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례언니8
구했어요?
잘 챙겨 넣었는지 모르겠구먼. 빠진 게 있으면 연락하게.
최 사장은 내가 경찰서에서 하룻밤 잔 연유를 묻지 않았다. 위작 논란 때도 그랬다. 자신의 화방을 통해 내 그림이 팔려나갔음에도 최 사장은 모든 것이 기억에 없다는 듯 침묵했다. 삼각지에선 서류 거래를 하지 않았다. 놓고 가게, 하면 끝이었다. 가끔 화방에 들러 그림이 걸려 있지 않으면 팔린 것으로 간주했고 주는 대로 받아 넣었다. 평상시 후덕한 최 사장이지만, 속을 알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그런 최 사장에게서 내 모습이 보였다.
베트남 파견 기한이 끝나갈 무렵이었을 것이다. 추앙과 나는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도 없는 둘만의 결혼식이었다. 추앙은 웨딩드레스 대신 노란 원피스를 입었다. 내가 선물로 사준 거였다. 내가 전쟁 기록화 작업에 몰두해 있다가 추앙을 찾았을 때였다. 술에 취한 장교가 추앙 방에서 바지를 올리며 나왔다. 추앙이 실신한 듯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가진 돈이 거덜 났고 더는 포주에게 줄 돈이 없을 때였다. 나는 미친 듯이 화를 냈다. 추앙을 매질했다. 나는 남은 기간 그림에만 전념하다 작별의 말도 없이 돌아오는 군용 헬기에 몸을 실었다. 내가 떠나오던 날, 헬기 아래 노란 원피스가 휘날렸다. 추앙은 노란 인형 같았다. 장난감 같았다. 군인들이 추앙의 양팔을 잡아끌었다. 나는 헬기 창문을 통해 내려다봤다. 추앙은 두 다리를 뻗은 채 질질 끌려가며 부른 배를 감싸고 있었다. 불룩한 배를 나는 외면해버렸다.
석채도 좀 구해주세요.
최 사장이 차 트렁크 문을 닫으며 물었다.
어디에다 쓰게? 이번엔 진짜 위작을 그려볼 건가?
새치 섞인 머리에 반 무테안경을 쓴 최 사장이 노쇠해 보였다. 화방 골목에서는 느끼지 못한 추레한 모습이었다. 최 사장은 나보다 오 년 연배였다. 나는 내 모습을 보기 위해 최 사장 차에 백미러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삼각지 작가라는 꼬리표. 그거 괜히 붙은 게 아니더라고요. 그림이라고 다 그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깨달음이란 늘 부끄럽게 늦네요.
헐고 낡은, 장사꾼은 이제 필요 없다는 소리로 들리는구먼.
최 사장은 그렇게 말을 받으며 호젓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최 사장을 보자 함께 마신 술이 덜 깬 것인지 출출한 빈속처럼 속이 쓰렸다. 자기 모습을 언제나 타인의 모습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나는 가방을 바로 세우며 말했다.
제주도 내려가서 짐 풀어놓고 곧바로 길례 언니 고향에나 한번 찾아가 보려고요. 뱀 밭에. 아니 꽃밭에요. 삼각지 작가가 아닌 저 자신으로 돌아가 그 꽃밭을 제대로 한번 그려 보고 싶어서요.
최 사장은 내가 뭔 소리를 하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항까지 바래다주겠다는 것을 만류하고 경찰서 앞에서 헤어졌다.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출발하는 표를 끊을 수 있었다. 재료가 든 불룩해진 가방을 질질 끌며 대기실로 들어서자마자 긴 의자에 철퍼덕 몸을 부렸다. 머리를 의자에 붙인 채 눈을 감았다. 촘촘한 어둠 속에 떠 있는 수국꽃이 비를 참고 있는 구름 같았다. 수국꽃이 째깍째깍 소리를 냈다. 소리는 확장되어 총탄 소리로 들렸다. 눈을 떴다. 대기실 안을 둘러보며 노파를 찾았다. 나는 갑자기 조급해졌다. Y 화백이 살아있다면 기내에서 만났던 노파의 나이쯤 됐을까. 그렇다면, 노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