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발의 인생

by 김떱

매미소리가 창 밖너머 간간이 들려오는 지금은 바야흐로 교사들의 1학기 성적처리 시즌.

그러나 새롭게 리뉴얼 된 성적처리 플랫폼인 나이스 4세대를 쓰는 교사들은 공감할 것이다. 또 접속이 안된다. 열심히 타이핑을 하다가도 평일 오후 3시 반쯤부터 퇴근시간까지 이렇게 먹통이 되곤 한다.

아.

미처 저장 못한 내 열렬한 타이핑은 휘발되어 창 밖으로 나갔는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휘발된 한글 자모음은 창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건만 괜히 앉고 있던 의자를 힘껏 젖히며 녹음 짙은 나무들을 멀리 바라보았다. 더운 바람 사이로 불현듯 두 달은 족히 묵혀두었던 브런치 게시판이 생각났다.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아 내 브런치 게시판을 둘러보았다.


엉망이구만.

게시판 속 이어지던 일상은 어느덧 끊겨 계절이 바뀌어도 소식 한 줄 없이 차가웠다.

이유없이 소식이 끊긴 벗을 보는듯 먹먹한 감정을 뒤로하고 몇 가지 날 것의 고민을 멍하니 하던 와중에 눈에 들어온 컴퓨터 화면 속 글귀.


'응용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아직도 모니터 한 화면은 이렇게나 내게 철벽을 친다. 좀 평소에 막 대하긴 했다만. 오랜만에 일 다운 일 좀 해보려 하니 이렇게 무심할까 싶다.



다사다난 그 자체의 한 학기가 이렇게 지나간다. 브런치를 통해 글똥을 열심히 누어야겠다는 다짐은 저 멀리 금세 말라 날아가버렸다. 미처 담아내지 못한 그간의 일상들이 이제서야 후회가 남는다.

매 해마다 펼쳐지는 이런 약속과 다짐의 휘발성은, 눈이 마주쳐도 인사 없이 지나가는 작년 제자들을 보는 것 같달까?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게 나의 숙명이라면 숙명일까 싶다.


글을 마칠 즘에야 다시 나이스 플랫폼 접속이 원활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정말 저장 못한 내용들이 싹 휘발되어 날아가버렸다. 저장 못한 내용들은 이곳으로 날아오더니 액화되어 차분히 눌러앉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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