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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야 Jan 03. 2024

생강이 날 울려

 친구가 갑자기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이거 뭐게?” 하는 메시지와 함께. 사진 속에는 기다란 유리병에 꽂혀 있는 초록색 식물이 있었다. 1분 동안 사진을 들여다보며 머리를 굴려봤지만 정말 알 길이 없었다. 같이 간 여행지에서 본 식물인가? 재작년에 식물원에 갔을 때 에피소드가 있었던 식물인가? 뭔가 함께 한 추억이 있는 식물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게다가 난 식물에 대해 전혀 모른다.  


 결국 전혀 모르겠다고 실토하고 말았다. 돌아온 대답은 놀라웠다. 답은 식물이 아니라 그 식물을 꽂아둔 유리병에 있었다. 때는 작년 여름, 함께 안동 여행 막바지에 기념품샵에 갔을 때의 일이다. 안동은 생강이 유명해 생강으로 만든 제품을 여러 종류 판매하고 있었다. 생강을 좋아한다는 친구가 직원이 추천해 준 생강청을 살까 말까 망설였다.


 이 친구로 말할 것 같으면 이번 여행에서 운전을 담당해 준, 대학 시절 함께 국토대장정을 완주한 뜨거운 추억을 가진 친구다. 4명이 함께 한 여행에서 3명은 서울에서 기차를 탔고, 이 친구는 기차를 타지 않고 자차로 안동으로 와서 1박 2일 동안 여행지 내 이동을 담당했다. 덕분에 더운 날씨에 이동 수단 걱정 없이 편하게 다녔다. 우린 기차에서 잠을 잤지만 이 친구는 운전하느라 더 일찍 출발해서 피곤했을 것이다. 기름값은 따로 챙겨 주었지만 그래도 미안하고 고마웠다. 친구에게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생강청을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이미 생강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 한 뒤라서 왜 그걸 사는지 약간의 의심을 샀고, 둘러대느라 진땀을 뺐다.) 바로 주기엔 쑥스러워 헤어질 때 차 안에 놓고 내렸다. 그리고 나중에 고맙다는 말과 함께 뒷좌석에 선물을 남겨놨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게 뭐라고 당시 개인적 사정으로 고민이 많았던 친구에게 위로가 되었다고 한다. 아끼느라 한참을 못 먹고 있다가 다 먹은 뒤에도 깨끗하게 씻어 화병으로 썼고, 몇 달 전에 독립해 이사를 할 때도 저 화분을 들고 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억하고 간직해주다니 나야말로 감동이다.


 며칠 뒤에는 이 친구를 포함해 대장정 친구들의 연말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사정이 있어 모임에 갈 수 없는 나를 위로하려고 저 사진을 보낸 것이다. 게다가 연말 모임에서 내게 주려고 했던 20대 내 모습을 프린트한 사진 선물도 찍어 보내줬다. 혼자 카페에서 친구의 메시지를 확인한 나는 떨어지는 눈물을 참지 못해 졸지에 사연 있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날 저녁, 자꾸 생강병 사진이 아른거렸다. 친구가 힘들 때 저 병을 보고 날 생각하며 이겨낸 것처럼 나도 이제 그 사진을 보고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새벽 배송 도착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내가 뭘 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어리둥절하며 택배 상자를 보니 그 친구 이름이 있었다. 내용물은 슈톨렌과 딸기였다. 사실 슈톨렌을 너무 좋아해 2017년 겨울부터 매 년 12월 초가 되면 어디 슈톨렌을 먹을까 고민하고 미리 주문하는데 올 해는 마음에 여유가 없어 미처 사지 못했다. 그걸 어떻게 알고 또 슈톨렌을 보냈을까. 게다가 요즘 금값인 딸기까지. 어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내가 요즘 불안정하고 힘든 것을 눈치챈 친구의 따뜻한 마음이다.


 생강청, 딸기, 슈톨렌. 겨울에 자주 등장하는 이 단어를 보면 이제 그 친구가 생각날 것 같다. 우리 나이가 참 애매하고 힘든 나이인 것 같다. 딱히 젊지도 않은데 사회에서 자리 잡은 것도 아니라 다들 고민이 많다. 아직도 많이 서툴고 힘겹다. 하지만 이제는 서툰 것이 허용되기는 시기를 지나 어디서도 티 낼 수 없다. 그저 옆에 둘 생강청 병 같은 사람을 많이 만들어 서로 힘이 되며 버티고 살아남는 방법밖에 없는 것 같다.


2024년에는 우리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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