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목적 탐미성의 도착지, 「국보」

国宝, 이상일, 2025

by 우판다

야쿠자 두목의 아들인 키쿠오(요시자와 료/아역: 쿠로카와 소야)는 가부키에서 여성 역할을 하는 남자 배우인 온나가타로서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 야쿠자 조직 간의 세력 싸움으로 조실부모한 그는 가부키 명문 당주 한지로(와타나베 켄)의 눈에 띄어 가문 견습생으로 지내게 된다. 그는 한지로의 아들인 슌스케(오코하마 류세이, 아역: 코시야마 케이타츠)와 경쟁하고 실력을 쌓아 함께 스타 배우로 발돋움하지만, 세습 문화가 팽배한 가부키 세계에서 당주의 핏줄을 이어받지 못한 자신의 한계를 감지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지로는 교통사고를 당해 예정된 공연에 오르지 못하게 된다. 한지로는 아들인 슌스케에게 대역을 맡길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키쿠오에게 대역을 맡긴다. ‘소네자키 동반 자살’의 오하츠 역을 꿰찬 키쿠오는 이 일을 계기로 슌스케와 뒤바뀐 운명을 얼마간 걸어가게 된다.

결국, 인간 국보에 이른 키쿠오의 삶은 주체적 성취라기보다는 차라리 병리적 집착이 초래한 객체적 현상이라고 하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인간 국보’라는 단어가 풍기는 문화재적 뉘앙스를 곱씹어보자면 더욱 들어맞는 말이다(문화재라는 용어는 물건을 뜻하며, 2024년 5월 한국 국가유산청은 무형유산 전승자인 사람을 문화재에 포함하지 않고, 국가유산 체계로 전환했다).

유사 형제, 연인 심지어 가족까지 희생시켜 가며 도달한 인간 국보의 자리에서 키쿠오는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맹목적인 탐미성과 집착으로 너덜너덜해진 채 도착한 아름다운 풍경은 대체 어디인가? 그리고 그것은 인생의 많은 부분을 희생시키면서까지 획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이 두 질문에 대해, 러닝타임 내내 빈번하게 사용된 클로즈업과 「국보」가 설정한 내러티브적 장치에 기대어 논의해 보려 한다.

공간을 해체하는 클로즈업과 풍경의 좌표

무대 안에서 펼쳐지는 가부키 공연의 테마와 대사는 무대 밖에서 진행되는 플롯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 관계 그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도식적인 쇼트들로 배치되어 있기에 일일이 풀어 서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국보」가 무대 안팎의 관계를 맺는 방식에 대해서는 말해질 필요가 있다. 「국보」는 클로즈업을 통해 무대 안/무대 밖 공간의 경계를 해체한 후, 나란히 배치하여 관계 맺기를 달성한다. 「국보」의 클로즈업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이를 통해 키쿠오가 염원하던 풍경의 위치를 탐색해 보자.


「국보」는 가부키 공연이라는 소재로 이중 프레임의 구조를 따라 극중극 형식으로 전개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국보」는 이중 프레임 대신 클로즈업 쇼트를 계속해서 등장시킨다. 들뢰즈는 『시네마 1: 운동-이미지』에서 “정감-이미지는 곧 클로즈업이며, 클로즈업은 곧 얼굴”이라고 주장한다. 클로즈업이란 존재가 드러나는 얼굴의 형식이며, 얼굴은 이미지 자체가 가지는 정감의 강도를 보여주는 표면이라는 것이다. 「국보」에서 시종 사용되는 클로즈업은 이러한 특성을 통해 극중극 형식에 저항하고, 나아가 무대 안팎의 공간성을 해체 시킨다.

