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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이 Aug 30. 2024

여주 역사 여행길- 가정 이곡 이야기

전쟁의 아픔을 위로하고 평화를 이야기한 사람들(2)

서희와 달리 가정 이곡 선생의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고려 후기 공녀 관련 수업을 하면서 처음 이곡을 알게 되었는데요. 북내면 가정리라는 지명이 이곡의 호인 ‘가정’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가정 이곡이 귀양 왔다는 북내면 금당천 모습 

가정 이곡이 여주와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은 이렇습니다. 이곡은 고려에서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출신이 워낙 한미하여 크게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그는 원나라 과거를 통해 입신을 꿈꾸게 됩니다. 29세 때인 1326년 원나라에서 치르는 향시에 3등으로 합격하고, 1333년(충숙왕 복위 2) 원나라 전시에서 당당히 갑과 2등으로 합격합니다. 고려인으로서 이런 성적을 거둔 것은 이곡이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고려로 돌아온 이곡은 여러 벼슬을 거치며 승승장구합니다. 하지만 원나라에서 고려 공녀를 차출하면서 벌어지는 비극을 못 본 척할 수 없었던 그는 원나라 황제에게 상소를 올리게 됩니다.  

    

“하루아침에 딸을 품 안에서 빼앗겨 사천리 밖으로 내보내고는, 그 발이 한번 문밖으로 나간 뒤에는 종신토록 돌아오지 못하고 있으니, 그 심정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공녀로 뽑히면 부모와 친척들이 서로 한 곳에 모여 곡(哭)을 하는데, 밤낮으로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공녀로 나라 밖으로 떠나보내는 날이 되면, 부모와 친척들이 옷자락을 부여잡고 끌어당기다가 난간이나 길바닥에 엎어져 버립니다. 비통하고 원통하여 울부짖다가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사람도 있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근심 걱정으로 기절하는 사람도 있고, 피눈물을 흘려 실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 우리 고려 사람 무슨 죄가 있어 이 괴로움을 언제까지 당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출처: 《가정집》 권 8   

  

가정집( 사진출처: 한민족 대백과 사전)

이 애절한 상소를 접한 원나라 황제는 감동하여 앞으로 고려의 공녀제도를 없애겠다는 화답을 합니다. 하지만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원나라 관리들이 고려에 압력을 넣었고, 압력을 못 이긴 이곡은 어쩔 수 없이 원주 지내촌(지금의 북내면 가정리)으로 귀양을 오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의 상소문을 학생들과 함께 읽으면서, 전쟁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이 누구인지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리고 그 아픔을 모른 척하지 않고 용기 있게 말한 그의 행동을 언급하며 왜 전쟁이 해결책이 될 수 없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얼마 전 드라마 <연인>을 보면서 먹먹한 장면을 하나 만났습니다. 병자호란 때 포로로 끌려갔다 살아 돌아온 여주인공이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는 장면입니다. 그녀는 일명 ‘환향녀’라 불리며 남편에게 버려진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는지 묻습니다. 그때 남자주인공이 하는 말은 “ 안아줘야지. 괴로웠을 테니” 였습니다. 비록 드라마 속 대사였지만 저에겐 역사 속 전쟁으로 희생당한 여성, 힘없는 백성에 대한 위로의 말로 들렸습니다.


전쟁의 아픔을 이해하고, 힘들고 돌아가더라도 평화를 이야기한 인물을 여주에서 만날 수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학생들과 나누는 것으로 저 나름대로 전쟁의 아픔을 겪은 수많은 영혼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학생들과 수업을 통해 평화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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