어지면 문 여는 술집 이름이 <일출>이야? 웃기는구만.”


하건해 일행이 가게를 나서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손님들이 밀려들기 시작한다. 주문을 받고, 술과 안주를 나르고, 취객들의 치근덕거림을 은근슬쩍 받아넘기며 비위를 맞추다 보니, 어느새 새벽 두 시다.


“은도야. 오늘도 고생 많았어. 조심히 들어가.”

“네. 언니도요. 내일 봐요.”


택시에서 내려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아파트 현관문을 열자마자, 주방 냉장고에서 캔맥주 하나를 꺼낸다. 가게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게 철칙이다. 퇴근 후 캔맥주가 바텐더 지은도의 낙이다.


몇 시간 동안, 이 순간만 기다렸지... 스마트폰의 녹취를 플레이한다.


//////     


“말씀 나누고 계세요. 잠깐 화장 좀 고치고 올게요.”


“형님...”


“......”


“다시... 이렇게 형님 얼굴 볼 수 있게 된 건... 정말 다행입니다.”


“......”


“식사는 하셨습니까?”


“......”


“어떻게 된 건지...”


“이지가...”


“네?”


“규철아... 이지가 살아 있었어.”


“네?”


“내가 쏜 게 이지였어.”


“...... 무슨 말씀인지?”


“이지가 살아 있었다니까. 산장 2층 방에 있던 건 이지였어.”


“아니 그게...”


“차도필이가 아니라, 안이지가 그 방에 있었다. 난 차도필한테 총을 쐈는데, 그 총을 맞은 건 이지였어.”


“형수님은 돌아가셨잖습니까. 잘못 보신 게 아닐까...”


“규철아... 내가 이지 얼굴을 착각하겠냐?”


“......”


“총에 맞은 게 이지란 걸 알고 난 직후에... 이지는 바로 즉사했어... 이지가 쓰러지자마자, 산장 밖으로 차 한 대가 빠져나가더라.”


“......”


“도저히 그냥 죽을 수가 없더라. 이게 무슨 일인지 알고라도 죽어야지.”


“그래서 산장에 불을 지르신...”


“어차피 그날 바로 죽을 각오로 올라갔으니까, 아무런 준비나 계획도 없었잖아. 여기저기 내 지문 사방에 묻고 피 묻은 옷이며... 일단 싹 없앨 수밖에.”


“네...”


“2층 침실에 기름 뿌리고 불 붙이고 나서, 그리고는 얼마 안 돼서 비가 내렸어. 산장 2층 침실만 타고 불은 더 번지지 않은 거지.”


“수사는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뉴스에는 불이 난 얘기만 있고, 사람 죽었다는 얘긴 없던데...”


“그게 이상해.”


“네?”


“형사3팀에서 수사를 맡았는데... 뉴스에 난 그대로 보도자료를 냈어. 비어 있던 산장에 불이 난 거로만 말야. 불에 타다 남은 시신을 분명히 발견했을 텐데도, 그 얘긴 전혀 없어. 감식 결과도 수사 진행 상황도 내가 접근할 수가 없어. 그것도 좀 이상해.”


“형수님... 시신이 남아 있었을...”


“쾅!”


//////


스마트폰 스피커에 귀를 기울이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다. 그걸 깨우기라도 하는 듯, 바 테이블을 쾅 내려치는 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거실에 울려 퍼진다. 콸콸, 물잔에 술을 들이붓는 소리가 연거푸 들리고, 그 사이사이, “형님, 좀 천천히...” 라며 제지하는 건달 두목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래 비워서 죄송해요. 어머! 왜 이렇게 갑자기 술을 급하게 드셨어요?”


툭. 녹음이 끊긴다.


툭. 손에 들고 있던 맥주캔이 거실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지가... 죽었다고? 동명이인일 거야. 설마... 이지가... 죽었다니... 이 남자 하건해가... 이지를 죽였다는 거야? 지금? 이게, 이게 무슨 소리야? 아닐 거야. 아니겠지... 아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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