키쿠오가 한지로의 대역으로 연기한 ‘소네자키 동반 자살‘ 장면을 들여다보자. 마스터 쇼트로 공연 장면을 설정한 카메라는 몇 개의 쇼트를 경유하더니 성큼 키쿠오의 얼굴을 화면 가득 클로즈업한다. 망원렌즈를 통한 아웃포커싱은 원근을 상실시키고 무대 안 공간을 파편화한다. 나아가서 카메라는 객석에 앉아 괴로워하고 있는 슌스케에게도 다가간다. 이번에도 서서히 근접해 가다가 성큼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극단적으로 제한된 시야는 또다시 거리감과 깊이감을 상실케 한다. 보니체는 클로즈업을 통해 “이미지의 강렬하게 물리적인 수준에서 사건들은 의미를 상실할 정도로 파편화되고, 감각들이 감정들보다 우위에 선다.”라고 말한다. 또 들뢰즈에 따르면 “클로즈업은 사물을 그것이 속한 전체로부터 뜯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모든 시공간적 좌표에서 추출해, 하나의 존재 상태로 끌어올린다.” 따라서 “클로즈업은 단순한 확대가 아니라, 물리적 움직임(translation)에서 정서적 움직임(expression)으로 변이하는 일이다.” 「국보」는 이러한 방식으로 파편화된 공간감을 통해 무대 안과 밖의 공간을 동일한 평면으로 압축한다. 극중극이라는 단계적 관계를 파괴하고 가부키 공연과 삶 사이의 동시적 동질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무대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무대 밖의 삶과 다름없고, 무대 밖의 삶은 무대 안의 공연과 다름없어진다. 이 점은 중요한데, 무대 안에서 발화되는 대사와 조명을 비롯한 특수효과는 더 이상 가부키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국지적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삶까지 영향력을 발휘하는 마법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검푸른 배경 위로 꽃잎들이 떨어진다. 키쿠오가 오래도록 찾아온 풍경이다. 키쿠오는 이 풍경을 어린 시절 만키쿠(다나카 민)의 ‘백로 아가씨’ 공연을 관람한 것을 계기로 그 감각을 좇아왔다. 말하자면, 이 풍경은 국보급 경지의 이미지이자 예술적 감각의 존엄함이다. 이 이미지는 키쿠오가 인간 국보로 거듭나 직접 ‘백로 아가씨’ 공연을 할 때 재현된다. 공연이 끝난 후, 또다시 클로즈업된 키쿠오의 얼굴은 비로소 자신이 집착했던 풍경을 마주한다. 이제 이 조명과 꽃잎들은 무대 장치인 동시에 무대 밖까지 실재하는 이미지다. 예술이 무대 안팎의 경계를 허물고 생애에 음각되는 자리, 키쿠오가 국보급 경지에 올라 도착한 풍경의 좌표다.

문신과 핏줄의 운명론

키쿠오의 등에는 수리부엉이 문신 위로 영화의 제목인 ‘국보’라는 글자가 포개어진다. 어쩌면 인간 국보에 대한 키쿠오의 집착과 욕망은 이미 이때부터 문신처럼 새겨져 돌이킬 수 없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사회적 규정인 핏줄과 달리, 문신은 그가 스스로 새긴 표식이자 한번 새겨지면 지워지지 않는 각인이다. 즉, 야쿠자 두목의 아들이었다가 한순간에 고아가 된 키쿠오의 핏줄에 대한 결핍이 운명으로 굳어지는 흔적이다.

해당 씬에서 그의 말에 따르면, 수리부엉이는 ‘은혜를 갚는’ 조류이다. 그런데 수리부엉이 문신을 하고서 키쿠오가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은혜를 갚는 것이 아닌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것이었다. 나아가 자신을 거두어준 한지로의 집안에도, 자신을 뒷바라지해 준 여성들에게도 은혜를 원수로 갚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의 문신은 보은의 의지라기보다는 유년기 실패했던 복수의 의지이자 권력 관계를 전복시키려는 욕구처럼 느껴진다. (키쿠오는 한지로로부터 예술은 총과 칼보다 강하며, 가부키 재능으로 언젠가 원수를 갚으면 된다는 조언을 들었다.)

키쿠오는 복수의 의지를 견지한 채 그것을 이루기 위해, 가부키적 핏줄과 대결하는 듯하다. 이번에는 가부키 명문가의 핏줄과 키쿠오 사이의 관계를 들여다보고, 나아가 키쿠오가 획득한 풍경의 가치에 대해 답해보려 한다.


들뢰즈·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욕망은 결핍이 아니라 충만함이며, 긍정이다. 욕망은 생산이다.”라고 말한다. 온나가타인 키쿠오의 핏줄에 대한 결핍이 그를 인간 국보로 만들어 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욕망은 결핍이 아닌 생산으로 작동하여 그를 인간 국보의 자리에 이르게 한다.

