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는 마법의 단어가 몇 개 있다. 11월의 마법의 단어는 ‘고3’이다. 수학능력시험일에는 많은 회사의 출근 시간이 10시로 늦춰지고, 주식 개장시간과 은행 영업시간도 10시부터 영업으로 변경된다. 매 년 수능 시험이 끝나면 뉴스에는 수험생을 태워준 경찰, 택시기사님 등등 시험과 관련된 미담이 쏟아진다. 온 국민이 온 나라가 고3을 응원하는 나라가 세상에 또 있을까.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 급식 순서는 고3이 1년 간 첫 번째, 고2와 고1은 한 달씩 번갈아 두 번째와 세 번째로 급식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학생에게 점심 급식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면 엄청난 일이다. 수험을 앞두고 수능 시험 날 도시락 반찬은 무얼 싸갈까 하는 주제가 언론과 방송에 자주 등장한다. 우리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더덕무침과 불고기, 계란말이와 된장국을 싸주었다. 간식으로는 선물 받은 초콜릿과 커피를 챙겨갔고, 아침에는 수험생 두뇌 활동에 좋다는 호두파이를 먹었다. 수험생이 즐겨 마시는 커피와 녹차는 이뇨작용을 활발하게 하므로 추천하지 않는다는 글을 읽었지만 이뇨작용보다는 카페인과 당이 더 간절했기 때문에 챙겨갔다. 19살 나름 중요한 날이라 평소에는 잘 먹지 못했던, 편의점에서 파는 스타벅스의 병 형태 캐러멜마키아토를 챙겨갔다. 그 모든 것들을 수험장에서 먹었었는지 아닌지(아무리 나라도 못 먹었을 것 같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시간이 많이 지나 수험장에서 있었던 일들이 하나씩 흐려진 지 오래다. 친구랑 같은 교실이어서 같이 밥을 먹었다거나, 당시 우리 동네는 고3은 핸드폰을 없애는 게 대세여서 연락이 끊어졌던 중학교 친구를 시험장에서 만나 시험지에 서로의 연락처를 적었던 일이나 하는 기억은 점점 옅어진다. 당시에 얼마나 떨었는지, 시험을 얼마나 망쳐서 어떤 점수를 받았는지는 더더욱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 어쩌면 결과에 대한 부분은 잊고 싶었는지도) 그래도 종종 수능 도시락이라는 단어를 만날 때나, 호두파이를 볼 때 나와 같이 떨면서 도시락을 싸준 엄마의 마음이, 그 당시 긴장되던 마음과 그날 아침의 쌀쌀한 기운이 떠오른다.
지금은 공부가 아니더라도 여러 분야로 자신의 재능을 펼칠 길이 많아졌고, 과거에 비해 입시와 학력을 우선시하는 풍조가 많이 옅어지는 것 같아 다행이다. 20살이라는 젊음을 앞에 둔 아이들이 시험 결과보다는 그때 느낀 응원과 주변 사람들이 전해준 간절한 감정을 기억해 주면 좋겠다. 시험을 잘 보는 것도 좋지만 같은 일을 겪어본 사람들이, 그 당시에 힘듦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보내는 어린 친구들에 대한 응원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꼭 높은 성적을 받아야 해서 응원하는 것이 아니다. 인생에 몇 없을 큰 일을 치르는 경험을, 성인이 되기 전 나아가는 관문을 거치는 아이들을 위한 배려로 어른들이 마음을 써주는 것이다.
어릴 때 등산하다가 힘들다고 징징거리면 가족들이 뒤에서 등을 밀어주고 앞에서 손을 잡아 같이 올라갔었다. 대학 시절, 국토대장정을 할 때 같은 팀원들이 땀에 젖은 손을 기꺼이 잡아주고, 나 몰래 내 가방에서 물을 빼서 대신 들어줬다. 계약기간이 만료돼 회사를 떠나야 했을 때 회사 직원들이 마음을 모아 선물을 준비해주었다. 인생을 그리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감히 얘기해 보자면 이런 기억 하나하나가 모여서 진짜 힘들 때 뒤에서 나를 받치고 밀고 있었다. 수험생보다 먼저 일어나서 도시락을 만든 마음을 생각하면서 오늘을 살아낸다. 인생이 수능시험장이라면 그날 들고 간 도시락 같은 사람이, 그런 온기 가득한 마음이 있으면 조금 덜 울고 살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숫자상으로만 어른이 호두파이를 사다가 떠오른 기억을 끄적여 본다. 사실 수험생이 아니라 나에게 하는 이야기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