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ker: Folie à Deux, 토드 필립스, 2024
쿠엔틴 타란티노는 한 인터뷰에서 「조커」(2019)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극장에서 「조커」를 보는 관객이라면, 토크 쇼 장면에서 호아킨 피닉스가 로버트 드 니로를 죽이기를 바란다. 총을 꺼낸 뒤 눈앞에서 머리통을 갈겨버리기를 바란다. 만약 그가 로버트 드 니로를 죽이지 않았다면, 관객들은 화가 났을 것이다.” 이러한 의견은 리(레이디 가가)가 아서(호아킨 피닉스)를 처음 대면했을 때, 리의 입을 통해 재현된다. 흥미로운 지점은 리가 아서의 이야기로 만들어진 영화를 수십 번 보았다고 고백할 때이다. 이때 관객은 「조커」와 「조커: 폴리 아 되」를 기저로 산포 된 몇 가지 경우의 수를 떠올릴 수 있다. 그 중 돌올하는 두 가지 질문이 있다. 「조커」는 「조커: 폴리 아 되」 속 실재의 사건이고, 리는 오프닝으로 제시된 애니메이션처럼(이 인상적인 시퀀스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이야기하겠다.) 그것을 재현한 어떤 영화를 본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이전에 관람한 「조커」를 리도 함께 본 것인가.
두 번째 질문은 언뜻 미욱한 사유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현실의 재현된 이미지로 여겨지기 일쑤이며 더군다나 고담시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 중 인물과 관객이 공유하는 은연한 분노와 광기는 너무 닮은 것이라서 질문의 그 미욱함을 단숨에 횡단해버린다. 그러니까 「조커: 폴리 아 되」의 메타적인 어법의 가장 큰 성취는 조커를 관객의 세상으로 배출하는 데에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세상에 만연한 광기와 나쁜 질서를 호출하고, 자주 익명이거나 무명인 그것에 조커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다.
많은 영화들이 인물의 개인적인 감정과 욕구를 세상의 그것으로 확장하기 위해서 러닝타임 내내 노력한다. 그런데 「조커: 폴리 아 되」는 반대로 관객을 확장된 세계에서 출발시키고는, 아서의 내면적 층위로 도달하기를 요구하는 듯하다. 이러한 역류성의 연원은 전작인 「조커」의 정치적이고, 전언주의적 텍스트가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논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이러한 사회적 논란을 간단한 대사 몇 마디로 정면돌파하더니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소환시켜 부지런히 축소해 나간다. 말하자면, 「조커」는 확장했고, 「조커: 폴리 아 되」는 축소 시킨다. 그리고 그 축소는 후퇴가 아니라 오히려 쾌도난마의 전진성을 띈다. 흐트러진 정치적 텍스트는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봉사케 하고, 아서의 내면적 층위의 확장을 향해 전진한다. 「조커: 폴리 아 되」의 이러한 태도는 극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다르게 경쾌하다. 오프닝 시퀀스 이후 전작과 같이 비스타비전으로 시작한 「조커: 폴리 아 되」의 프레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서가 여느 죄수들처럼 줄지어 이동할 때 일순 시네마스코프로 변모한다. 이것은 뮤지컬을 통해 영화와 현실 사이의 상호텍스트성을 구축하고, 아서의 내면을 조탁하겠다는 발칙한 선언처럼 느껴진다.
뮤지컬 특유의 독백 혹은 방백적 성격은 아서의 망상과 영화적 환영幻影에 절묘하게 포개어진다. 그렇기에 관객은 그 모든 층위를 횡행하게 되고 혼란스러워진다. 어디까지가 아서의 망상인가. 극 중 인물들은 실제로 아서와 상호작용을 하였는가. 했다면 어디까지가 진짜인가.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아서의 망상인가. 「조커: 폴리 아 되」 자체가 영화라는 텍스트 바깥에서 일어난 사건의 영화화인가. 애초에 영화란 허구일 뿐인가. 조커는 정말 이 세상에 있(었)는가.
