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적 폭탄,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

劇場版 チェンソーマン レゼ篇, 요시하라 타츠야, 2025

by 우판다


하드보일드를 견지하는 에니메 시리즈의 시네마적 폭탄,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 간의 차이는 존재하고, 그 차이로부터 어떤 위계가 성립할 수도 있겠다. 더군다나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영화화되는 경우, 원작(만화를 포함한)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 위한 팬서비스에 그치고 마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이하, 「레제편」)은 실사영화-애니메이션 사이의 위계질서 바깥에 위치한다.

원작 만화 『체인소 맨』의 작가인 후지모토 타츠키가 영화광이며, 작품에 영화적 연출을 녹여낸다는 사실은 해당 작가와 작품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레제편」 또한 이우빈 평론가가 지적한 것처럼 “명확한 시각적 비전과 영화적 형식미를 관철”(이우빈, 『씨네21』 1528호, 「레제는 시네마다, 이우빈 기자의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하고 있다. 마치 초광각 렌즈로 촬영한 것만 같은 이미지들이나 마음이 아득해지는 달리 쇼트들을 관람하고 있자면,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에서 각각 강하게 느껴지던 카메라의 물성과 관념성을 더 이상 구분 짓고 싶지 않아진다. 카메라 없는 카메라 워크가 자아낸 감각의 리듬을 통해 「레제편」의 시네마적 정체성이 성립한다. 이 정체성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글들에서 적지 않게 다루어졌기에 말을 더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대신 「레제편」이라는 시네마를 더 들여다보려 한다.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제작된 <체인소 맨>의 탁월한 점으로 하드보일드 한 스타일을 꼽고 싶다.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특장점이자 가장 영리하게 취할 수 있는 스타일은 하드보일드가 아닐까? 타 매체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특히 산업적인 이유로 오락적 카타르시스에 귀결되기 쉽다. <체인소 맨>은 이러한 구조를 정면 돌파 한다는 인상이다. 보통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정서적 연속성이나 성장 서사를 중심에 두지만, <체인소 맨>은 감정의 내면화보다는 오히려 폭력, 쾌락, 냉소 그리고 본능에 충실한 육체적 리듬감에 더욱 몰두한다. (해당 세계관에선 정서적 연속성과 성장 서사가 뚜렷한 인물일수록 불리하다. 주연급 인물로는 아키를 꼽을 수 있겠다.) <체인소 맨>은 20분 단위의 분량과 반복 소비, 연속 흥미 유지와 같은 애니메이션의 자본주의적 시청 조건을 하드보일드한 감각으로 풀어내면서 산업적 형식을 예술적 태도와 일치시키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레제편」에서까지 견지된다.

주인공 덴지는 극 중 ‘체인소 맨’이며, 동시에 동명의 제목인 작품의 정체성이다. 따라서 덴지라는 인물의 성격을 들여다보는 것은 곧 「레제편」의 성격을 들여다보는 일일 것이다. 덴지는 타인의 죽음과 같은 감정적 사건에는 무감각한 모습을 보이며, 식욕과 성욕 그리고 폭력성과 같은 원초적 본능에만 충실하다. 그런 그는 자신에게 마음이 존재하는지 자문하게 되고 그것은 일종의 콤플렉스로 작동한다. 이 콤플렉스는 어쩌면 「레제편」의 콤플렉스일지도 모르겠다. 하드보일드적 스타일을 차용하며 전개되는 「레제편」엔 ‘마음’이 존재할까? 우리는 단순히 선정성과 폭력성 그리고 레제와 덴지 사이의 아련한 마음에 도취하여 소비적으로 즐기기만 하면 그만 아닌가?

