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과 미어질 결심 사이,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

by 우판다



품위는 자부심에서 나온다. 박찬욱 감독의 11번째 장편 영화 「헤어질 결심」은 품위 있다. 그것은 철저함보다는 차라리 집착에 가까운 스타일의 연쇄에서 발산된다. 단단하게 조탁 된 영화의 견고함은 어떤 파도가 몰아쳐도 쉽사리 붕괴될 것 같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품위는 관객을 미스터리 한 영화의 안개 속으로 기꺼이 입장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능력 있는 형사 해준(박해일)은 기도수(유승목)의 사망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의 아내인 서래(탕웨이)를 만나게 된다. 서래는 남편이 죽었음에도 감정적인 동요를 보이지 않고, 이따금 웃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해준은 그런 서래를 의심하게 되고, 잠복하며 그녀를 감시한다. 그러다 기도수의 사건이 자살로 종결되면서, 서래에 대한 해준의 의심은 허물을 벗고 사심으로 변태한다. 둘은 서로에 대한 호감을 조금씩 표현하면서 연정을 쌓는다. 그러던 중 해준은 우연히 서래가 간호하는 월요일 할머니(정영숙)의 핸드폰으로부터 수상한 점을 발견하게 되고, 그녀를 다시 의심하기 시작한다.

색에 대해

「헤어질 결심」의 가장 표층적인 의문점은 안개처럼 불투명한 서래의 정체성에 있다. 극이 전개되는 동안 서래는 비련의 여인으로 보였다가, 팜므 파탈(Femme Fatale)의 악녀로 보였다가 한다. 그렇기에 파랑으로 보였다, 녹색으로 보였다 하는 청록색의 원피스는 서래를 설명하는 주요한 상징이 된다. 서래를 처음 본 인물들(1부의 해준을 포함한)은 보통 그녀가 입은 옷의 색깔을 파란색으로 인식하는 반면, 이포에서 서래를 의심하는 2부의 해준은 그녀의 옷을 초록색으로 인식한다. 말하자면 「헤어질 결심」 속 파란색은 연민과 선의를, 초록색은 죽음 또는 그것을 배태한 사랑(혹은 ‘독한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청록색은 또한 펜타닐의 색깔이기도 하다. 서래는 펜타닐로 자신의 어머니(최선자)와 철성(서현우)의 어머니를 살해한다. 펜타닐을 투여받은 이들 모두 편안하게 생을 마감했다는 점에서 펜타닐의 색깔은 파란색으로 보이기도 하고, 적극적 안락사로 타인을 살해했다는 점에서(심지어 철성의 어머니에게는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투여한 듯하다.) 초록색으로 보이기도 한다.

모래를 파는 양동이의 색깔에도 집중해 볼 수 있다. 1부에서 까마귀를 묻어주기 위해 사용했던 양동이는 파란색이고, 2부에 서래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사용한 양동이는 초록색이다. 해준이 서래를 몰래 감시(혹은, 보호)하는 관점으로 진행되는 1부의 특성상 서래가 1부에 실제로 입고 있던 옷은 파란색이 아닐 수도 있다. 다만 해준이 서래에게 느꼈던 인상이 파란색의 그것과 같기 때문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서래가 직접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할 때는 항상 빨간색 소품(빨간 옷과 꽃)이 활용된다.

질곡동 사건의 피의자 산오 역役은 분량이 적은 단역임에도 불구하고 박정민이라는 스타 배우가 맡아 연기했다. 극 중 질곡동 사건에 대한 중요도를 고려한 박찬욱 감독의 캐스팅이다. 감옥에 갇히는 것을 죽는 것보다 싫어하는 산오는 자신이 사랑하는 가인(정하담)에 대한 질투로 살인을 저질렀다. 가인을 죽을 만큼 좋아하는 산오가 형사들에게 쫓기다가 결국 다다른 옥상은 초록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다. 짧은 쇼트 두 개를 경유하면, 초록 옥상 바닥에는 산오의 붉은 피만 남아 있다.