앞서 말했다시피 「조커: 폴리 아 되」는 세상으로의 확장이라기보다는 아서로의 축소이다. 그렇다면 관객은 결국 이러한 질문들을 관류하면서도 아서의 내면으로 침투해야 한다. 그러니까 조커라고 이름 붙여진 세상의 광기를 탐색해야 한다. 「조커: 폴리 아 되」라는 제목은 짐짓 아서의 공유정신병적 장애를 타진하는 정신분석적 접근을 부추기는 듯하다. 그러나 아서가 시종 전개하는 망상의 발단과 말초를 정확히 진단하기란 도무지 불가하다. ‘이중인격자의 한 인격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다른 인격이 처벌받는 것이 옳은가?’와 같은 도덕적 딜레마를 다루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커: 폴리 아 되」를 관류하는 음악성을 정신분석으로 해부하기보다는 아서(‘Art’thur)라는 ‘예술’가이자 작가(Author)의 얼룩(Fleck) 같은 망상과 향응시키는 편이 명쾌할 것이다. 이제 조커는 아서의 유년시절 트라우마로 형성된 병리적 자아라기보다는 차라리 예술적 페르소나로 치환된다. 물론, 질병이나 예술이 언제나 살인의 유능한 변호사가 되어 그것을 미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캄 교도소에서 한 수감자가 노래를 부르다 교도관에게 살해되었을 때, 죄목은 잠시 선악의 피안으로 뒷걸음질 친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세상의 나쁜 질서와 사랑의 융합 반응으로 폭발하는 인간의 예술성. 그리고 그것의 초라한 가역성을 다루는 예술혼의 오디세이다. 이 예술가를 위해 준비된 무대는 법정이다.
무대에서 퇴장하는 할리 퀸
법정 공방의 주요 논지는 아서가 정말 이중인격적 정신병을 앓고 있는지이다. 조커의 독립이 인정되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사형이다. 개인의 예술성이 질병으로 분류되지 않는다면 사멸되어야 하는 율법 아래에서 아서는 결국 조커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재판장은 자유롭게 복장을 선택할 개인의 권리를 존중해 조커의 외형은 인정하지만, 재판정을 무대로 전락시키지 말 것을 경고한다(그러나 재판정은 곧 머레이(로버트 드 니로)의 라이브 쇼의 후신이 된다). 그것은 자유의 형태를 존중하는 듯하지만, 그것의 발산을 엄격하게 제재하는 규칙이다. 그러나 이 예술가는 유려한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어떤 층위에서는 노래를. 다른 층위에서는 코미디를. 연극을. 무용을. 그리고 텍스트와 세상의 착점에서는 영화를(뮤지컬이든 극영화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선보인다. 그야말로 종합예술의 주체인 아서는 그 모든 층위를 에두른 범죄적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 절창한다. 그 대가로 아서가 받은 것은 폭력과 감금이고, 팬들(그리고 극장에서 이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의 찬사로부터는 단절된다.
법정 공연의 가장 처연한 지점은 조커의 존재를 부정하는 아서의 선언이다. 이것은 다만 목숨을 부지하고 싶어 끝내 예술가의 긍지를 져버린 아서의 발버둥일까. ‘법정/무대, 방청객/관객’이라는 도식 속에서 극장의 관객은 어쩐지 배심원의 좌석에서 불편하다. 그 선언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일 텐데, 이때 법정 상황을 중계하는 카메라가 담아낸 아서의 클로즈업의 잉여적인 쇼트가 환기를 해준다. 따라서 관객은 얼굴에 분칠하고 무대로 다가가 공연의 폭력성을 탐닉하다가도, 어려운 결정을 할 때는 한발 물러나 배심원단에게 그것을 전가하면서 자신들의 도덕성을 선처받는다. 그러니까 아서의 선언은 이런 비겁한 반복의 종식선언이고, 방청객/관객이 품은 광기의 대행자로서의 자인이다. 방청객/관객들은 실망하고 떠난다. 리도 그중 하나다.
