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에서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는 신륵사입니다. 저는 학생들과 현장 체험학습은 물론이고 개인적으로도 셀 수 없이 방문한 곳입니다. 유명한 데는 다 이유가 있어, 어느 계절에 가든 좋은 곳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신륵사가 단순히 강변에 있는 아름다운 풍광을 보러 가는 절로서의 의미뿐 아니라 ‘죽음을 위로하는 공간’으로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신륵사가 있게 된 데는 나옹선사의 죽음과 관련이 되어있고, 신륵사의 주요한 공간 역시 나옹선사의 죽음과 관련된 곳입니다.
나옹선사는 이름은 혜근, 법호가 나옹입니다. 선사는 21세 때 문경의 묘적암 요연선사를 찾아가 출가하여, 25세 때 양주 회암사에서 석옹화상을 은사로 크게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후 원나라 연경으로 건너가 법원사에서 인도 출신의 지공선사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14년간 중국에 머뭅니다. 중국 전역을 다니며 불법을 공부하던 나옹선사가 고려로 돌아온 것은 39세 때인 공민왕 7년(1358)입니다. 그는 돌아와서 조용히 오대산 상두암에서 정진 중이었는데, 공민왕과 왕후의 간곡한 청으로 황해도 신광사로 내려와 후학을 지도하게 됩니다.
이 무렵 홍건적은 쇠퇴해가던 고려를 향해 개경까지 침입해와 노략질을 일삼았고, 공민왕이 한때 안동으로 피난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때도 스님은 개성을 떠나지 않고 절집을 지켰습니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피난 갈 수 있는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형편으로 피난길에 오르지 못합니다. 그런데 왕조차도 수도를 버렸다는 건 나라가 남아있는 백성을 지키지 않겠다는 거지요.
역사 속 전쟁에서 왕이 수도를 버리고 떠나는 일은 이때만은 아니었지요. 몽골의 침략 때 무신정권은 몽골군이 올 수 없는 강화도로 가버리고, 육지에 남겨진 이들이 온전히 고통을 당했습니다. 남겨진 이들의 두려움과 함께 한 사람이 나옹입니다. 죽음의 공포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한 분이지요. 저는 나옹스님의 행동을 보면서, 신영복 선생님의 글귀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비를 함께 맞는 것입니다.” 가 떠올랐습니다.
공민왕은 미안한 마음이었을까요? 홍건적의 난이 진압되자 나옹선사에게 왕사의 벼슬과 보제존자(普濟尊者)라는 칭호를 내려 불교계의 부흥을 부탁합니다. 선사는 순천 송광사에서 터전을 잡았고 마지막으로 가르침을 설파한 곳이 양주 회암사였다고 합니다. 나옹선사는 적극적인 현실 참여 즉 앉아서 참을 구하는 수행법을 멀리하고 중생을 만나고 교화하는 데 힘썼습니다. 그 덕분에 수많은 사람이 선사를 따랐고, 회암사는 전국사찰의 총본산 역할을 하면서 한때 3,000여 명의 승려들이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4년여에 걸친 회암사 중창 불사를 마치고 낙성법회를 열 때 귀천을 따질 수 없는 부녀자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어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마침내 왕으로부터 회암사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갑작스러운 왕명으로 밀양 영원사로 쫓겨가던 중 병이 깊어 신륵사에 머물게 되었고, 우왕 2년(1376) 57세의 나이로 입적하게 된 거지요.
나옹선사가 신륵사에서 입적한 후 추모의 뜻을 담아 세운 정자가 강월헌입니다. 강월헌은 나옹선사의 당호에서 딴 이름입니다. 저도 그렇지만 많은 사람이 이곳 강월헌에 앉아 시원한 강바람도 쐬고 맞은편 강을 바라봅니다.
신륵사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북적이는 강월헌 옆에는 작은 삼층탑이 하나 서 있습니다. 신륵사의 상징처럼 서 있는 커다란 벽돌탑이나 법당 앞에 있는 대리석 조각의 화려한 탑에 비하면 사람들의 관심이 덜한데요. 이 아담한 삼층석탑은 나옹스님을 다비(화장)한 장소를 기리고자 세운 것입니다. (유홍준 교수는 나옹선사의 다비 장소는 지금 있는 곳보다 조금 더 아래쪽에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홍수 때문에 지금 자리로 옮겨 놓았다고 합니다)
자연 바위 위에, 강의 풍광을 가리지 않고 눈높이에 맞게 서 있는 이 작은 탑이야말로 나옹선사의 삶과 죽음에 어울리는 표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 탑도, 탑 옆 바위에 앉아 바라보는 여강의 경치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나옹선사의 사리를 모신 부도는 신륵사 뒤편 언덕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팔각원당형의 화려한 모양의 부도가 아닌 단아한 아름다움이 있는 종 모양의 부도입니다. 부도를 보기 위해 보통은 조사당을 거쳐 계단을 오르는데요. 가끔은 그곳이 아니라 벽돌탑 뒤편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수목장 공간을 통과해서 가곤 합니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공간을 지나기보다는 나옹선사의 죽음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가는데 더 어울리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아는 사람이 묻혀 있는 곳도 아니지만, 신륵사가 과거나 현재나 변함없이 누군가의 죽음을 추모하는 공간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조용히 애도의 표시를 하며 지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