「레제편」의 자극적인 이미지들을 관람하고 있자면, 이 영화를 정색하고 톺아보며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건 언감생심, 무용한 노력처럼 느껴진다(남성지향적 섹슈얼 판타지라고 지적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그런데 덴지와 마키마의 영화관 데이트 시퀀스는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종일 영화관을 들락날락하며 다양한 영화들을 관람한다. 그러나 영화들에 대해 그들이 느끼는 감상은 시큰둥하다. 극장의 다른 관객들이 울거나 웃더라도 그들에게 와닿는 감정은 없다. 당연하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이 무감각함이야말로 덴지로 위시되는 「레제편」의 정체성이니까. 그런데 마지막 영화(해당 영화는 그리고리 추흐라이의 1959년 작, 「병사의 발라드」의 오마주로 보인다.)에서 덴지와 마키마는 눈물을 흘린다. 덴지는 생경함을 느끼며 이 경험을 자신에게도 마음이 있다는 증거로 삼는다. 해당 시퀀스가 왜 필요했을까. 단순히 영화광인 작가가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라도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다는 시네마의 위대함을 설파하기 위해서일까. 글쎄, 어쩌면 ‘극장판’인 「레제편」이 관객에게 폭력과 선정성 그리고 로맨스로 폭발하는 스크린 안쪽 잔해 아래 어딘가에 은폐되어 있을 이 영화의 ‘마음’을 발견해 주기를 바라는 건 아닐까?


「레제편」의 ‘마음’을 탐색하기 전, 마키마라는 인물에 대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사실 마키마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환경에 가깝다. 그녀는 극 중 거의 모든 인물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텍스트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지만, 세계관의 구조를 조작하고 자신의 의도대로 인물들을 종용한다는 점에서 텍스트의 가장 바깥에 위치하기도 한다. 결국, 「레제편」은 범텍스트적 인물인 마키마의 자장 아래에 놓인 세계다. 우리는 이 세계에서 「레제편」의 ‘마음’을 찾아보아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SNS나 커뮤니티에선 소위 「레제편」 후유증에 대한 게시물이 많이 보이는데, 두 청춘 남녀의 이어지지 못한 사랑은 식상할 정도로 자주 소비되어 온 소재이다. 「레제편」의 장르도 액션을 외연에 두른 흔한 청춘 로맨스에 불과하다. 그런데 어째서 덴지와 레제의 이어지지 못한 사랑은 관객에게 더 특별하게 다가올까? 어쩌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레제편」의 ‘마음’을 탐색하는 지표가 될지도 모르겠다.


“나도 학교에 가 본 적 없어”라는 레제의 독백은 「레제편」의 명대사로 꼽히며 자주 회자 된다. 학생으로 위장한 채 덴지에게 접근했던 레제는 어린 나이에 학교에 다니지 않고 공안에서 일하는 덴지에게 그것이 잘못된 시스템임을 알리지만, 그녀 또한 학교에 가 본 적 없다. 덴지와 레제의 공통점은 사회 시스템의 울타리 바깥에서 위치한 채, 그 시스템을 위해 소모품처럼 다뤄지는 소외된 개인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마땅한 교육이나 가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많은 빚을 남기고 자살한 아버지 대신 빚을 갚아야 하는 덴지와 고아들을 감금하여 실험체로 기르는 소련의 암살자 레제는 이념이나 사상(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포함한)을 막론한 거대한 세계가 배태하고 있는 나쁜 질서의 피해자이다.

소외당하고 차별당하며 사회 시스템에 부적응적인 그들이 서로 사랑하려 하자, 마키마라는 ‘환경’이 등장해 그것을 가로막는다. 이 세계는 ‘환경적’으로 그들의 연대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키마에게 느끼는 분노는 단순히 로맨스의 장르적 카타르시스를 방해한 인물에게 관객으로서 가지는 분노가 아니다. 소외된 개인들의 사랑과 연대를 가로막는 사회 시스템에 대한 세계시민으로서의 분노다.

결국, 카페에 오지 않은(못한) 레제에게 덴지는 실망한다. 그리고 그뿐이다. 약간의 헛헛함을 느끼지만, 덴지는 세상의 나쁜 법칙이 가동되는 방식이나 이유조차 알지 못한 채(그러고 보면, 일반 데빌 헌터는 마키마의 능력을 볼 권한도 없다!) 곧 레제를 잊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덴지의 성격이자 「레제편」의 성격이니까. 그러니까 우리도 「레제편」의 폭력성과 선정성 그리고 로맨스가 호출하는 오락적 요소만을 만끽한 채 극장 밖을 빠져나와 금방 잊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러기가 힘들다. 아무래도 우리는 「레제편」의 ‘마음’을 이미 건네받았던 것 같다. 극장에 들어서는 것이 시네마의 악마와 하는 계약이라면, 우리는 조금 더 오래 분노하고 쓸쓸할 필요가 있겠다. 극장 밖 세계에서 도사리는 나쁜 질서들 또한, 지나치게 마키마적이니까.