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시집 한 권을 샀다. 중고 책이라고는 도서관에서나 만나보거나, 더러 지인들이 접해보고 좋았던 책들을 얻어 본 적은 있었다. 이제껏 한 번도 중고 책을 사 본 적은 없었다. 평소에는 신간을 사는데, 필요한 책이면 가까운 서점이나 인터넷으로 구매했다. 신간을 선호하는 이유를 굳이 들자면 창작물에 대한 작은 예의라는 내 나름의 생각 때문이었다. 평소처럼 여러모로 뒤져보았으나 이미 오래전 절판된 책이었다. 꼭 구하고 싶은 책이라 중고라도 구하고 싶었다. 한 번 읽어보라는 지인의 권유도 있었거니와 당시 소진되어 가는 나의 몸과 마음을 어떻게든 좀 다스려 보자는 뜻도 있었다. 시내 몇 곳의 중고 책방을 발품과 시간을 팔아 뒤져보기도 하였으나 역시 헛수고였다. 이리저리 수소문 끝에 인터넷의 다양한 사이트를 탐색한 후에야 겨우 내 손에 들어올 수가 있었다.
처음으로 중고 책을 주문하다 보니 책이 오기까지 은근한 기대감과 긴장감이 생겼다. 책이 도착하기까지 며칠 동안 마치 새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가슴이 쿵쾅거리고 신이 좀 났다. 10여 년의 세월 동안 책은 여러 독자를 거쳤을 것이다. 아마 책은 많은 사람의 손과 침에 닳아 있겠지. 책을 받아 본 순간 내 짐작은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중고 책인데 이렇게 깨끗할 수가 있나.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책을 펼쳐 보았다. 거의 신간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디 한 군데 접혀있거나 구겨진 곳도 없었고, 10여 년의 세월이 무색하게도 종이의 흰색조차 바래지 않았다. 심지어 사람의 손이 닿은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이 책 주인은 아주 깔끔한 성격인 것 같았다.
어렵사리 구한 책인 만큼 더욱더 사랑스러웠다. 책 표지만 보아도 심장이 두근두근 나대었다. 드디어 첫 표지를 여는 바로 그 순간,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OOO 선생님 청람, 2010년 9월, ㅁㅁㅁ 드림> 작가의 정성 어린 친필 사인이 있는 것이 아닌가. 잘 아는 작가의 사인이 있는 책을 처음 보니 호기심이 파도처럼 나의 숨을 막았다. 그렇다면 이 책은 작가가 직접 손으로 어루만졌던 아주 특별한 책 중의 한 권이 분명하였다. 게다가 ‘청람’이란 무슨 의미인가. 나도 예전에 논문집을 만들 때 몇 차례 사용해 본 적이 있는 단어라 그 의미를 이미 알고 있었다. 소람笑覽, 청람淸覽 그리고 혜존惠存 등…. 내 책을 읽어주심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뜻이 담겨 있지 않은가. OOO 선생님은 아마도 이 책의 첫 주인이었을 것이다. 작가가 정성스레 사인하고 존경과 감사의 뜻을 나타낸 것으로 보아 그는 당연히 작가에게 소중한 사람인 듯하였다.
셜록 홈스처럼 내 속의 탐구본능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요즘 인터넷의 구름은 세상의 모든 정보를 스펀지처럼 머금고 있으니, 특정한 사람의 프로필을 알아내는 것쯤이야 별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명문대학의 명망 있는 국문과 교수였다. 그는 어떻게 이 책을 처음으로 소유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직업으로 보아 작가에게 직접 선물로 받았을 것이다. 아니면 출판기념회 등에서 구매하여 작가의 친필 사인을 받았을까. 어쨌든 그는 작가와는 매우 친밀한 관계였을 터이다.
그의 신분을 알게 되자, 갑자기 화가 났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창작한 책을 읽지도 않은 채 애물단지처럼 중고 서점으로 내팽개칠 수 있는가. 대학교수라는 사람이 이래도 되는가. 한 사람의 창작물을 이렇게 함부로 다루면 안 될 것 같았다. 친필 사인까지 해서 선물한 귀한 책이었기에 중고 서점에서 발견된 것이 더욱더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바빠서였거나 혹은 관심이 없었거나 책을 읽지는 못하였더라도, 적어도 책장 한쪽에 고스란히 꽂아 소장하는 것이 작가에 대한 도리가 아니겠는가.
만약 작가가 본인의 사인이 담긴 이 책을 중고 서점에서 발견한다면 기분이 어떠할까? 당신 손을 떠난 지 오랜만에 다시 만났기에 격하게 반가운 감정, 책이 주인에게 소장되지 않고 중고 서점에서 새로운 주인을 찾아 헤매고 있음에 대한 씁쓸함,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그리고 책을 선물로 준 그이에게 대한 섭섭함도 작가의 가슴 한구석에 응어리로 남을 것 같다.
책을 읽는 동안 내내 이런 생각으로 정작 그 내용에는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신간을 읽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낄 수 없는 어려운 일이었다. 다음부터는 중고 책은 절대로 사지 않을 것이야! 글을 읽다가도 이런 부질없는 생각들이 개미 떼처럼 끊임없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도무지 글 내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다른 일을 할 때도 그놈들이 수시로 괴롭히니 이젠 그 책 자체를 보기가 싫어졌다.
별 의미 없이 대강 몇 장을 그냥 뒤적였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만약에 이 책이 그의 책장 한구석에 계속 꽂혀있었다면…. 그랬다면 나는 영원히 이 책과 만남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 책을 세상에 다시 내보내는 것이 오히려 책을 살리는 일이었다. 책의 역할은 책꽂이에서 숨어 지내는 것이 아니었다. 책의 역할은 더 많은 사람에게 읽혀, 감동을 주고 마음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분명 그는 이 책을 너무나도 사랑하였기에, 이 책을 어렵게 창작한 작가의 노고를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그냥 책장에 숨겨둘 수가 없었을 것이다. 책은 또 누군가에게 읽혀야 하기에, 안타깝지만 새 주인을 찾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중고 서점으로 보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나를 만나기 위해 또 몇 해 동안을 서점의 한구석에서 세월의 먼지를 마시면서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책을 내놓은 덕분에 나와 만날 수 있었다. 이런 생각까지 다다르자 그에 대한 내 감정도 사그라졌다.
중고 책은 신간에서 찾을 수 없는 묘한 매력이 있다. 작가가 표현하는 내용 자체의 감동과 더불어, 또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 신간에 비해서 한 가지 더 큰 재미가 있는 셈이니 얼마나 더 좋은가. 글의 행간들에서 묘사되는 책 내용 자체의 감동은 당연하지만, 중고 책이 내포하고 있는 다양한 감상感想들이 미간을 찌푸리게도 하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도 하여 책 읽는 기쁨을 더 해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바뀌자 책의 내용이 쏙쏙 들어오니 읽는 재미도 좋아졌다. 책 주인은 작가와 어떤 관계였을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러한 상상들이 내가 중고 책을 구매하고 읽는 것을 이제는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