「헤어질 결심」 속 1부와 2부의 배경은 각각 산과 바다이다. 이것에 색깔을 대입해 보면 산은 초록색이고, 바다는 파란색으로 갈음할 수 있다. 그리고 해준이 맡은 사건의 관점으로 보면 이러한 대입은 꼭 들어맞는다. 1부에서 서래는 사건의 범인이기에 초록색의 인물이고, 2부에서는 사건의 직접적인 범인이 아닌 파란색의 인물이다. 그러나 해준은 1부에서 서래를 파란색의 인물로 인식하고, 2부에서는 초록색의 인물로 인식한다. 흥미롭다. 잠깐, 그런데 이런 색깔로 무엇을 호출할 수 있을까? 여태까지 실컷 색깔을 가지고 신나게 설명해 놓고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색에 대한 상징들이 결국 무엇도 호출해 낼 수 없다면, 이것은 다만 색깔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헤어질 결심」의 치밀한 색감을 단순히 오락적 감상을 풍부하게 하는 도구로 소비한다면, 우리는 각각의 색깔들이 가지는 의미에 그렇게까지 몰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신호등의 불빛을 보고 '파란불'이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같은 불빛을 보고는 '초록불'이라고 한다. '파란불'이든 '초록불'이든 그것은 분명 같은 불빛이며, 뭐라고 불리든 간에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불빛이 의미하는 신호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움직이는 것이다.

서래가 초록색의 인물로 불리든 파란색의 인물로 불리든 중요하지 않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그 자체로 존재하는 송서래의 의미와 그녀의 신호다. 이제 우리는 송서래를 미스터리라는 장르의 쾌감에 봉사하는 도구적 여성이 아닌 '송서래' 그 자체로 봐야 한다. 적어도 해준은 그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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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준의 응시

담배는 안 피워도, 바람은 피운다. 해준은 언뜻 점잖고, 도저한 인물로 보이지만 살인 사건과 같은 자극적인 범죄가 없으면 생기를 잃는 자극 추구형 인물이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서 신발, 특히 구두와 운동화의 의미는 뚜렷한데, 구두는 주로 억압과 콤플렉스를 상징하고 운동화는 자유를 상징한다. 자극적인 사건이 없는 이포로 전근해 온 해준은 구두를 신으며 초췌해지다가 살인 사건이 벌어진 후, 운동화를 신으며 생기를 되찾는다. 살인 사건을 야기하여 해준이 생기를 되찾게 만든 사람은 서래다. 반면, 해준은 그의 아내인 정안(이정현)과 있을 때 피폐해진다. 해준과 정안의 부부 관계는 마치 ‘완전 안전한 원전’처럼 느껴진다. 둘의 관계는 겉으로는 안전하고 문제없지만, 그 속에는 핵과 같은 폭발물을 품고 있다.


해준은 또한 세상을 똑바로 보려고 노력하는 인물이다. 해준이 안약을 넣는 장면은 죽은 사람의 건조한 눈과 대비되어 그의 인물상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그러나 해준은 서래를 똑바로, 그러니까 '송서래' 그 자체로 보지 못한다. 그는 서래가 살인자일 때는 보호받아야 할 비련의 여성으로 보았고, 서래가 자신을 사랑할 때는 살인 용의자로 보았다. 해준이 잠복 수사를 할 땐 서래가 눈물을 흘린다고 봤지만, 사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이때 그녀의 웃음은 마치 해준의 남성적 응시(male gaze)에 대한 비웃음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서래에 대한 해준의 분노는 그녀가 남성적 응시를 전복시킴으로써 '붕괴'되어버린 남성중심적 율법에 대한 분노의 환유이지 않을까?

보는 것은 또한 듣는 것과 대비되기도 하는데, 해준이 서래를 파악할 때 더 주요하게 작용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시각이 아닌 청각이다. 그는 스마트폰 녹음과 번역기를 통해 서래의 음성을 듣고 그녀를 판단한다. 이러한 모순됨은 결국 해준이라는 인물이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붕괴되는 원인이 된다.

품위와 결심

「헤어질 결심」은 서래의 이야기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영원히 그렇다.

남성주의의 자장에서 촬영된 영화 속 여성은 자주 관음의 대상이(었)다. 또한, 남성에게 순종적인 여성은 올바른 여성상으로 규정되면서, 자기주장이 강하거나 욕구 실현을 위해 행동하는 여성은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극의 종반부엔 보복 당한다. 청록색 원피스를 입은 서래는 「현기증」(알프레드 히치콕, 1958)의 주디 바튼(킴 노박)을 떠올리게 만든다. (또한, 1부에서 높은 곳에 오른 인물들이 느끼는 고소공포증을 달리-줌으로 담아낸 연출도 그러하다.) 주디 바튼은 (그 시대의 잣대를 들이밀자면) 남성을 기만했기 때문에 보복을 당해 사망하게 된다.