키쿠오가 슌스케 대신 한지로의 대역을 맡아 ‘소네자키 동반 자살’을 공연했을 때, 공연 전 그는 슌스케에게 “내가 지금 가장 원하는 건 너의 피야. 내겐 나를 지켜줄 피가 없어.”라고 말하며 자신의 결핍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결핍은 둘의 인생을 도치시킨다. 공연을 보다 뛰쳐나간 슌스케는 키쿠오의 연인이었던 하루에와 가정을 이루고, 키쿠오는 슌스케가 데려다준 교토의 요정에서 만난 후지코마와 살림을 꾸린다. 그리고 키쿠오는 가출한 슌스케 대신 ‘한지로’의 예명을 세습한다. 이 두 사람의 전복된 관계는 얼마간 지속되지만, 질긴 핏줄의 항상성으로 인해 점점 제자리를 찾아간다. 그리고 슌스케가 오하츠 역을 맡으며 함께 무대에 설 때 완전히 돌아온다. 슌스케가 무대 위에서 죽음의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그 원상복구의 마침표다.

예명 세습 공연에서 ‘백호’라는 예명을 세습하는 한지로는 무대 위에서 각혈하며 쓰러진다. 핏줄이 아닌 키쿠오에게 자신의 예명을 물려준 한지로가 피와 함께 슌스케의 이름을 토해내는 것은 과연 상징적이다. 그러고 보면, 한지로의 집안 내력은 당뇨가 아니라 차라리 예술가로서 맞이하는 무대 위 죽음이라고 하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키쿠오와 슌스케의 예술가적 운명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들이 펼친 ‘소네자키 동반 자살’ 공연의 인상적인 시퀀스에서 슌스케는 핏줄을 따라 아버지와 비슷한 죽음을 맞이했고,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슌스케가 없는 가부키 세계에서 키쿠오는 인간 국보가 되었다. 결국, 결핍은 운명을 거스르지 못했고, 생산으로 발현된 욕망만이 키쿠오를 인간 국보의 자리에 오르게 했다. 이제 질문에 답해보자, 엔딩 시퀀스에 이르러 키쿠오가 획득한 풍경은 가치 있는 것인가?


키쿠오의 딸은 아버지로서의 그를 혐오하지만, 객석에 앉아 무대에 선 예술가로서의 그를 볼 때면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고 말한다. 키쿠오가 인간 국보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개인적 시선에서는 저주스러운 아집이지만, 공동체적 시선에서는 숭고한 자기희생인 것이다. 또, 들뢰즈·가타리는 “만약 욕망이 생산한다면, 그 산물은 실재다. 욕망이 생산적이라면, 그것은 오직 현실 세계에서만 생산적이며 오직 현실을 생산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문신으로 환유된 키쿠오의 욕망과 그가 도달한 풍경의 이미지는 단지 상징이나 허구가 아니라 현실을 만들어내는 힘을 가진 실재이다.

엔딩 시퀀스에서의 아름다운 풍경 이미지는 단순히 찬란한 성공담의 추상적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가족과 삶을 파괴한 대가의 흔적이자, 세습적 질서에 대한 탈 영토적 가치를 가진다. 인간 국보로 향하는 키쿠오의 과정을 도덕적으로 긍정하긴 어렵다. 그러나 이 가치는 주체적 운명과 객체적 운명을 교차하며 예술의 고유함을 호출했고, 실재하며, 무엇보다 아름답다.

맺으며,

핏줄과 재능의 대립은 비단 가부키 세계만의 질서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도 핏줄의 논리에 따라 권력과 부가 세습된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는 자주, 개인의 재능과 존엄성을 묵살 시키곤 한다.

들뢰즈·가타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예술은 감각을 보존하는 것”이며, “죽음, 노예제, 불명예, 수치, 광기 같은 것들에 맞서는 저항”이라고 말한다. 키쿠오는 자신의 핏줄을 따른 야쿠자 두목이 되지 못했고, 세습 문화에 밀려 그저 그런 온나가타 배우가 되지도 않았다. ‘인간 국보’ 키쿠오의 자기희생(혹은, 저주스러운 아집)을 클로즈업으로 관람하고 있자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나쁜 질서 사이에서도 그 풍경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 이제 키쿠오의 욕망은 맹목적인 탐미성이라기보다는 세습의 질서 속에서 감각의 존엄을 회복하려는 저항으로 읽힌다. 욕망의 생산성과 감각의 존엄을 위한 저항을 예술적 이미지로 설득력 있게 제시한 것. 「국보」가 이룬 가장 큰 성취이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 새해를 맞이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