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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빗방울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by rainon 김승진

그때 너는 장마의 계절 속에 서 있었다


빗방울은 무겁고 너는 가벼웠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를 사정없이 후려치는 빗줄기 사이로

흐느낌은 들리지도 않았다


그날, 흙탕물 고인 컴컴한 골목 모퉁이

쓰레기봉투 더미 위로 쌓인 골판지 상자 아래서

웅크린 채 오들거리던 얼룩 고양이 서늘한 눈빛만이


비에 갇힌 너를 가여워하고 있었던 것처럼

오늘의 나는 그날의 네가 가엽다


배가 고팠고 사람 어깨가 그립고

절망이 지긋지긋하고 패배가 신물나던

그날의 너는


어찌어찌 구르며 차이며 일어서다 엎어지다

다시 뒹굴고 곤두박질하다 멈췄다가 다시 걷다

부서지고 멍든 팔로 잘린 다리 대신하며

쓰러졌다 일어섰다 되풀이하여 엉금엉금 기던 너는


세월의 바퀴에 매달려 기우뚱 흔들리며 취하고 깨고 다시 취하다 깬 너는


여기 다시 장마의 계절 앞에 서 있다


올해도 빗방울은 무거울 것이고, 아직도 너는 가볍다


그래도 너는, 오늘의 너는

훗날의 내가 토닥일 것이다


그래,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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