「헤어질 결심」의 섹슈얼한 은유와 서래를 포착하는 카메라의 방식은 형사의 잠복 수사라는 미명 아래에 이러한 남성주의적 관음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의 품위는 시대착오적인 어법을 허락하지 않는다. 도리어 뒤집는다. 해준에게 일방적으로 관음 당하는 줄 알았던 서래는 사실 해준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오히려 차에서 자고 있던 해준의 사진을 찍기도 하고, 질곡동 사건의 피의자를 잡기 위해 오빠 PC방으로 향한 해준을 미행하기도 한다. 2부에서는 둘의 관계가 완전히 전복된다. 이포에서 근무하는 해준을 서래만이 몰래 쳐다본다. 집중할 만한 점은 서래와 해준의 위치이다. 서래는 주로 건물 위에서 해준을 내려다보고 해준은 반대로 서래를 올려다본다. 이것은 둘 사이의 위계를 드러내고, 언제나 서래가 해준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서래의 죽음은 남성의 보복이 아니다. 해결되지 못한 사건이 있으면 신경이 쓰여 잠자리에 들지 못하는 해준에게 영원한 미결 사건으로 남기 위한 그녀의 능동적인 선택이다. 이제 서래는 비련의 여인도 아니고 팜므 파탈의 악녀도 아니다(애초에 팜므 파탈이라는 단어 자체가 남성적 에크리튀르의 산물이 아닐까). 다만, 해준을 사랑하는 송서래로서 밀도 있게 존재한다. 바로 이 존재성이 「헤어질 결심」의 품위다.

여성 서사를 다루는 다양한 영화들에서 종종 남성을 지나치게 우매화하거나 폭력화하거나 그게 아니면 철저히 배제 함으로써 그들을 여성의 목소리를 강화하려는 소비재로 전락시키곤 한다. 이러한 정치적 올바름만을 잣대로 가동되는 수정주의적 태도는 예술의 생명력을 갉아먹는다. '페미니즘 영화'라는 미명을 내세워 놓고는 마치 해당 이념이 장르적 요소인 것처럼 도식화(예컨대, 여성을 억압하는 폭력적인 남성-분노하는 선한 여성 주인공-남성에 대한 여성의 보복과 카타르시스. 여성의 촌철살인하는 한 마디에 쩔쩔매는 남성, 여성에게 낭심을 가격당하고 우스꽝스럽게 쓰러지는 남성의 이미지들.) 시키는 영화들이 있다. 이러한 영화들은 다만 혐오를 조장할 뿐, 어떤 이념적 가치를 전경화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송서래라는 여성은 앞서 언급한 영화들의 여성 주인공들로부터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품위는 자부심에서 나오니까.


서래가 묻혀있는 곳 위에서 해준은 운동화 끈을 단단히 고쳐 맨다. 로우앵글로 내려갔다가 하이앵글로 해준을 담아내는 카메라의 움직임에선 앞으로 해준이 운동화를 벗지 못하리라는 강한 인상을 받는다. 이제 서래는 해준의 영원한 미결 사건으로 남는다. ‘해결’과 ‘미결’이라는 단어가 주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헤어질 결심」이라는 이 영화의 제목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헤어질 결심」은 줄임말로 으레 ‘헤결’이라고 불리게 되는데 이것을 눈으로 보면 구분할 수 있지만, 음성으로 듣게 된다면 ‘해결’이라는 단어와 구분할 수 없다(앞서 언급한 시각과 청각의 아이러니에 대한 텍스트 외부적 적용이다). 이미 「올드보이」(2003)에서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을 줄여 차자표기로 오대수(최민식)라는 이름을 지은 적 있는(물론, 극 중 오대수는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자’라는 뜻이라는 대사가 있긴 하지만) 박찬욱 감독이기에 이러한 접근에 정당성이 더해진다. 그러니까 「헤어질 결심」은 언제나 서래의 이야기이고, 그녀의 ‘헤어질 결심’이자, ‘미어질 결심’으로 남게 된다. 안개 같은 파도가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