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상황이 조금 나아지면 연락해야지' 하다가 자꾸만 1년 2년 시간이 지나 만나지 못한 친구들을 생각했다. 내가 조금 더 당당해져서 웃는 얼굴로 보고 싶었는데 그럴수록 나는 더 동굴로 숨어드는 것 같았다.
전 직장 동료가 집들이에 초대받았다. 함께 일하던 다른 동료들도 참석하는 자리다. 같은 회사에서 일하긴 했지만 그들은 모두 정규직이었고 나만 비정규직이었다. 그들은 지금도 같은 회사를 다니고 있고, 나는 무직이다. 내 근황을 물으면 뭐라 말해야 할까, 다른 사람들은 기반을 다져가는데 나는 아직도 이리저리 휘둘리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까. 나도 내가 한심한데 다른 사람들은 날 뭐라고 생각할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만남을 꽤 긴 시간을 미루기만 했다. 더 이상 미루다가 이 사람들하고 멀어질 것만 같아서, 그러고 싶지 않아 용기 내 가기로 했다. 근황을 물어보면 솔직하게 현재 쉬고 있고 취업 준비를 하고 있다고, 지난주에도 면접에서 떨어졌다고, 일자리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물어야지 다짐하고 갔다.
고맙게도 전 직장 동료들은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내 근황이 궁금하고 묻고 싶은 게 많았을 텐데. 다른 사람들이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는 모습을 보며 자괴감이 들고 더 나를 미워할지도 모른다는 예상도 빗나갔다. 오랜만에 모인 사람들은 휴가나 출장에 갔다가 며칠 만에 만난 사람처럼 어색하지도 않고 그저 반가웠다. 몇 년 전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마음먹고 세상 밖에 나온 김에 늘 마음에 두었던 친구에게도 연락했다. 마침 직장동료 집들이를 가는 길이 친구 집을 지난다. 망설이다가 당일 오전에서야 연락했다. 갑작스러운 연락에도 흔쾌히 약속 끝나고 오라고 반겨주었다. 갑자기 연락한 건데 집 근처 맛집에서 저녁을 사주고, 차 마시러 친구네 집에 가보니 나 온다고 집 청소도 깨끗이 하고, 미리 집 근처 유명 디저트 카페에서 케이크와 빵을 사서 테이블에 세팅해 두었다. 이렇게 고맙고 미안할 데가. 난 빈손으로 갔는데.
친구를 만나 2년 동안 얼버무리고 숨겼던 내 민낯을 까버리니 시원했다. 자격지심에, 나 혼자 괜히 자괴감에 나는 제대로 말한 적이 없었는데 친구는 이미 다 눈치를 채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도 다른 방향으로 힘든 시간을 겪고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가는 길에 친구가 먹거리를 잔뜩 싸줬다. 집에 가는 길에 녹을까봐 보냉백에 담기까지 해서. 뭘 사가지는 못할 망정 자취생의 냉장고를 털어오다니. 뭐라도 보답을 하고 싶었다.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작은 위로라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가진 게 없는 나는 입을 털었다.
며칠 전 아침, 친한 동생에게
'온니'
이렇게 딱 한 단어의 메시지가 왔어. 근데 그걸 보고 갑자기 느낌이 싹 들어서
"결혼해?"라고 물었지.
그랬더니 그 동생이 "간만에 연락했고, 여태까지 언니한테 한 번도 남자친구 얘기 한 적 없는데"라고 답장이 왔어. 헛물을 켰구나 미안하다고 주절거렸더니
"아니 신기해서. 그것 때문에 연락한 건 아닌데 결혼 준비 하고 있긴 해"라는 거야. 연락한 이유는 아침에 나랑 같이 해외여행 가서 산 가방을 들고 출근하다가 그냥 내 생각이 나서라고, 진짜로 결혼 때문에 연락한 건 아니라고 하면서.
신기하지?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 '온니'라는 단어를 딱 보고 그냥 느낌이 왔다니까.
나는 이만큼 구구절절 이야기를 하고 본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 촉이 좋은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내가 봤는데 너랑 나랑 앞길이 그냥 꽃길이다. 내가 봤어, 보인다 보여.
했더니
친구는 이 얘기하려고 이렇게 밑밥을 깔았냐며 어이없어했다.
일요일 내내 집에서 전날 친구가 싸준 만두와 생과일주스를 먹었다. 먹으면서 일요일이 지나기 전에, 월요일 출근이 두려운 친구를 위해 뭐라도 하고 싶었다.
그림을 그려서 좀 재미있는 짤을 만들고 싶었는데 그림 실력 처참 이슈로 그냥 꽃밭이나 꽃길에 친구 사진을 합성하고 무한 도전 조정 편에서 정형돈의 내가 봤어 사진을 넣어 짤을 하나 만들기로 했다. 클라우드에서 어렵지 않게 이 친구를 포함한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여러 장 찾을 수 있었다. 초여름에 제주 수국밭 앞에서 찍은 사진, 안동 여행에서 우리끼리 대장정 꽃이라 부르는 루드베키아(대장정을 한참 하는 7~9월에 피는 꽃으로, 대장정 기간 내내 어딜 가든 다량으로 피어있었기 때문. 일상에서는 자주 보이는 꽃은 아니라 그 꽃을 보면 대장정 때가 생각난다) 앞에서 찍은 사진, 에버랜드 튤립 축제 때 당시 유행하던 꽃샷 등 너무 사진이 많아 추려야 할 정도였다.
그때도 나는 지금 진흙탕 한가운데 있다고 생각했는데 앞, 뒤, 옆, 위, 아래가 다 꽃이었다. 이렇게 많은데 새까맣게 잊고 살았다. 꽃밭 한가운데서 웃고 있는 나와 친구 사진을 보면서 오히려 내가 위로를 받았다. 후에 뒤돌아보면 지금도 꽃밭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