「조커: 폴리 아 되」에서 리의 존재는 독보적이다. 리는 극 중 다른 인물들과 다르게 텍스트의 너무 안쪽에 있거나, 너무 바깥쪽에 있다. 그녀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아서의 망상 속 신기루와 같아서 리와 상호작용을 하는 나머지 인물들의 존재마저 부정시키는 느낌을 받는다(어쩌면 이것이 「조커: 폴리 아 되」가 새로 부여한 빌런으로서의 할리퀸이 가진 슈퍼 파워일지도 모르겠다). 「수어사이드 스쿼드」(2016)의 할리 퀸(마고 로비)은 조커의 소유물이었다가 페미니즘적 시류에 힘입어 조커의 자장으로부터 느슨한 탈출을 했다. 그런데 「조커: 폴리 아 되」의 할리 퀸은 아서의 망상이 완성 시킨 창작물인 듯하지만, 오히려 그를 광기로 종용한다. 「조커: 폴리 아 되」에서 조커와 할리 퀸의 관계는 대등하거나, 어쩌면 전복되어 있다.
아서와 그 팬들의 찬사를 단절시킨 두꺼운 벽은 법정에서 붕괴되었다. 그가 찾아간 사람은 리이다. 그녀는 「조커」에서 아서가 왕성한 광기를 내뿜으며 지르밟아 내려온 계단 위에 앉아 있다. 이제 아서는 그 계단을 도로 올라가야 한다. 그는 이 세상에서 언제나 사랑받고 싶었고, 사랑하고 싶었다. 말하자면, 세상에 키스하고 싶었다. 그러나 계단을 오른 그 염원은 리에게 부정당한다. 그녀는 이제 무대에서 퇴장한다.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예술가의 순교인가
전작의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인 머레이 쇼 총격 시퀀스를 개관하는 오프닝의 애니메이션은 아서의 공유정신병적 장애를 암시한다. 그림자가 저지른 만행을 대속하게 된 본체의 동기는 다만 사람들로부터 박수받고 싶었을 뿐이다. 피로 범벅이 된 스크린이 붉은 커튼이 되고, 그것이 걷히면서 드러나는 아캄 교도소의 내부 색감은 잠시 동안 애니메이션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조커들 두들겨 패던 교도관들의 실사가 프레임 내부로 걸어들어올 때 비로소 극영화의 진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
다소 엉뚱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극중극 형태로 연쇄하는 쇼트는 웨스 앤더슨의 냄새를 풍긴다. 웨스 앤더슨의 어법은 극중극의 형태로 개진하여 삶의 입자에는 언제나 동화와 예술이 깃들어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고 보면, 아캄 교도소는 뒤집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같다. 시종 사각 프레임에 갇혀 질식할 것만 같은 아서의 모습은 비단 속박된 그의 육체와 정신의 환유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깊숙한 곳까지 음각되어 있는 음악이 탄생하는 과정과 그 현현을 현미경처럼 정밀하게 관찰하려는 의도처럼 느껴진다. 「조커: 폴리 아 되」에서 노래는 앞서 말한 오프닝 시퀀스에서 아캄 교도소 내부로 연결되는 쇼트의 연쇄처럼 스며들 듯이 틈입한다. 그러다 아서의 광기가 전경화될수록 과감하게 등장한다.
「조커: 폴리 아 되」 속 노래는 종종 종교적인데, 또 다른 자아가 저지른 만행(혹은 예술)을 대속하는 아서의 순교적 암시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아서는 사형대가 아닌 수감자의 칼에 찔려 죽는다. 결국, 「조커: 폴리 아 되」는 범죄와 동란을 배태한 예술의 신격화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서는 그 순간 노래한다. 퇴장한 리는 재등장하여 조커의 죽음을 상기시키고, 아서는 더 이상 타인의 인정과 관심을 걸근거리는 광대가 아닌, 위대한 예술가로 거듭난다. 물론, 이 아름다운 단말마는 아서의 내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그가 스스로 위로하는 매개인 아이의 존재 또한 불분명하다(리가 아서의 독방에 들어와 섹스하는 장면은 개연성이 떨어지기에 아서의 망상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임신했다는 리의 말은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서의 예술성과 죽음은 한낱 자기기만이자 무의미한 공회전일 뿐인 걸까?
오프닝 시퀀스의 스탠다드 화면비에서부터, 다시 신발을 신고 세상에 순응하기를 강요받는 비스타비전을 경유하여, 도달한 시네마스코프에서. 모로 누워 그 광활한 화면을 가득 메운 아서의 빈사지경에서는 분명 어떤 음악이 들린다. 쉼표가 가득한 음악이. 아서의 예술성은 결국 그 모든 층위를 뚫고 해방되었다. 그러니까 오, 오, 오,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