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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연호 Jan 14. 2023

어른이 된다는 건

내가 초등학교 3학년 정도 되었을 무렵이었다. 학교 일과가 모두 끝나고 종례 시간이었는데, 담임 선생님께서 학급 아이들에게 '사랑의 빵' 저금통을 하나씩 나눠주시더니 엄숙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우리 학교 다니는 1학년 친구 ooo이 뇌종양이라는 병에 걸렸다고 해요. 그래서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치료비가 부족해서 어려운 상황이라고 해요. 다들 부모님께 꼭 말씀드리고 힘든 친구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같이 돕기로 해요."


'수술'이라는 단어를 듣자 시끄럽던 교실에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나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수술을 받는다니, 엄청나게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면 부모님께 꼭 말씀드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우리 학교 ooo이라는 친구가 수술을 받는대요."


"왜?"


"뇌종양에 걸려서요."


그날 저녁이었다. 가족끼리 모여서 식사를 하다가 문득 오늘 학교에서 들었던 것이 생각나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다. 엄청나게 심각한 문제인가 보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함께, 그 친구가 지금 병원비가 부족해서 어려운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아버지는 내게 '사랑의 빵' 대신에 하얀 봉투 하나를 내밀면서 선생님께 꼭 전해달라고 하셨다. 안에 뭐가 들어있을까? 등교를 하면서 조심스럽게 열어보니 빳빳한 노란색 종이 몇 장이 들어있었다.


'헉, 이 돈이면 철권을 1000판도 넘게 하겠는데!'


당시에 동네 문구점에서 즐겨하던 게임 '철권'이 생각났다. 이 돈을 그 친구에게 주지 않고 내가 가진다면 재밌는 철권도 원 없이 할 수 있고, 500원도 넘는 핫바나 아이스크림도 마음껏 사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래도 선생님께 드리라고 했으니까 드려야지. 5만 원은 어른들끼리만 쓰는 거니까...'


이 돈을 슬쩍해볼까 생각했지만 역시 5만 원이 넘는 금액은 10살짜리 꼬맹이가 감당하기에 어려운 돈이었다.




그로부터 2년 정도가 흘렀다. 나는 막 사춘기에 접어든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 되었다. 학교가 끝나면 껄렁껄렁한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바로 문구점으로 향했다. 오락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때도 평소와 다름없이 문구점에서 오락에 열중하고 있는데, 친구 녀석 하나가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말했다. "야, 너 방금 봤냐?"


"뭘?"


"걔, ooo이잖아."


익숙한 이름이었다. 고개를 돌려 계산대를 바라보니 ooo으로 보이는 동생 하나와 그의 친구들이 있었다. 어렴풋이 보기에도 많은 간식들이 계산대 위에 올려져 있었는데, 이윽고 ooo 그 친구는 자신의 주머니 안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한 장 꺼내더니 그것을 모두 계산했다.


친구가 엄청난 특종이라도 발견한 듯이 흥분하면서 말했다. 


"야! 봤지? 쟤 병원비 없다고 하지 않았냐? 완전 부자인데? 우리한테 거짓말한 거야!"


12살 때는 그랬다. 부를 가늠하는 기준이 학교가 끝나고 문구점에서 얼마나 많은 돈을 쓰는지에 있었다. 친구의 말을 듣고 보니 나도 괘씸했다. 우리 아빠가 오만 원도 넘게 줬는데, 그 돈으로 간식이나 사 먹는다고 생각하니 화가 났다. 그래서 속으로 그 친구를 약간 안 좋게 바라봤던 것 같다.




그로부터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노라면, 문득 ooo 그 친구가 떠오른다. 정확한 병명은 다르지만 나도 겪어보지 않았나. 소아암이라는 것.


그때는 도저히 보려야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머리를 여는 수술을 받고 고통에 몸부림치다 진통제에 취해 잠드는 8살 아이의 모습, 항암치료를 받으며 머리카락이 다 빠져버린 한 소년의 모습, 그리고 그동안 소년과 함께 아팠을 그 가족의 눈물이 보인다.


삶과 죽음의 고비를 넘나드는 힘든 치료를 우여곡절 끝에 마치고, 이제 아픈 아들이 학교로 돌아가는데 혹시나 친구들에게 기죽지 않을까 그의 아버지가 ooo 손에 쥐여준 만 원짜리 지폐가 눈에 선하다. 그 모든 장면이 영화처럼 머릿속을 지나간다. 어느새 눈가엔 눈물이 촉촉하게 고인다.


아,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의 기억을 가지고 그때로 돌아가서 ooo 그 친구를 따뜻하게 한 번 안아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고했다. 너 정말 멋지다." 이 말을 꼭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동안 너무 수고 많았다고 그의 작은 등을 한 번 쓸어줬으면 좋겠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것 아닐까? 보이지 않은 것까지 보는 것. 조금 더 생각해 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을 아는 것. 내가 겪어보지 않은 고통일지라 하더라도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것. 그리고 따뜻하게 한 번 안아주는 것.


우리가 서로에게 '어른'이 되어줬으면 좋겠다. 힘든 이들에게 어깨 한 번 내어주고, 실패에 좌절하는 이들을 따뜻하게 안아주며 "괜찮다. 수고 많았어. 너 정말 멋지다." 이런 한 마디 덧붙여줄 수 있는 그런 어른 말이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라는 질문에 드디어 할 말이 생겼다. 나는 어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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