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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기다림, 부운지浮雲池 연꽃

by 아이언캐슬

그때 마을 어귀에 도달하면 반드시 거쳐야 할 의식처럼 안개 자욱한 봇둑을 만나야 한다. 특히 새벽에 도착한 차창 밖에는 밤새 성큼 자라 웅성대는 안개들이 기다린다. 안개는 새벽녘에 자신 그림자를 먹고 몸집을 키운다. 안개는 가끔 일렁거리는 바람의 갈등에 움찔움찔은 하겠지만 온 사위에 솜이불을 덮어 일찍 서두르는 새벽을 다시 잠재우려 한다. 밟고 있는 것이 물인지 흙인지 풀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호수 한쪽 모퉁이에서는 일찍 깬 물고기의 물 차는 소리가 가끔 안개를 깨울 뿐. 사냥에 실패한 어미 새의 신음이 배어 나와도 안개는 꿈쩍도 하지 않고 둑을 버티고 있다. 마치 아침 햇살을 기다리는 듯 장엄하다. 순간, 아침 햇살이 밀물처럼 솟아오르면 안개는 얼른 족쇄를 풀어 몸집을 순식간에 물속으로 숨겨 버린다.


한여름임에도 아침 바람에서 가을 냄새가 흥건하다. 새들은 호수의 저항을 받으며 낮게 물을 탄다. 아침마다 물속으로 거꾸로 잠기는 야트막한 산 아래로 봄처럼 아기 구름이 고즈넉이 졸고 있다. 가끔 새들이 자맥질할 때마다 화들짝 깨어나 안절부절못하곤 하는 물속 구름과 산들. 잠에서 깬 구름은 가벼운 기지개를 켠다. 물의 피부는 짜릿한 전율을 느끼고 물속 깊숙한 곳에서 오래된 기억을 깨우려 한다.


무언가 있다고 해서 늘 그곳에 그 모습으로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호수에 잠긴 얕은 산봉우리 아래에서 졸고 있는 구름의 꿈결처럼, 혹은 발목을 간질이는 둑의 안개처럼 모호했다. 연蓮은 이미 알고 있었다. 깨어나야 할 시간이 오백 년이건 천년이건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숨죽여가며 기나긴 시간을 버텨내야 했다. 살을 에는 매서운 한파와 염천 같은 불볕더위도 천 번이나 참아내야 했다. 발아의 공식을 잊지 않으려 되뇌고 되새겼다.


작열하는 태양 열기는 연못마저 데웠다. 한낮의 데워진 공기는 된더위를 참을 대로 참다가 이리저리 몸체를 흔들거리더니 고샅을 타고 산봉우리를 기어올랐다. 구름을 불러 모으기 위한 행동인 듯 보였다. 구름은 마치 비 온 뒤 죽순처럼 비알길 곳곳에서 피어올라 순식간에 산 전체를 뒤덮었다. 구름 위로는 여왕이 다시 행차한 듯했다. 여왕은 잠시 시름에 잠겨 연꽃이 활짝 핀 연못을 내려다보더니 어느덧 구름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여왕을 보위하던 구름은 어느새 내 머리 위로 흘러와 소나기를 뿌리기 시작했다. 소나기는 뜨거워진 연못의 피부를 씻어내듯이 마구 물을 뿌렸다. 소나기는 능숙한 드럼연주자처럼 자랄 대로 자란 연잎을 빗줄기로 두드렸다. 연잎은 한 방울이라도 놓칠세라 연신 고개를 숙여 가며 물을 모두 받아내려는 듯했다. 그 이파리의 포용력과 모가지의 탄력은 나의 감탄과 찬사를 받아 충분했다.


연꽃을 불교에서 중요시하는 이유 중 첫 번째는 진흙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처염상정處染常淨이다. 염화미소의 진리다. 두 번째는 연꽃은 꽃잎이 필 때 씨방이 함께 여무는 화과동시花果同時다. 일반적으로 꽃은 수분을 통해서 씨방이 자란다. 연꽃은 수분을 통하지 않고도 열매가 자라는 것이다. 꽃은 원인이고 열매는 결과를 의미한다. 이는 인과를 상징하며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하나로 연결됨을 나타낸다. 세 번째는 꽃을 활짝 피운 씨앗은 떨어져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썩지 않는 종자불실種子不失이다. 오랜 인고의 시간을 보내다가 인연이 되면 다시 꽃을 피운다. 연꽃은 씨앗이 오래 견디는 힘도 경이롭지만, 싹을 틔우는 속도도 엄청나다. 발아하는 순간부터 순식간에 자라 호수 전체를 덮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사람은 꽃의 아름다움에 관심을 가지지만 씨앗에는 마음을 두지 않는다. 꽃이 초목의 절정기라고 많이들 생각하지만 사실 씨앗이 그들의 미래이다. 꽃은 가장 훌륭한 열매를 맺기 위한 과정 중 화려한 일이겠지만 씨앗이야말로 정성껏 살아온 그들의 삶 중 가장 빛나는 결정이다. 꽃과 씨앗이 모두 중요한 것처럼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모두가 연결되어 있어 가벼이 여길 수 없다.


갑옷 같은 껍질에 감춰둔 미래는 어떠한 악조건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온갖 방어장치를 갖춰야 한다. 초목은 좀 더 안정적인 다음 세대로 그들의 좋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휴면기를 갖는다. 휴면기도 일종의 생존전략인 것이다. 공기 온도와 밀도, 빛의 세기와 각도, 수분의 양과 분포 등 외부 환경이 발아에 가장 알맞게 충족될 때까지 지루하고 캄캄한 시간을 참아낸다.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기 위해 싹을 틔울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을 끊임없이 탐색한다. 조급해하지 않아야 한다. 조건이 충분하지 않음에도 발아를 시작한 씨앗을 제대로 싹을 틔우지 못하고 사멸하고 만다. 조급할수록 발아는 실패할 위험이 크다. 급격한 과학의 발전만큼이나 다급해진 마음을 지닌 우리에게 기다림의 지혜는 천년이라도 길지가 않다.


경주시 서면에 가면 부운지浮雲池가 있다. 거기에는 천년을 참았다가 꽃을 피운 자생 연꽃이 해마다 여름을 기다리고 있다. 신라 때 만발했던 연꽃은 어느 시기엔가 모두 사라지고 고려와 조선 때는 그곳에 꽃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고 한다. 1998년 저수지 준설 작업하기 위해 포클레인으로 천년 동안 켜켜이 쌓인 바닥 흙을 긁어낸 이후 연꽃이 한둘씩 피어나더니 어느 순간엔가 연못 대부분을 다시 차지하게 됐다 한다. 연꽃의 씨방은 껍질이 매우 강하여 망치로 두드리거나 불로 지져도 멀쩡하다. 인위적으로 발아를 위해서는 줄톱으로 껍질을 까야할 정도이다. 부운지에서 어떠한 인연이 있었기에 천년을 넘게 기다려온 연꽃이 발아하였을까? 연꽃은 새벽에 만개하고 낮이 되면 꽃잎을 오히려 닫는다. 아침노을 녘 물길마다 희고 붉은 고함들이 우줄우줄 부운지 위로 걸어 나온다. 천년을 기다려온 인연이 발아의 비밀번호를 찾아낸다. 매년 7월이면 부운지에는 급소를 들켜버린 연꽃의 웃음이 자지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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