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형 인간의 무계획 치앙마이 여행기
철저한 계획형, MBTI J인 내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 계획 없이 해외에 체류한다는 건. 그런 내가 내일도 모레도 아무 계획도 없이, 심지어 묵을 숙도도 당일에 예약하며 여행 중이다. 현 시간 태국 시간으로 12월 31일 7시 27분. 혼자 치앙마이 타패 앞 스타벅스에 앉아 호지차라테를 마시며 내가 여기서 무얼 하는 걸까 생각하며 멍하니 새해 카운트다운 전 공연을 보고 있다. 블랙핑크의 인기를 말해주듯 붐바야, Pink Venom 공연이 이어진다. 좋은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한국 시간보다 2시간 느리니 2시간 늦게 나이를 먹게 되는 셈이다. 나이를 조금이라도 늦게 먹을 수 있다면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고 늘어지고 싶은 심정이므로 2시간 마저도 감사하다.
연말에 갑자기 가족 여행을 하게 됐다. 가족 여행도 출발이 일주일도 남지 않은 시점에 갑자기 계획하게 된 거라 치앙마이까지 왕복 무려 90만 원을 지불했다(참고로 코로나 직전 방콕 왕복 아시아나 항공을 47만 원에 끊었으니 항공권 가격이 인상된 현 상황을 감안해도 무척 비싼 편이다). 그렇게 갑자기 온 치앙마이에 또 갑자기 홀로 남게 됐다. 인천으로 출발 당일 아침, 비행기 티켓을 찢고(관용적 표현이다. 사실은 발권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찢은 건 아니고 그냥 8만 원 정도 손해 보고 취소했다) 홀로 남았다. 당일 공항으로 향하는 가족들을 배웅하고 체크아웃을 마친 호텔 로비에 앉아 급하게 숙소를 예약했다.
그렇게 남겨진 치앙마이에서 3일 차, 12월 31일이라 늦게까지 영업하는 곳이 많지 않다. 심지어 5시 30분까지 한다고 해서 3시 30분쯤 들어간 카페가 4시쯤부터 슬금슬금 간판을 들여놓기 시작하더니 4시 좀 넘어서는 직원 한 명이 주방 마감이라고 더 필요한 게 없냐고 묻고 직원들이 다 퇴근했다. 치앙마이 카페는 술집을 겸하지 않는 이상 5-6시 사이에 닫는 곳이 많아 들어가기 전에 몇 시까지 영업하냐고 물어봤는데! 눈치를 보아하니 연말이고 장사도 되지 않으니(손님이 나뿐이었다) 직원들 일찍 퇴근시키고 일찍 문을 닫으려는 것 같았다. 사장님이 나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 너무 티가 나서 부랴 부랴 노트북을 들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문까지 잡아주시며 환하게 인사하신다. 늦게까지 할 것 같은 스타벅스로 왔다. 역시 이럴 땐 대기업, 프랜차이즈가 최고다.
오늘 카운트다운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었는데 우연히 타패게이트 앞 스타벅스로 오니 이미 오늘 카운트다운을 위한 무대 세팅이 끝난 상태였다. 해 질 무렵 도착해 운 좋게 스타벅스에서 뷰가 제일 좋은 창가 자리에 앉아 한가하게 카운트 다운 전 공연을 보고 있다. 카운트다운 공연을 보면서 귀국 편 비행기를 예매했다. 언제 돌아가야 할지 계획도 없이 며칠을 보내다가 항공권 예매 사이트를 보니 무슨 일인지 일주일 후부터 비행기 값이 급격히 비싸진다. 마침 한국에서 사 온 유심의 사용 기한도 그때 즈음이라 그냥 비행기표가 쌀 때 귀국하기로 했다. 남은 시간은 일주일, 이 시간을 어떻게 즐겨볼까.
6시가 넘어가면 금방 어두워지고, 번화가였다가도 안쪽 골목으로 세 걸음만 들어가면 어두워지는 곳이라 해 진 이후에 혼자 돌아다니지 않는다. 그런데 어쩐지 오늘은 어두컴컴하고 방음이 되지 않는 싸구려 호스텔에서 혼자 새해를 맞이하고 싶진 않다. 여기서 12시까지 죽치다가 카운트다운을 보고 들어갈 것인가, 그냥 이른 귀가를 때리고 유튜브로 한국 카운트다운을 볼까 고민 중이다. 아직도 결정하지 못하고 글을 쓰고 있다. 이번 치앙마이 여행은 브런치에 글로 상세히 남겨야겠다는 결심만 한 채로. 계획형 인간도 아무 계획 없이 유유자적 떠돌게 되는, 치앙마이 여행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나저나 나 귀가 가능할까. 저녁 8시 30분 스타벅스에서 보는 타패 광장 앞 현 상황. 왼쪽은 토요일이라 야시장이 선 모습, 중앙은 카운트다운 무대. 오른쪽 끝에 보이는 타패 안쪽으로 들어가야 숙소다. 저 사람들 사이를 지나 귀가해야 하는데. 2시간 전의 모습인 아래 사진과 비교해 확연히 많아진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