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례언니2
길례 언니가 미치기 전엔 나의 우상이었답니다. 길례 언니는 수국꽃 같았어요. 해맑은 표정, 희고 긴 목, 숱 많은 검은 머릿결, 나는 그런 길례 언니를 닮고 싶어 했었죠. 우리는 같은 학교에 다녔고, 길례 언니가 먼저 졸업했어요. 어느 날 길례 언니가 화사한 노란 원피스를 입고 나를 찾아왔더군요. 가난했던 길례 언니는 그런 옷을 처음 입어봤기 때문에 자랑하고 싶어 나를 찾아온 거였어요. 돈을 벌러 가는 딸에게 부모님이 사 입힌 옷이었죠. 노란 원피스를 입은 길례 언니는 들떠 보이면서 불안해 보였어요. 나는 낯선 차에 올라타고 가는 길레 언니를 배웅했답니다. 나는 부러운 눈으로 길례 언니를 향해 손을 흔들었어요. 뒷좌석에 앉은 길례 언니도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어요.
그때 길례 언니는 열여덟 살이었고, 나는 열여섯 살이었어요. 나는 집안이 부유했어요.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갔죠. 해방된 해 공부를 마치고 오 년 만에 돌아와 보니 길례 언니는 미쳐 있었어요. 길례 언니가 왜 미쳤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길례 언니의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없었어요. 새로 산 노란 원피스를 입고 돈을 벌러 간 길례 언니는 어째서 미쳐서 돌아온 것일까요.
착륙 안내 방송이 나왔다. 듣다 보니 거짓말처럼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노파 혼자 떠든 이야기였지만, 지루할 새가 없을 만큼 입담이 좋았다.
저는 권길재라고 합니다. Y 화백의 추모전 관람을 위해 상경하는 길입니다.
노파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친숙한 감정이 생겼다. 노파가 누군지 궁금해져 먼저 내 이름을 밝혔다. 내 의도와는 달리 노파는 자신을 밝히지 않았다. 내가 짐을 챙긴 뒤 옆 좌석을 바라봤을 때, 노파의 모습은 꺼져버린 등불처럼 온데간데없었다.
공항을 빠져나와 김포공항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큰 가방까지 챙겨 올라온 이유는 제주도에는 없는 재료를 구해갈 겸 해서였다. 서울역에서 하차해 삼각지 가는 지하철로 갈아탔다. 삼각지는 올 때마다 들르는 곳이었다. 한강과 서울역 그리고 이태원을 통하는 삼거리를 화랑의 걸이라고 했다. 용산 방향 쪽으로 화방과 표구점, 액자 제작 상점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서면 팔구십 년대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허름한 화방들이 지붕에 간판 하나를 겨우 인 채 자리 잡고 있었다. 길가 담벼락에 나무 자재, 표구 틀, 깨진 유리판, 고무 대야, 소화기 통 등이 질서 없이 쌓여 있는 허름한 화방 거리지만 나름의 멋이 있었다.
한때 그림 공장 지대로 알려진 삼각지에서 구하지 못한 재표는 없었다. 그림을 외면하지 않고 고수해 온 고마운 터줏대감들이 있어서였다. 화방이 삼각지에 자리 잡게 된 데에는 미군이 용산에 주둔하고부터였다. 미군들이 자주 드나드는 이발소에서 외화 그림을 접할 수 있었다. 그림쟁이들은 이발소 주변을 맴돌며 그림을 구경했고, 미군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주며 생활했다. 그림 산업화 바람이 불면서 그림쟁이들은 이발소 그림을 재연해 수출 시장에 팔기 시작했다. 그림은 장당 삼천 원부터 이만 원까지 거래됐다. 나는 그림을 복사하듯 하루에 여러 장을 그려 내다 팔았다. 그때 화방 주인은 그림을 수출 시장으로 보내는 중개상인이었다. 이후 싸구려 중국산 그림이 수출 시장을 점유해버리자, 한국 수출 시장은 시들해져 버렸다. 그 당시에 들어선 화방들이 현재까지 그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