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례언니

길례언니3

by 김경숙

삼각지에 도착했을 때는 저물녘이었다. 나는 최 사장의 화방 문을 밀었다. 올 때마다 삼각지 로터리를 돌지만, 막상 들어서는 곳은 최 사장의 화방이었다. 최 사장은 표구 작업을 하고 있었다. 사람이 들어왔는데도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반색하며 반기지도 않는데 최 사장 화방은 내 집 들어온 듯 편했다. 나는 일자형 다우닝 소파에 몸을 부렸다. 미술용품 판매부터 표구 제작까지 해서 오만 것들을 쌓아둔 화방 안을, 나는 눈으로 둘러보았다. 좁은 공간에 쌓아둔 온갖 것들이 낯익어 정겨웠다.

경기가 여전한가 봅니다?

제주에 내려가더니 살 만한가 보구먼. 남의 말 하듯 하는 거 보니.

최 사장은 비아냥거리는 내 말을 능청스럽게 받아냈다. 서로 악의 없는 말버릇이었다. 수많은 사람을 대하다 보니 이골이 났는지 왔냐 갔냐 일일이 묻지 않았다. 그런데도 편안함이 드는 것은 최 사장의 느긋하고 후덕한 인상 탓일 것이다. 성실하기가 한결같아 이 바닥에서 꽤 신뢰를 얻고 있었다. 돈도 안 되는 화방 일을 이토록 올래 하는 것은 그림이 좋아서가 아닐까. 좋아서 그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좋아서 운영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최 사장과 나는 실과 바늘 같은 사이였다. 그림을 다루는 최 사장의 표정엔 애정이 담겨 있었다. 최 사장은 자기 손을 거쳐 간 그림을 귀신같이 기억했다. 색감과 두께, 붓의 터치만으로 누구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았다. 작품 보는 실력 또한 감정가 못지않았다. 평생 그림 장사만 해온 터라 실전적 전문가였다.

삼각지를 기반으로 발전하던 이발소 그림 성장이 멈춘 뒤 큐레이터란 직업이 생겼다. 사진을 찍듯 정밀한 그림이 천시되고 해석이 모호한 그림이 높이 평가받기 시작했다. 번역된 소설을 읽다 보면 소설가가 쓴 것이 아니라 번역가가 쓴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림을 분석한 큐레이터의 설명을 듣다 보면 화가의 세계를 침범한 해석도 그랬다. 고장 난 전축, 소품을 이용해 만든 모형, 선, 물방울, 공, 상자, 꽃, 천 등 작가의 의도를 알 수 없는 작품들이 큐레이터의 해석으로 조명됐다. 나는 유화물감에서 나는 특유의 기름 냄새가 좋았다. 여태 인물화를 고집한 것도 두텁게 덧발라 얻은 음양의 느낌이 좋아서였다. 최 사장 화방은 주로 인물화를 취급했다. 나는 다행히 최 사장을 알게 됐고 그는 내 그림을 몇 점씩 내걸어줬다. 나는 그와의 인연으로 인물화를 그리며 먹고 살았다.

최 사장은 오랜만에 상경한 나를 위해 평소보다 일찍 화방 문을 닫았다. 최 사장과 나는 화방 골목에 있는 곱창집에 마주 앉았다. 내가 Y 화백의 추모전 관람을 위해 올라왔다는 것을 짐작으로 알아챈 최 사장은 연거푸 소주를 들이켜 데는 내 속을 꿰뚫으며 말했다.

잊어버리게. 오래전 일이 아닌가. 삼각지 그림쟁이들이 다 남의 그림을 베껴서 먹고살지 않았나. 자네도 다르지 않았고. 그때는 그림을 베끼는 일이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지. 남의 그림을 내 것이라고 우기지만 않으면 되는 시대였으니까. 가짜가 진짜로 둔갑할 줄 누가 알았겠나. 자네 잘못이 아니네. 가짜를 진짜라고 한 사람들이 잘못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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